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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독서의 근본을 돌아볼 때
[서평] 이반 일리치 <텍스트의 포도밭>(현암사)
  • 이원석 (dkdndn2@naver.com)
  • 승인 2016.09.14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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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연대한 보수

이반 일리치는 보수이다. 굳이 이렇게 특정하는 이유는 그가 한국에서 소비되는 방식 때문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진보적 신학자 이반 일리히'. 어느 신문 기사 제목인데 빗나간 것이다. 그가 박사 학위로 취득한 전공이 역사학이라서가 아니라(어쨌든 그는 가톨릭 성직자였으니까 신학자라 해도 무방하다), 그가 서 있는 포지션이 (근대적 이성이 아니라) 중세적 전통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는 보수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평가를 들어 보자.

"일리히는 근대성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좌파 쪽 사상을 추종하는 정말 많은 이들과 달리 일리히는 전적으로 유럽적인 의미에서 철저히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에게 유토피아라는 게 있다면 그건 중세였다." - 피터 버거, <어쩌다가 사회학자가 되어>(책세상, 2012), 160쪽

이반 일리치를 종종 진보로 착각하는 것은 그가 투사라서다. 한국에서는 주로 탈교육(deschooling)의 예언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종교 집단(교황청과 주교들)이나 전문가 집단과도 싸우고 의료산업이나 에너지 산업과도 한판 붙는다. 그는 진보적인 사상가 미셸 푸코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통해 현재를 조망한다(흥미롭게도 푸코와 같은 연배이다). 그의 강연집 제목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In the Mirror of the Past>가 정확하게 이를 뜻하는 것이다(푸코 또한 말년에는 고대 그리스의 지혜에 기울어졌다).

이반 일리치는 전통을 갈망하고 동경하는 보수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진보의 비판적 문제의식에 공감하여 그들과 연대하는 치열한 투사였다. 그는 평생 도처에 널린 지배 세력과 싸웠고 해당 영역에서 같이 싸우던 진보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진보들은 오래지 않아 그가 자기들의 입장에 반한다고 생각하고 거리를 두기 십상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이 <그림자 노동>에 열광하다가 곧이어 나온 <젠더>에 열폭하는 식이다.

한국에서는 이반 일리치의 팬덤이 그렇게 두텁지 않은 탓에 딱히 그의 안티 세력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또한 한국의 진보적 성향의 독자들, 특히 교육과 환경 등에 관심 있는 독자들은 여전히 그를 소비하고 있다. 그를 읽는 건 매우 좋은 선택이지만, 가급적 그를 더 정확하게 알고 소비하면 더욱 좋겠다. 그의 근본적인 입장이 보수라는 것을 간과하지 말자. 일리치는 그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다시 한 번 피터 버거의 말을 들어 보자.

"일리히는 다양한 집단들, 그러니까 자유주의 가톨릭교도들, 온갖 종류의 좌파들, 반체제 문화 지지자들, 환경주의자들, 페미니스트들의 문화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 집단들 각각의 이데올로기를 따르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을 하나씩 하나씩 모조리 실망시켰다. 그의 거침없는 방랑자적 정신은 어떤 틀로도 가둘 수 없었던 것이다." - 피터 버거, <어쩌다가 사회학자가 되어>(책세상, 2012), 156~157쪽

이반 일리치의 인식론적 토대

   
▲ <텍스트의 포도밭> / 이반 일리치 지음 / 정영목 옮김 / 현암사 펴냄 / 336쪽 / 1만 5,000원

이번에 처음으로 소개된 <텍스트의 포도밭>(현암사)은 명백하게 이반 일리치의 보수적 입장을 천명하는 작품이다. 일곱 장(章)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읽기 기술에 관해 쓴 최초의 책"(16쪽)인 <디다스칼리콘>을 중심으로 12세기에 진행된 독서 방식의 전환을 살펴본다. "나는 후고의 <디다스칼리콘>을 해설하면서 중세의 독서 습관에 대한 역사적 행동학과 더불어 12세기에 이루어지던 상징으로서의 읽기의 역사적 현상을 제시하고 있다."(14쪽)

후고(Hugues de-Saint-Victor)는 매체 전환기에서 기존의 독서법에 깊이 천착한 수도사다. 독법이 바뀐 것은 책을 바라보는 관점이 낭독의 대상인 악보에서 묵독의 대상인 텍스트로 바뀐 것과 직결된다. "수백 년에 걸쳐서 기독교식 읽기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페이지가, 경건하게 웅얼거리는 사람들을 위한 악보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각적으로 조직된 텍스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10쪽) 이는 곧 매체 기술의 변화를 반영한다.

"나는 첫 여섯 장에서 활자가 사용되기 300년 전인 1150년경에 일어난 테크놀로지의 약진을 묘사하고 해석했다. 이 약진은 페이지를 악보에서 텍스트로 변화시킨 테크놀로지와 관련된 염은 가지 이상의 발명과 장치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중략) 여러 테크닉과 습관들이 모인 덕분에 '텍스트'를 페이지라는 물리적 현실로부터 떨어진 뭔가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13쪽)

이러한 상황에서 후고가 이전의 독법과 관점을 주목하고, 복원한 것은 바로 이반 일리치의 모습과 중첩된다. 다시 말해서 <텍스트의 포도밭>은 그의 수많은 비판적 저작들의 인식론적 기반에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가 주목하는 오래된 읽기 방식은 낭독이다. 지금은 망각되었으나 여전히 유용한 독법이다. 나는 이전에 몸으로 하는 낭독에 대해 <공부란 무엇인가>(책담)에서 다룬 바 있다. 여기에서 그 일부를 소개하겠다.

