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독일의 개혁자 루터는 로마서를 근거로 교황이나 사제의 중간적 역할이 없어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종교개혁의 새 시대를 활짝 열었다. 즉 구원은 선행이나 미사 행위 따위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인간 스스로 자력 구원이 가능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도 굳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뱅은 "인간의 모든 의를 모아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더라도 단 하나의 죄도 보상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강조한 신조로써 오늘날 많은 보수 교단이 적극 수용하고 있다.

▲ '면죄부'에 반대해 종교 개혁의 새 시대를 활짝 연 루터. 지금 개신교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신칭의를 오용하는 기복 교회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이 하나님의 구원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이신칭의는 신자들에게 구원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주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신자들이 이미 확보된 구원에 대해 자족하면서 더 이상 적극적인 선행이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약점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에서 간단히 논하고 싶은 점은 한국 개신교의 외적 성장과 함께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 중에 하나가 '기복주의'인데, 이게 전통적인 이신칭의의 교리와 혼합돼 지속적으로 심각한 증상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당장은 욕심대로 즐기며 살다가, 나중에 회개하고 천국 가겠다"는 매우 기회주의적인 신앙 행태다. 꿩도 먹고 알도 먹겠다는 매우 영리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심보인 것이다.

헌데 따지고 보면, 이런 알량한 배포도 신앙 지식이 전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들은 성경을 근거로 천국 구원에 대한 보장을 어느 정도 확보한 후 죄를 저지른다. 이제는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고 영접했기에 구원 염려는 안 해도 좋으니 수도사처럼 피곤하게 살 게 아니라, 앞으로 하고 싶은 짓도 좀 하고 즐기며 살겠다는 거다.

사실 요즘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배교적 비리들은 신앙과 무관한 비신자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다. 주로 교회 생활을 오래한 목사·장로, 집사들에게서 발생하고 있다. 어찌 보면 초신자들은 뭘 잘 모르는데다 천벌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저지르지 못할 범죄도 교회의 중견 직분자들은 용감하게 잘 저지른다. 잘못된 지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아는 게 있기에 탈이 난 것이다.

그들은 교회 돈을 상습적으로 도적질해도 차후에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신학교나 교회에서 배운 신학에 의하면 '회개만 하면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같은 논리로 목회 독재, 신도 우민화, 헌금 유용, 성추행, 패거리 교단 정치, 사치 생활, 그리고 교회 세습 등도 크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못 하면 바보다. 회개라는 아주 편리한 면죄부가 있는 것이다.

나중에 회개하면 된다

사실 세인들은 "어떻게 성경을 믿는 공교회의 직분자들이 저런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는가" 하며 깊히 탄식하지만, 역설적으로 일부 종교인들은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는 성경 구절을 잘 알기 때문에 도리어 저런 범죄를 저지른다.  

유명한 목사가 성경 지식이 없어서 교회 돈을 유용하거나, 표절하거나, 또는 성추행하는 게 아니다. 대형 교회에서 수십 년 동안 목회한 그들은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잘 안다.

일부 변절한 목회자들에겐 세상에 이신칭의 신학처럼 신나는 교리가 없다. 겉으로 적당히 경건한 척하면서 뒤로 몰래 나쁜 짓을 해도 '천국 보험'만은 안전하니 얼마나 좋은가. 그저 순진무구한 교인들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아니 설사 들키더라도 끝까지 잡아떼거나, 또는 노회나 총회의 여러 동업자들을 동원하여 무마하면 된다. 물론 돈이 좀 들기는 한다.

그런데 이는 비단 직분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교인들도 사회에서 해선 안 될 일을 종종 저지른다. 욕심 때문에 하기도 하고 현실적 이익에 약해서 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마음 한 구석으로 이신칭의 교리에 기댄다. 그리고 이게 습관화하고 만성화하면 나중에는 아예 '회개를 전제로' 불의한 행위를 과감하게 감행하기도 한다.    

기업인의 탈세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일단 돈부터 챙기고 본다. 회개는 그 다음 일이다. 필요하면 뇌물도 바친다. 성공이 먼저다. 급하면 거짓말도 가끔 한다. 거래가 우선이다. 나중에 회개하면 된다.

