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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교회
순수 가장한 폭력성 드러내는 한국교회, 바닥 정서에 눈떠야
  • 주원규 (bay3135@empal.com)
  • 승인 2016.09.0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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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기원

폭력의 기원은 그 종류나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소소하고 지엽적인 폭력에 대한 부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일괄적 적용이 아니더라도 폭력의 기원을 탐색하는 작업은 어느 부분에서는 분명 유효하다. 폭력은 일련의 집단적 움직임과 인간 안에 내재된 고유한 속성인 폭력성과 긴밀히 결탁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순서는 폭력성이 먼저다. 폭력의 기원을 이해함에 있어 폭력성은 하나의 원천이 된다. 인간은 상대를 짓밟거나 어떤 식으로든 비교 우위를 점거하기 위한 방식으로 폭력을 사용한다. 이렇게 썩 빈번하게 사용된 폭력성은 모순적이게도 상당히 중립적이며, 돌이킴의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돌이킴은 다음과 같다. 일단 한 번 분출된 폭력에 대한 반성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폭력성을 실현해 낸 자신이 피해자와 가해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최소한 의식할 수는 있게 된다. 폭력성이 구체화된 자리엔 분명 폭력이란 이름의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다음 지점, 폭력의 사건이 각인되는 지점에서 폭력성의 기괴한 악진화가 발견된다. 바로 집단성이다.

인간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를 약탈하고 점거하기 위한 방식으로 내재된 폭력성의 분출을 용인한다. 그 뒤 현실의 한 모습으로 구체화된 폭력, 폭력의 사건에 대해 반성하거나 최소한 복기할 용의를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부여받는다. 그런데, 어렵게 부여받은 반성의 시간에 집단성, 혹은 집단주의가 개입될 경우 폭력의 사건을 대하는 폭력의 이해관계자들은 반성과 복기의 기회를 스스로 망실해 버릴 가능성이 증폭한다.

집단성과 집단주의는 폭력을 자행한 이에게 두 가지 안도감을 허락한다. 집단의 논리 안에서는 반성과 복기보다 인정과 용인, 모순의 억지스런 봉합이 우선하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사실이다. 집단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 벌어진 주체의 균열과 견주어 말할 수 있는 폭력의 문제 앞에서 개인보다 집단의 가치를 앞세운다. 그것을 대의, 대승적 화해라는 표현으로 미화하지만 폭력의 기원에 대한 문제 해결이나 폭력의 사건이 가져온 개별 주체들의 상흔에 대한 어떠한 유보도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집단의 가치, 집단의 기준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집단과 보편성은 다르다. 한 집단이 인정한 기준과 가치가 다른 집단과의 기준과 동일하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집단과 집단 사이에 공유되는 가치의 공통분모가 있다면 그 공통분모가 바로 보편성일 것이다. 그런데, 보편성은 폭력의 사건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보편성은 폭력의 사건, 그 기원을 어떤 식으로든 소환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보편성과 양심이 가진 바닥의 양심, 바닥의 정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은 폭력성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보편성의 호소보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문제를 잠정적으로 봉합하고 상대적으로 다른 집단의 기준에 앞서는 비교 우위의 점유 논리를 보편적 가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때 말하는 보편성은 바닥 정서로서의 보편성이 아닌 이미 누수가 난 폭력성에 오염된 집단 이기주의가 낳은 그들만의 보편성이다.

이렇듯 그들만의 보편성이 우선되는 집단주의 속에서 폭력의 사건은 언뜻 보기엔 복기의 모양새를 띄는 듯 보이지만 결국 그 내부엔 그들만의 가치를 위한 침묵의 강요만이 남아 있다. 이러한 침묵의 지속이 보다 내밀하게 집단을 지배할 경우 그 집단은 평화로워 보이며 질서 있게 유지되는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이러한 위의 분석은 순수의 공동체로 알려진, 또한 바닥 정서의 보편성을 선전하는 교회의 현실과는 별 상관없는 일로 치부할 수 있다. 시정잡배나 다를 바 없는 이전투구로 얼룩진 정치판이나 각종 이권 단체에서나 벌어질 법한 문제로 취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한심한 작태를 연출하는 집단은 오히려 폭력의 문제 앞에서 대증적이긴 해도 반성과 돌아섬의 기회를 비교적 빠르게 확보한다. 그러나 교회는 폭력과 집단의 문제의식 위에서 더한 일을 겪게 된다. 바로 순수와 침묵이 바닥 정서의 보편성이라고 강요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폭력과 순수의 상관관계

종교가 가져다주는 가르침엔 보편성에로의 호소가 깊이 내재되어 있다. 종교는 인간 본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른바 구원의 방향에 다다를 수 있도록 이끄는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렇게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자리 잡은 종교는 숭배나 제자도의 원형으로 기능하기에 충분한 순수의 테마를 주제로 삼는다. 그와 함께 순수의 테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종교적 일방성에 입각한 행동을 촉구한다.

