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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칠 것인가, 투쟁할 것인가
하나님나라 세우기 위한 조건들…'나'의 문제 앞에 옳고 그름 없다
  • 이종건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6.08.29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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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라는 말만큼 두리뭉실한 것은 없다.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 교회는 보수, 진보를 나누지 않고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대부분 자본주의사회가 그렇듯 극심한 이데올로기 전쟁이 한창일 때조차 형식적으로나마 교회가 양 진영을 아울러 분열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었다. 어쩌면 두리뭉실하게 주어진 질문, '가난한 자'에 대한 공통된 대답 "함께해야 한다"는 고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누가 가난한 자'인가, '어떻게 가난한 자'인가, 교회 공동체 안에는 '가난한 자'가 존재하지 않는가, 그래서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 앞에 '교회'를 위치시킨다면 문제는 어려워진다.

한쪽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그렇게 살게 된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계몽적 관점, 시혜적 관점에서 가진 것을 나누려 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가난의 이유가 구조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진단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본질적 질문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둘은 형식적으로나마 '예수' 이름 앞에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르나 본질적으로는 결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주장들이다.

신학대학교에 입학하고 빈민 운동 동아리에 들어가 '노숙인 아웃리치(out reach)' 활동을 하며 나는 후자의 믿음을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하나님이 그 믿음으로 나를 호출하셨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가난의 문제를 구조의 문제라 고백하고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억압과 착취의 도구이며 그것을 부수고 나아가 하나님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믿는다면 '현장'을 다층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예컨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주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분명한 것이 있다면 자본주의의 무한한 확장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전선의 존재다. 이 전선은 매우 넓게 퍼져 있어서 노동, 도시, 환경, 소수자, 폭력 등의 문제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그러나 대의와는 별개로 여러 문제가 생기는 이유, 즉 옳고 그름 문제의 '불분명성'은 이 전선이 넓은 만큼 이 전장에서 다양한 사람이 싸움에 임하고 있고 그들 모두가 반자본주의라는 고귀한 가치에 동의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내가 어쩌다 보니 '신학'을 하게 되고, 어쩌다 보니 '믿음'을 가지게 된 것처럼. 어쩌다 보니 싸움에 나선 사람이 있고, 단지 순간의 억울함을 자양분 삼아 이 전장에 나선 사람도 있다.

순수한 정의?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순수함'에 대해 집고 넘어가자.

'순수한 페미니즘', 운동권이 아닌 '순수한 대학생', '순수한 철거민' 등의 논란이 페미니즘과 학내 민주화, 철거 현장 싸움에서 대두되고 있다. 이런 '순수'의 잣대에는 반드시 투쟁이 고귀한 것이어야 하며, 반드시 거대한 대의에 동의하고 있어야 하고, 반드시 무오해야 하며, 반드시 목표한 것만큼 성취를 이뤄야 한다는 근본주의적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혐오 세력이 '순수함'을 들이밀며 투쟁의 가치를 훼손할 때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투쟁에 임하고 있는 당사자들과 연대인 모두가 '순수함'의 근본주의적 믿음에 맹목적으로 귀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것을 마냥 아킬레스건이라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인정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이룩해야 할 해방 세상과 현실의 괴리는 너무 크다.

우리는 거의 모든 순간 과도기적 단계에서 이제 막 발걸음을 뗀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근본주의적 믿음과는 별개로 근본주의적 태도, 즉 교조주의적 태도를 배제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활동가든 당사자든, 대학생이든, 기독교인이든 불완전한 상태로 본질을 꿈꾸고 불완전한 상태로 연대한다. 우리 싸움은 아주 복잡하거나, 질척거릴 수밖에 없다. 

짧은 시간 동안 도시 빈민, 노동자, 철거민과 함께하며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의 이 불완전함은 순수함보다 아름답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순수함(해방, 하나님나라)을 지향하는 불완전함일 때 그것을 '정의롭다'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 여인이 예수에게 향유를 붓는다. 결혼 지참금으로 여겨질 만큼 값비싼 향유를 붓는다. 제자들은 그 여인을 나무라며 요구한다. 더 알맞은 곳에 쓸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노동 해방이나 철거 없는 세상, 뭐 그런 일을 위해 그 돈을 쓰는 것이 제자들 볼 때 알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제자들을 나무란다.

짐작하건대 이 여인에게 향유를 붓는 일은 '실존'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인은 지난 삶을 청산하고 인간 객체에서 주체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향유' 자체가 아니라, 향유를 통해 예수를 섬기려 했던 그 행동에 있다. 그 여인은 예수의 사려 깊음으로 향유를 붓는 사람이 아닌, 스스로 가난한 자와 함께하는 예수의 제자가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향유는, 한 존재를 객체에서 주체로, 일상에서 투쟁으로 깨어나게 하는 '값싼' 제물이었을지 모른다.

반자본주의와 하나님나라를 신앙으로 고백하며 현장에 연대하는 내가 당사자들을 '정의롭다'고 판단할 때 그것은 처음 느낀 '문제의식'과 처음으로 행동에 옮긴 용기에 근거가 있다. 자본주의 굴레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남아 그것이 실력이든 우연이든 비겁한 일이었든 돈을 모으고 사업장을 마련하고, 집을 마련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쫓겨난다.

실상 그들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이었는가? 남들이 해고당할 때, 그것은 그들에게 실존적인 물음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옆 구역이 철거당할 때 스스로 운이 좋다고 되뇌었다. 그것이 '나'의 일로 다가오기 전까지 그들은 죄인이었다. 현재 나와 여러 신학생이 '옥바라지선교센터'라는 이름으로 연대하고 있는 '옥바라지 골목'이 그렇다.