이런 흐름에 대해 원종천 교수는 "기복신앙으로 물든 한국교회는 거룩한 삶과 윤리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적 외형이 하나님의 축복인양 착각하며 이기적으로 복만 추구하고, 이신칭의를 빌미로 자신의 신앙을 정당화하며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고 따끔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 바람에 이제 개신교 일각에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의의 면류관(딤후4:8) 대신에 개털모자를 써도 괜찮다"는 말세적 풍조까지 퍼지고 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교회 윤리와 교회 정의가 바닥을 치고 있다. 교회가 이웃에게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의 비난을 받고 있다.

개신교의 윤리적 실패가 칼뱅과 아르미니우스가 제멋대로 혼합된 기복적 '짬뽕 신학'의 결과라는 분석이 가능하게 된 이유다. 그리고 물론 윤리적으로 실패한 교회가 필연적으로 그 사역에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행함이 없는 신학

오늘날 교회에서 믿음에 대한 강조는 뜨거운데 비하여 상대적으로 '행함'이 너무 부실하다.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유창하게 설교하고 내려와서는 교회 돈을 도적질한다.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고 평일에는 퇴폐 업소를 드나든다. 교회에서는 고상하고 사회에서는 저속하다. 믿음과 행함이 수시로 충돌하여 교인들 상당수가 자신도 모르게 위선적 이중인격자로 전락하고 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와 신실한 직분자가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으로 개신교가 개판이란 소리를 듣고 있다. 이건 마치 거대한 방주의 하부에 구멍이 뚫려 조용히 침수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위기다. 외양은 제법 준수하고 멀쩡하게 보이는데 밑바닥 기초가 부실한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믿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이며 언어 유희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물론이고 루터나 칼뱅이나 웨슬리 등 그 어떤 개혁자의 가르침에도 이렇게 단순하고 무식하고 잡스러운 사상은 없다.

만일 "거룩한 삶이 누락된 기독교 신앙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그건 단지 '거짓 믿음'일 뿐이다. 뿌리가 콩나무인데 팥이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을 오해해선 안 된다. 이것은 믿음만 있으면 상습적으로 죄를 지으며 살아도 좋다는 값싼 면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며 삶의 과정이 다소 불의해도 무조건 구원만 받으면 된다는 기만적 사상은 뿌리까지 타락한 사이비 신앙일 뿐이다.

오히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단순히 믿고 구원만 받으면 되는 게 아니라, 그 믿음대로 바르게 실천하며 살아야 마땅하다. 죄를 즐기며 거룩한 행함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자이며 그에게는 결코 구원이 없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야2:26)"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주를 따르고 있나

지금은 은혜의 시대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 값없이 구원을 주셨다. 따라서 칭의는 복음이다. 성도가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고작 개털 모자식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그리스도인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다"고 말했다.  

성도의 구원은 '믿음+행함'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도리어 성경은 '믿음=행함'이 일치해야 참된 믿음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내 멋대로 살아도 되는 구원이란 결단코 없다. 그건 거짓 신앙이며 스스로 속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너무 연약해서 항상 성결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바른 믿음은 반드시 '거룩한 삶'을 이끌고, 거짓 믿음은 '타락한 삶'을 이끌어 결국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한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당신이 보수인지 진보인지를 묻지 않으신다. 어느 교단 소속이었는지도 묻지 않으신다. 목사인지 집사인지도 묻지 않으신다. 얼마나 예배에 많이 참석했는지도 묻지 않으신다. 얼마나 헌금을 많이 했는지도 묻지 않으신다. 얼마나 부유하게 살았는지도 묻지 않으신다. 또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지도 묻지 않으신다. 그분은 다만 당신이 누구를 진리로 믿었으며 어떻게 그를 따랐는지를 물으실 것이다.

기복신앙은 정당한 행함이 별로 없이 세속적 복을 추구하는 원시적 주술 신앙에 기인한다.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하나님 말씀조차도 무속적으로 도구화하며 탈선하는 매우 그릇된 신앙이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여라(시2:11)"고 말씀한다. 그리고 이게 바로 공교회의 직분자들이 툭하면 몰상식한 죄를 범하고는 "비판하지 말라"거나 "죄 없는 자가 어디 있냐"는 등 간교한 변명만 늘어놓을 게 아니라,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공의에 힘쓰며 피흘리기까지(히12:4) 죄와 싸워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행위로 칭의되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 없이 칭의되는 것도 아니다." - 장 칼뱅(Jean Calvin)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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