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소저너스>에 '묵시적 예수'(The Apocalyptic Jesus)라는 제목으로 실린 랭커스터신학대 신약학 교수 그레그 캐리(Greg Carey)의 글입니다. - 편집자 주

미국 일부 지역 소방관들은 나무와 덤불을 연료라 부른다. 숲이 바짝 마르면 특별히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는 살짝 불을 놓거나 전기 불꽃을 한 번 붙이기만 해도 맹렬한 산불을 일으킬 수 있다.

현재 우리의 문화적 분위기에 불길한 징조가 느껴진다. 마치 바짝 마른 숲 바로 옆에 살고 있는 것만 같다. 선거 정치 속에서 우리는 더 광범위한 불만이나, 인식에 있어 더 큰 간극이 있으리라 상상하는 것은 무리였다. 선두에 있는 대통령 후보들에 대한 비선호도 여론이 기록상 현재 가장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당파적 적대감은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을 달리고 있다. 즉, 민주당원들과 공화당원들은 지난 25년간 해 왔던 것보다 서로를 더욱 부정적으로 간주한다. 거의 매일, SNS 친구들은 정치적 이견에 따라 친구를 맺자고 하고 친구를 끊는다고 말한다. 불붙기 쉬운 이러한 환경은 우리를 스트레스로 지치게 한다.

옛날 루니툰(Looney Tunes) 만화에 나오는 거품 나는 시험관을 기억하는가? 그러한 위협적인 감정은 우리의 인종 차별적인 분위기의 특징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라틴계 사람들은 오랫동안 부적절한 정치 폭력에 시달려 왔는데, 최근에 와서야 단지 그 문제가 광범위하게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흑인 생명이 중요하다"라고 말할 때, 그리고 혹은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 또는 "푸른 눈의 사람들의 삶이 중요하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인종적인 정치 풍토에 기반한 의식에 충실하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인종 문제 추이에 대해 미국인들이 거의 한 세대 동안 낙관적이지 못했던 것보다 현재가 더욱 비관적이다.

한 연구가는 "지금이 내 평생 본 것 중 최악의 정치 기후다"라고 기술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유색인종인 몇몇 친구가 지금처럼 이렇게 강한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표출한 적이 없다. 전에 없이 강렬한 문화적 반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문화적 분열이 강력한 이 시기에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극히 도전적인 구절을 만난다. 여기서 예수는 분열을 기뻐한다. "나는 이 땅에 불을 놓으러 왔다"고 그는 주장한다.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가지고 왔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다른 점에 대해 부모나 형제와 소원하게 된 사람이라면, 당신은 예수가 말하고 있는 바처럼 느낄지 모른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항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대항하고 어머니는 딸에게 딸은 어머니에게 반한다." 등등. 만일 우리 삶이 캘리포니아 덤불을 닮았다면 예수는 거기다 성냥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자신들의 불유쾌한 행동에 대한 변명으로 의지한다. 우리는 모두 젤롯당인 열심당원들이 자신이 열광하는 의제를 밀어붙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반발과 만날 때면, 의로운 자들은 마땅히 저항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들이 박해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프레드 펠프스(Fred Phelps)는 웨스트보로침례교회를 세우고 목회해 왔다. 그는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자기 삶을 설계했다. 그의 교회는 동성애 행사를 지지했고 반동성애 폭력 희생자들을 위해 장례식 보초를 섰고 미국 군인들의 죽음에 기뻐했다. 이 단체는 그들을 거부하는 지역사회에 대항해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했다. 펠프스의 자녀 13명 중 엘레벤(Eleven)은 법학 학위를 땄다.

갈등이 있을 때 자신이 의롭다 여기는 이들은 결코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는다. 반대로 갈등은 단지 자신들의 확신을 강화할 뿐이다. 예수는 그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비틀어 왜곡하려 한다. [우리에게 적을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한 것이 예수 아닌가?(눅 6:27) 예수가 평화를 일구는 자를 복 준다 하지 않았나?(마 5:9)] 하지만 항상 좋은 예수만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복음의 중요한 문제를 무시하게 된다.

예수는 박해를 참는 사람들을 축복한다.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면 복이 있나니."(눅 6:27) 하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또한 가르친다. 그들이 거절당할 때 발에 있는 먼지를 털어 내라고.(눅 9:5, 10:11) 중요한 것은 정직함이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직접 이 난해한 예수를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대부분 해석가들처럼 나는 묵시적 사유가 예수의 이상을 형성했다고 믿는다. 그가 선포한 하나님나라는 바로 묵시를 의미했다.(눅 4:43, 8:1)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인간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역동적인 개입으로 이해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를 강제하는 분열의 순간으로 말이다.

그렇다. 그의 사역은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묵시적 관점에서 평화에는 궁극적으로 강렬한 분열의 시기가 앞선다. 복음은 갈등의 이야기로 가득하고, 그 이야기들 속에서 다양한 집단들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반대한다. 갈등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는 진실로 갈등을 자신의 사역의 핵심으로 보았다. 평화와 화해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복음은 예수의 사역이 평화와 갈등 둘 모두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인다.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이런 긴장과 어떻게 관련될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우리 몫이다.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이루고 자비와 정의의 삶을 살도록 부르신다. 그럴 때 때로 우리는 거부반응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 헌신하고자 할 때 언제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모든 것을 무릅써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조차도. 희망컨대 아마도 우리는 극단적인 상황을 위해 이러한 순간들을 대비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불의에 대한 '창조적 부적응'이라 불렀던 킹 박사 말을 기억한다. 치명적이고 뿌리 깊은 인종주의에 맞서, 비폭력적인 직접 행동 전략은 표면적으로 갈등을 초래한다. 킹 박사는 이 점에 대해 사과하기를 거절했던 것이다.

제자들은 갈등을 만날 수 있지만 우리는 사랑 안에서 갈등에 처한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을 '늑대들 가운데로 보내지는 양들'이라 일컬었다.(눅 10:3) 마태복음의 예수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그들을 훈계한다.(마 10:16) 제자들이 고난이 그 자체로 끝이 된다 해도 박해받기를 기뻐한 것은 오직 그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임무를 부여받지 않았다. 예수의 공동체는 화해의 길을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상황을 해결하기를 바랄지 모른다. 우리는 분명한 말을 갈망한다. 우리 행위의 기준을 제공해 줄 결정적인 말 말이다. 하지만 저것이 예수가 아니라면 이것이 예수인가? 대신에 예수는 따르는 자들에게 표징을 분별할 것을 도전한다. 너희들이 바람을 보고 날씨를 분별하는 법을 알면서, "왜 현재의 때를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나"라고 그는 말한다.(마 13:56)

사실, 나는 예수의 말씀을 조금 비틀고 있다. 예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사역이 그들을 분열의 순간으로 몰고 있음을 인정하도록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현재의 때가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이기에, 우리는 역시나 우리가 명백하고 분명한 증거가 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은 무슨 때일까. 분열을 맞이할 때인가. 평화를 추구할 때인가.

번역 / 최봉실(cbsyji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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