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글에는 영화 '밀정' 줄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이 점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주 <뉴스앤조이> 동료들과 영화 '밀정'을 봤습니다. 작년에 의열단을 다룬 영화 '암살'을 감동 깊게 본 터라, 같은 소재를 다룬 이번 영화에 거는 기대가 컸습니다. 2시간 30분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데도 저를 포함한 여러 관객이 한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에게 요구되는 삶은 '복종' 아니면 '죽음'이야." 총독부 경무국장 히라시의 말이 귀에 맴돕니다. 삶을, 사람 마음을 저리 쉽게 둘로 나눌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주인공 이정출(송강호 분)이 떠올랐습니다. 독립군에서 일본 경찰이 되었다가 다시 독립군 조력자가 된 이정출. 그의 친일 행위에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저 모습이 더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편집장이 후기를 쓰라고 지시했을 때, 이정출을 조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 이유입니다. 영화에는 이정출과 김장옥(박희순 분)이 - 김장옥은 실제 인물 김상옥 의사를 반영한 인물 - 친구로 나옵니다. 독립군 조력자가 된 이정출이 김장옥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글을 써 봤습니다. - 기자 주 |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장옥이, 자네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한강이 모두 얼 정도로 몹시 추운 겨울밤이었다네. 나는 일본 경찰 수백 명을 이끌고 밤새 자네를 추격했지. 후암동에서 남산을 지나 왕십리, 동대문까지. 수없이 쏴 대는 총알을 피해 지붕을 타고 담을 넘었던 자네 활약은 지금도 경성 내에서 회자되고 있다네.
의열단 내 최고 명사수인 자네도 수백 명의 경찰 포위망을 빠져나오지 못했지. 그때 자네 자결을 막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스럽다네. 총독부 히라시 경무국장에게 쓴 자네 보고서에 사망이라는 빨간 도장을 찍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네. 부검실 직원은 총에 맞아 절단된 자네 엄지발가락을 내게 보여 줬어. 동상에 잔뜩 부어올랐더군. 자네 몸에는 총상이 11곳이나 나 있었고 말야. 어떻게 그 고통을 다 참았나.
누군들 독립을 원하지 않겠나. 조선은 이미 기울어진 배라고 말하지 않았나. 주변 조선인 경찰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네. 잘난 고위 관직자들은 이미 나라를 팔아먹고 호위호식하며 잘살고 있다네.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이 왜 스러지는 나라를 위해 개고생해야 하는 건지.
자네는 내 말을 듣지 않았지. 그 덕에 나도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네.
우리 편일까, 적의 밀정일까
김우진을 만나면서 내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 어느 날, 나는 자네도 잘 아는 김우진(공유 분)에게 접근했네. 히라시 경무국장이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 분)을 잡으라고 지시했거든. 김우진이 의열단 핵심 인물이라는 첩보가 있었어. 그는 경성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며 골동 미술품을 암거래하고 있었지.
우리는 처음 만난 날부터 금세 친해졌다네. 고급 술집에서 독한 술을 먹으며 사는 얘기를 나눴어. 어떻게 하면 김우진과 마음을 트고 의열단 정보를 캐낼 수 있을까. 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네. 김우진도 내게 형이라 부르며 친근감을 감추지 않더군. 나도 싫진 않았어. 한편으로는 나를 경계하는 것 같았어. 우리는 잔뜩 취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상대방을 탐색했지.
어느 날, 조선인 경찰 하시모토(엄태구 분)가 김우진을 비롯한 의열단원을 체포하려 했어. 나는 은밀히 정보를 풀어 김우진이 도망치도록 도왔다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땐 아직 총독부를 위해 일할 때였거든. 하시모토에게 공을 빼앗기는 게 싫어서였을까, 김우진을 미끼로 정채산을 잡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친한 조선인 동생이 일본 경찰의 고문대에 서는 게 싫어서였을까.
김우진을 좇아 상해에 갔을 때, 이번에는 기필코 정채산을 잡아야겠다는 일념뿐이었어. 그를 따라 어느 식당에 갔는데, 그곳에서 아주 놀랄 만한 인물을 만난다네. 그래, 의열단장 정채산이 내 앞에 나타난 거야.
경계선 위에서 갈등하는 마음
정채산은 단도직입적으로 내게 물었어. "사람은 이름을 어느 쪽에 올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온다. 당신은 어느 쪽에 이름을 올릴 것이냐." 내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어. 독립군을 배신하고 일본 경찰이 됐을 때 버렸다고 생각한 마음이 아직 남아 있었던 거야. 정채산은 정확히 알고 있었어. 민족을 배신했다는 내 부채 의식을.
히라시는 내게 그랬지. 오늘날 조선인에게 요구되는 삶은 복종 아니면 죽음이라고. 내 동료 하시모토는 일본에 철저히 복종하는 친구야. 이 친구의 마음은 확고하지. 영특한 데다가 매 같은 구석이 있어서 먹이를 보면 놓치질 않아. 그 때문에 많은 독립군이 목숨을 잃었지. 당시, 히라시의 전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고 말야.
동료 중에는 나 같이 부채 의식을 갖는 이들이 있어. 일본 경찰복을 입고 있지만 마음은 아직 조선인인 거야. 그림자 속에서 독립군을 돕고 있지. 독립군 활동을 하면서도 뒤에서 일본의 밀정 노릇을 하는 이들도 있지 않나. 이들은 조선과 일본 어디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태어나, 경계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 타며 살아가는 이들이라네.
김우진과 의열단원들은 내 도움으로 경성에 대량의 폭탄을 들여오는 데 성공하지만, 어딘가에서 정보가 새 모두 체포된다네. 나는 히라시 지시로 이들을 고문해야 했어. 동료가 있는 곳을, 폭탄이 있는 곳을 발고하라며 인두로 살을 지지고 집게로 손가락을 짓눌렀어. 내 살이 타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그들의 눈빛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네.
내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장옥이, 상해에서 자네와 함께 드렸던 천주교 예배를 기억하나. 그때 사제가 들려주던 성경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인물이 있었다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이던 한 사람이 회심했다는 이야기네. 이 인물은 나중에는 예수를 전 세계에 전하는 데 앞장섰다고 하네. 이름도 사울에서 바울로 바꿨다지.
지금 나는 정채산 단장을 돕고 있다네. 총독부에 있는 옛 동료들에게 받은 정보를 넘기고, 국내 친일파 재산을 빼앗아 군자금을 지원한다네. 내 이런 활동으로 먼저 간 의열단원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네.
상황은 더 안 좋아지고 있네. 내 마음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이미 한두 번 배신한 내 말과 마음을 누가 믿으려 하겠는가. 자네가 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지금 - 김상옥 의사는 1923년에 사망 - 군국주의를 내세운 일본은 더 강해지고 있네. 아시아 패권 국가로 자리 잡았어. 그동안 많은 사람이 변절했어. 내가 내 마음을 계속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네. 보고 싶네, 나의 옛 동료 장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