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일곱 형님들을 제치고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나이가 정확하게 몇 살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여덟 형제들 중 막내였다는 점, 형들이 골리앗과의 전투에 참전하러 사울에게 갔을 때 함께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와 집에서 양을 쳤다는 점(모르긴 해도 싸우기에 너무 어리다고 불합격 처리를 받았을 것이다)을 감안한다면 그 즈음 나이가 군인이 되기에는 부족한 십대 후반 정도가 아니었을까.

십대라면 자기 미래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할 나이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지내신 분도 중학교 때부터 책상머리에 '대통령 ○○○'라고 써 붙이고 자기 암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던가. 하물며 하나님의 명을 받아 당대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선지자 사무엘이 직접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었으니 다윗이 자기 미래에 대해 품은 뜻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무엘이 다녀간 뒤로 신분에 변화가 당장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그날부터 줄곧 하나님의 영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점만 보아도 다윗의 내면이 상당히 고무되고 충일돼 있었을 거란 짐작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정도만큼 세상도 이해한다. 세상이야 어떻게 됐든 자기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정도만큼의 세상만 보이게 마련이다. 어린이들의 코 묻은 돈이라도 긁어모아야겠다는 사람은 아이들의 생명이 위태롭든 말든 불량식품을 팔고야만다. 폐수처리비용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사람은 하천이 죽어가든 말든 소나기를 틈타 처리 안된 폐수를 흘려보내고야 만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자기들에게 이득이 되는 만큼까지다. 나머지는 있든 없든 살든 죽든 상관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모른다'.

그러나 세상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세상이라도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세상 속에서 '잘'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세상에 대해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가 만약 건전한 상식과 적절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연결되어 영향을 미치는 세상 속에서 '잘'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이내 깨닫게 될 것이고, 그만큼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을 경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의 경우는? 왕은 족장의 기능을 단순히 확대시킨 것은 아니다. 왕은 백성도 다스려야 하겠지만, 외적으로부터 안전도 지켜야 하며,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외교적인 균형도 유지해야 하고, 나라의 경제도 안정시켜야 하는 복합적인 임무를 수행해내야 한다. 그런 왕으로 지명된 양치기 다윗의 머리 속엔 어떤 생각들이 오가고 있었을까? 전쟁터에 나간 형들에게 도시락을 날라주던 다윗의 시야에는 어떤 세상이 보이고 있었을까? 딱딱하고 재미없을 줄 알면서도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세를 훑어보려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윗의 머리 속에 그려지고 있을 세상의 모습을 곁눈질로나마 들여다보고 싶기 때문이다.

먼저 팔레스타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대한 양해를 구해야겠다. 영어 팔레스타인의 어원인 라틴어 필리스티아(Philistia)는 '블레셋인들의 땅'이라는 뜻으로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붙인 지명이다. 그 이전까지는 로마사회에서도 유대가 공식지명으로 사용됐지만, 서기 131년에 유대에서 구세주를 자처했던 코크바(Kokhba)와 랍비였던 아키바(Akiba) 주도로 유대 전체가 로마에 대항했고, 이에 진압에 나선 로마군에 의해 134년 초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함락되고 만다. 이때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유대가 아예 재건되지 않기를 바랐는지, 예루살렘에서 유대교도를 모조리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유대라는 지명을 버리고 필리스티아, 즉 팔레스타인으로 부르도록 해 오늘날까지 공식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일관되게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을 사용할 예정이다. 첫째 이유는 중복되는 지명이 주는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고, 둘째 이유는 기독교 역사학자들도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을 이미 학술 용어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족인줄 알지만, 로마황제의 뜻을 받들어서가 아님은 알아주시길.