사실 세월호 유가족도 그렇고, 사드에 반대하는 성주 군민들도 그렇다. 우리 평범한 이 모두 어디까지나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단계, 단계를 충실히 밟아 온 사람들이다. 그 끝나지 않는 계단 어딘가에서 지쳐 스스로 멈추거나, 서로 돌리고 돌리는 폭탄과도 같은 재앙이 어느 순간 내 차례에서 터져서 나락으로 떨어졌을 뿐이다. 투쟁전의 일상과 투쟁은 오직 그 한순간의 차이일 뿐이다. 그 순간의 차이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제는 그 계단에서 벗어나 계단 없는 삶을 꿈꾼다. "여기에서 멈춰도 괜찮다." 뒤늦게 오르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계단 밖으로 벗어나자고 주장하며 버려진 돌로 새집을 짓자고 그렇게 주장한다.

그런 이들에게, 마치 예수의 제자들처럼 훈수를 두려는 자들은 언제고 존재한다. 그 훈수의 빌미는 순수함이다. 다른 말로는 '완전함'이다. '무결함'이고 '고결함'이다. 옥바라지 골목 같은 철거 현장에는 알 박기를 들이민다. 법적 용어가 아닌, '카더라'식 어휘 구사로 이 투쟁이 순수한 것이니 순수하지 않은 것이니 왈가왈부한다.

나는 그 주장들 앞에 '철거민' 당사자를 들이밀고 싶다. 그 삶의 궤적과 가까스로 선택한 '저항'의 선택지. 미루고 미룬, 마지막까지 선택하고 싶지 않았던 고배와도 같은 '저항'의 선택지야말로 사실상 우리가 알아야 하는 전부 아닌가?

세월호 유가족에게 들이민 순수의 잣대는 또 얼마나 잔인한가, 사실이 나열되어 있어도 얄미운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읽고 싶은 것만 읽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또한 당연한 일이지 싶다. 모든 투쟁 당사자가 그러하듯,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에게 순수의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 모두 아직 재난이 실제 상황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의 문제로 인식한다면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자본주의가 선사하는 재난 '해고', '철거', '혐오', '전쟁'은 갑자기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 주변에 늘 산재해 있고 우리에게도 실제적인 영향으로 다가오고 있다. 작은 단골 가게가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건물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사람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다. 공장 하나를 폐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순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 수백 명이 사라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침몰은 단지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 '사람' 304명이 죽임당한 일이다.

그 모든 일의 전조는 같은 직장에 다니는 동료가 해고당할 때, 나의 옆 동네가 재개발구역으로 순식간에 사라질 때, 다른 공장이 자본가 이윤을 위해 폐쇄당할 때 온다. 생명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일 때문에 크고 작은 사고가 잦다면, 우리는 이것을 경고성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남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임을 분명히 인식할 때 우리는 '순수성'보다 불완전한 존재로 잠시 '멈춤'을 이야기하고, 비로소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투쟁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결국에 마주하게 될 해고를 미루기 위해 눈치를 보며 옷깃을 여미는 생활에 순응하고, 크고 작은 사고들에 내 가족이 엮이지 않기 위해 여러 번 주의를 주고, 눈에 띄기보다 조용히 생활하라고 말하는 것. 언제 재개발이 올지 모르는 낡은 동네를 최대한 피해 어떻게든 대출을 받아 크고 멀끔한 동네로 가는 것.

혹은 옆 동료와 노조를 조직해 정규직 입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에 함께하고, 크고 작은 사고의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고 이윤이 먼저가 아닌 생명이 먼저인 세상을 주장하는 것. 낡은 동네에도 사람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곳을 지켜 내야 할 가치를 발굴해 나가는 것. 도망치기보다 재난과 마주하는 것.

이 선택지는 어느 순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 삶 곳곳에 이미 전제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구의역에서 한 노동자가 억울하게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착하게' 키웠음을 후회했다. 그 비참한 후회가 우리 모두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순수함'이니, 뭐니 따지는 것보다 나의 삶에서 곧 다가올 재난에 대비해 연대하고, 투쟁하자.

이 모두가 '나'의 문제로 여겨진다면, 미친 듯 질주하는 자본주의 열차 안의 꼬리 칸에서 우리가 옳으니 그르니 서로 물고 뜯고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로소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 이미 이 전쟁에 우리가 내던져져 있으며 적이 내 앞에 들이민 칼끝 앞에 방패를 들고 싸우는 사람을 내 손으로 끌어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 다음은 당연히 '나'다. 스크럼을 짜고 광장에 나가라. 단골집이 사라지는 것에 분노하고 어느 순간 사라지는 이웃 이야기를 궁금해하라. 순응하라는 목소리에 의구심을 품고 순수를 들이미는 사람에게 이것은 '당신' 일이기도 하다고 주장하자. 이대로 당하고 있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소중하다.

"이 언약은, 오늘 주 우리의 하나님 앞에 우리와 함께 서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 자손과도 함께 세우는 것입니다." (신 29:15)

우리는 결코 '나'일 수 없다. 저들의 투쟁이 결코 나와는 무관한 일일 수 없다.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에 함께 동참하자. 오늘 하나님이 당신을 호출하고 계신다.

이종건 / 감리교신학대학교 재학 중. 언제 졸업인지가 확실치 않아 늘 같은 프로필. 옥바라지선교센터 조직국장을 맡고 있지만 실상은 잡무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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