"고대의 독서법은 단지 음독이 아니라 낭독이라고 해야 옳다(낭독은 음독의 하위 범주). 낭독은 텍스트의 리듬과 구조에 맞추어 소리 내서 읽는 것이다. (중략) 요는 우리의 청각을 통해 위대한 고전의 가르침이 스며들어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반복하여 말하지만, 나의 귀로 들어야 한다.

위대한 고전의 본문을 읽는 나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고, 내 몸을 훑어 내려야 한다. [중략] 무엇보다 먼저 이것이 제공하는 통찰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거대한 전통의 질서와 그 공동체 안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이원석 <공부란 무엇인가>(책담, 2014), 112~113쪽

그러나 낭독을 신비화하거나 낭만화할 필요는 없다. 고대에는 소리를 내지 않는 방식인 묵독을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언제나 묵독하는 모습이 아우구스티누스를 놀라게 했겠는가. 그러나 이와 동시에 낭독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오늘날 되살려야 할 필요 또한 자명하다. 위에서 말한 대로 낭독은 고전을 떠받치는 "거대한 전통의 질서와 그 공동체 안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낭독(수사의 읽기)과 묵독(학자의 읽기)은 서로 대조되는 두 패러다임을 대변한다. 낭독은 중세적 패러다임을 대변하고, 묵독은 근대적 패러다임을 대변한다. 둘은 낭독은 공동체에 연결시키고, 묵독은 개인을 형성한다. 낭독은 귀로 듣는 독서이고, 묵독은 눈으로 보는 독서이다. 낭독은 몸으로 읽는 것이고, 묵독은 머리로 읽는 것이다. 낭독은 전통을 존중하고, 묵독은 자유를 지향한다. 낭독은 따르기 위해 듣고(聽從), 묵독은 알기 위해 본다(읽는다).

이반 일리치는 12세기에 바로 이 두 패러다임 사이에 전환이 일어났다고 본다. 그 전환의 결과로 새로운 의미의 개인과 자아가 '발견'된다(이 시기에 근대적 자아가 새롭게 탄생했다는 뜻은 아니다). <슬램덩크>의 명대사를 가져와 바꿔 써 보자면,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은 그저 거들 뿐. 새로운 자기 발견의 여정에 나설 것을 독려하는 후고는 그 전환기를 반영한다(물론 그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기에 돌입했음을 외친 유일한 선지자는 아니다).

"우리가 오늘날 일상 대화에서 '자아' 또는 '개인'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바는 12세기의 위대한 발견으로 꼽힌다. (중략) 지금과 같은 종류의 자아가 당연시되는 사회적 현실은 여러 문화 중에서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이런 특이성은 12세기에 눈에 띄게 나타난다. 후고의 작업은 이런 새로운 양식의 첫 출현을 증언한다. 그는 극히 예민한 사람으로서 자기 세대의 특징은 자아의 새로운 양식을 경험한다." (38~39쪽)

근본으로 돌아가라

말한 대로 이런 맥락에 이반 일리치의 입장이 중첩된다. 또다시 매체 전환기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제 책은 시대의 근원적 은유가 아니다. 스크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12쪽) 이는 텔레비전을 말한다. "스크린, 매체, '커뮤니케이션'이 어느새 페이지, 문자, 일기의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이 책에서 이제는 막을 내리고 있는 책 중심 시대의 출발점을 다룬다."(8쪽) 지금은 그가 활동하던 당시보다 더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으나, 그 본질은 동일하다.

이반 일리치가 예리하게 감지한 변화는 이제 우리의 현실을 바꿔 놓고 있다. 그의 예측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이럴 때일수록 과거의 오랜 전통 속으로 돌아가 지혜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 첫째는 지혜다." 혁명가 일리치는 근본주의자다. radical은 급진적인 동시에 근본적이라는 의미다. 어원이 되는 라틴어 명사 radix는 뿌리를 뜻한다. 성경과 고전과 전통의 지혜로 돌아갈 때, 그는 왜곡된 현실과 맞서 싸울 수 있었다.

매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매체가 세상을 재현하고 재구성한다. 우리는 급격하게 전개되는 매체의 전환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격변하며 자아가 재구성되고 위기가 상시화된다. 그러나 기존 시스템은 이러한 변화와 위기에 대해 무능하다. 살아남는 것이 미션이 되고 말았다. 이럴 때일수록 이반 일리치의 접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반 일리치가 12세기로 지혜를 구하듯이 우리도 오래된 전통 속에서 생존의 방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중세와 근대의 두 근원 모두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낭독과 묵독으로 대변되는 두 패러다임 모두의 정수를 체득해야 할 것이다. 지성과 영성을 겸비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독립된 지성을 키워 가는 동시에 서로가 돕고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한다. 참 쉽게도 말한다는 비아냥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정도 생존 키트는 구비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지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여기는 헬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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