우리나라가 '반도'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대륙민족인 중국과 해양민족인 일본의 침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듯이, 팔레스타인 또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소아시아를 이어주는 전략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에 인근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과 그에 따른 지배에서 거의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초기 철기시대가 도래할 즈음인 기원전 1200년대의 팔레스타인은 주변 강대국들이 거의 동시에 몰락하는 바람에 '권력의 진공상태'에 놓여 있게 된다. 덕분에 팔레스타인 골짜기마다에 움츠리고 있던 군소 부족 혹은 도시국가들은 '지배에 의한 평화' 대신 '세력확장을 위한 전쟁'을 선택해 불꽃 튀는 격전의 시대에 돌입한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주민구성은 매우 잡다했다 한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팔레스타인은 지형 자체가 동에서 서로 뻗어 있는 여러 산맥과 계곡으로 분절돼 있어 군소 부족들이 정착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그러한 자연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대부분의 부족들은 배타적인 지역성을 띠고 서로 대립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함락한 이래 사사시대에 이르기까지 대결해야 했던 수많은 가나안 족속들은 모두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얼굴을 내민 군소 부족들이었고, 마찬가지로 군소 부족의 하나였던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지역 정세 속에서 종족연맹체 형태에서 탈피해 왕국으로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전환과 발전의 시기 정점에 다윗이 있었다.

이제 당시 주변 정세를 좀 더 자세하게 더듬어보자. 팔레스타인 주변을 둘러보면 단연 돋보이는 초강대국은 역시 이집트다. 이집트의 왕조는 대체로 셋으로 나뉜다. 고대왕국(2850∼2200), 중간왕국(2000∼1780), 그리고 신왕국(1570∼1200)이 그것이다. 각각의 왕국 사이에 침체기라고 볼 수 있는 제1중간시대(2200∼2050)와 제2중간시대 혹은 힉소스시대(1780∼1570)가 끼어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했을 때는 신왕국 시대 말기인 라암세스 2세 때라는 설이 있다. 여하튼 제19대 왕조(1208∼1210)에 속하는 세토스 1세, 라암세스 2세, 그리고 메르넵타 시대까지만 해도 이집트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확고한 패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0대 왕조가 들어선 1200년대에 접어들어 이집트의 세력은 급격하게 위축됐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력도 상실하게 된다.

한편 팔레스타인 북쪽 아나톨리아 지역(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에는 강력한 히타이트(헷 족속)가 버티고 있었다. 히타이트 족속은 아나톨리아 일원에 수많은 도시국가 형태로 흩어져서 살다가 기원전 2000년대 초반에 모여 강력한 왕국을 건설한 다음에 남쪽과 남동쪽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이때 함무라비가 건설한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을 멸망시키면서 아나톨리아와 팔레스타인 북동부의 패권을 쥐게된 것이다(참고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1000년대 초반에 형성된 신바빌로니아 왕국이다). 비록 이집트처럼 팔레스타인에 대해 직접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지는 못했지만, 남쪽의 초강대국 이집트로부터 강화조약을 이끌어낼 정도로 대등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국 또한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1200년대에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세력이 줄어들었고, 마침내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초강대국이었던 두 나라가 이처럼 동시에 타격을 받은 것은 '민족대이동' 때문이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엄청난 수의 해양민족이 아나톨리아와 이집트 등지에 몰려들어가 기존 세력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왕국이 이들 때문에 멸망한 것을 보면, 해양민족의 주력이 그곳에 집중됐던 것 같다. 그러나 이집트는 심각한 타격까지는 입지 않은 것 같다. 이집트는 섬나라 민족을 자국 영토에서 밀어내 팔레스타인 남서부의 해안평야에 이주시켰고, 이들 또한 이집트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됐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이집트 세력은 몰락하게 됐고, 그 틈을 타 해양민족은 이집트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학자들은 사사시대부터 솔로몬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을 위협했던 블레셋이 바로 이들 해양민족의 일부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다윗이 기름부음 받을 당시의 팔레스타인 정세는 대략 이러했다. 비록 신분상으로는 유대땅 베들레헴이라는 시골 양치기에 불과했지만, 왕을 꿈꾸고 있는 청소년 다윗이라면 이 정도의 지역정세쯤은 충분히 꿰뚫고 있지 않았을까. 히타이트가 멸망하고, 이집트가 쇠락한 지금이야말로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비록 히타이트를 멸망시킨 강력한 블레셋 민족이 버티고 있고, 모압, 아말렉, 암몬과 같은 호전적인 군소 부족들이 팔레스타인 일대에 할거하고는 있었지만, 안정적인 정치체제와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이집트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시대에 비하면 기회의 문은 훨씬 넓었을 것이다. 더구나 만군의 여호와가 함께 한다는 증표를 사무엘로부터 받지 않았던가. 그때부터 다윗은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다음이야기] 사울의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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