교회의 기능 역시 유사하게 전개된다. 교회의 핵심을 이루는 가르침인 예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보편성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보편성의 중심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정립시킨 다음 순수의 핵, 의심할 수 없고 의심해서도 안 되는 절대 구원의 강령을 충성과 복종의 이름으로 수행하게 된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분명 절대의 보편성을 바탕으로 설정하고 그 위에 순수의 집약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덧입힌 다음, 그렇게 덧입혀진 구원의 메시지를 종교적 일방성에 근거한 종교적 행동으로 연결시키는 데 탁월한 기능을 수행했다. 충성과 복종이란 일관된 키워드는 의심할 수 없는 순수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로 인해 한국교회는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의 양적, 질적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성장 욕구는 교세의 확장이 주춤했다고 평가되는 오늘날에도 여지없이 계속된다. 비록 눈에 보이는 성장세는 꺾였다고 보지만 여전히 부흥과 팽창, 감정적 고양으로 교회를 채우려는 욕구는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보편성과 순수에 기댄 한국교회의 현주소다.

그런데 과연 이 보편성, 순수가 바닥 정서에 근거한 보편성인가. 부정할 수 없는 그 밑바닥, 밑으로부터의 솟구침과 같은 인간 본연의 순수인가. 불행히도 오늘의 한국교회가 받아들이는 보편성과 순수의 의지는 거의 모든 영역이 폭력성의 기류에 연루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성의 저변에 집단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한국교회는 그 첫 단추부터 집단주의로부터 발화된 폭력성, 습속화된 기질과 순수가 불가해한 동거를 계속해 왔는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순수를 말하며, 절대 변개되지 않을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순수하지 않은 집단주의에 의거한 이념에 따라 폭력의 사건을 자행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 그의 십자가와 부활은 분명 인간을 철저한 바닥 정서의 보편성으로 견인한다. 인간 본연의 야만과 무구를 가감 없이 목도하게 한다. 그리고 성찰하고 반성하게 한다. 야만과 무구의 생리가 집단과 이념의 이름으로 얼마나 끔찍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기생해 왔는지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곳까지 밀어붙여 깨우치게 한 것이다.

하지만 폭력과 긴밀히 손잡아 버린 순수는 반성과 성찰의 지점으로 우리 각자의 존재를 이끌어 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바닥 정서, 그 보편적 현장성을 철저히 왜곡한다. 폭력의 배후가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지배해 버렸다는 사실을 철저히 망실해 버린 순수는 폭력성의 배후에 자리 잡은 집단의 기준과 가치를 바닥 정서의 보편성과 결합시켜 버린 것이다.

단언컨대 그렇게 결합된 폭력과 순수의 교회는 자신이 자행하는 폭력을 순수 종교적 신념의 분출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집단의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로 둔갑되어 온갖 정서적, 제도적, 물리적 폭력, 타자를 향한 몰염치, 배려의 망실, 관용의 말살, 배타적 태도의 무례한 지속을 서슴없이 자행하거나 독려하는 것이다.

탈주의 한 방법 -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허망하거나 참혹한 한 실상을 목도하게 될 때, 도리어 존재는 바닥 정서로서의 보편성에 더 절실히 눈뜨게 된다. 그러한 세계에로의 눈뜸으로 인해 우리 존재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목도하게 되는 것, 그것이 오히려 폭력의 사건, 그 배후를 반성할 수 있게 해주는 첫 발화점이 되는 것이다.

바닥 정서의 보편성에서 바라본 인간은 순수하지 않다. 아니, 순수해선 안 된다는 인식에 눈뜨게 된다. 폭력의 저변에는 획일화의 망령과 같은 집단주의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고, 그렇게 한 자리 차지한 집단성의 무자비가 낳은 우상이 바로 순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수가 하나의 푯대, 이념이 될 때, 순수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 순수의 시대를 꾸역꾸역 챙기는 교회가 어떤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지는 불을 보듯 훤할 것이다.

부끄럽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빌어 눈물 날만큼 뻔뻔하게 타자를 향한 폭력을 자행해 왔다. 순수의 이름을 가장해 인간 본연의 악성 중 하나인 폭력의 분출에 대해 뻔뻔함을 넘어선 무감각한 자기 합리화를 지속해 온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의 우리는 교회는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순수함을 가장한 폭력성이 오늘 우리 사는 세상, 각자가 소속한 집단을 어떤 방식으로 유린해 왔는지 고발할 용의에 눈떠야 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를 부끄럽다고 말할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 용기가 바로 예수의 영성이고, 예수가 말한 바닥 정서의 보편성이다. 그 용기가 우리를 험악하게 뒤얽혀 버린 폭력과 순수의 실타래를 풀어내어 인간을 인간 자체로 볼 수 있게 하는 생명의 도상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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