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SFC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성호 씨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강성호 씨는 순천에서 '골목책방 그냥과 보통'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흑역사>(짓다)를 저술한 역사 연구가이기도 합니다. - 편집자 주

고신 교단과 SFC의 관계는 1950년대 중반에 공식화되었다. 1954년에 SFC는 지도위원을 위촉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다음 해 열린 고신 교단의 총회에서 지도위원이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SFC는 고신교단 내부의 학생운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SFC의 존재와 활동은 교회 교육의 연장선상에서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사정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지만. 다른 파라처치와 구분되는 특징이자 한계라 할 수 있다.

SFC는 1960년대까지 중·고등학생 위주의 운동을 펼쳤다면. 1970년대부터는 대학생 중심으로 사역의 초점이 변화되었다. 본격적으로 기독 청년 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으로 1974년 4월 초순에 개최된 제1회 대학생 대회(4.4.~6.)를 들 수 있다.

이때는 박정희 정권이 반유신 운동을 펼치는 학생운동을 조직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했던 시기(1974.4.3.)였는데, 진보적 성향의 기독청년단체인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조직이 거의 궤멸되다시피 했다. 이러한 대조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묘한 괴리감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SFC가 제1회 대학생 대회를 열었던 시기를 전후로 고신 교단은 고신대를 둘러싼 분규를 겪고 있었다. 당시 고신 교단은 교권을 둘러싼 부산파(한상동)와 마산파(송상석)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송상석 목사는 고신대의 이사 수를 확보하기 위해 문서를 불법으로 위조하다 들통이 났고. 이를 안 한상동 목사 측은 송상석을 사문서 위조 혐의로 부산 검찰에 고발하였다. 결국 송상석 목사는 형사 입건되어 이사장을 내려놓게 되었다.

더욱 웃기는 사실은 고신 교단이 원래 소송 불가의 원칙을 채택했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성도 간에는 불신 법정에 고소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는 점이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SFC의 관심은 1980년대로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때는 캠퍼스에서의 이념 논쟁이 한창이었고.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경우 로잔 언약에 대한 소개로 사회참여적인 고민이 싹튼 시기였다. SFC는 1983년에 한 번 내홍을 겪었는데, 고신 교단의 관리·감독을 탈피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선배들의 반대와 전체 구성원의 공감대를 이끌어 내지 못해 유야무야되었다고.

SFC의 사회참여 노선은 1989년 11월 11일에 발표된 <학생 신앙 운동 언약문>에 '복음화와 변혁운동'이라는 아티클이 실리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SFC는 1990년대 초반부터 공명선거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는 서울U-SFC와 부산U-SFC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참여에 대한 SFC 운동원의 고민은 대부분 내부적으로 환영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결은 조금 다르나 1973년 9월 김해여고의 SFC 학생들은 우상숭배라는 이유를 들어 국기 경례를 거부하여 갖은 고초를 당했지만, 고신 교단은 개인의 양심에 따라 하도록 하라는 애매한 입장만을 밝혔다. 유신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신앙을 지키려는 학생들을 보호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80년대 후반에는 서울 지역의 일부 SFC 운동원들이 진보적 복음주의 기독 학생운동인 '기독교문화연구회'에 참여했지만, 그들의 고민이 SFC 운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개인적인 경험을 적어보자면 SFC에 대한 괴리감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2009년 대학생 대회였다. 이때는 주 강사가 하루마다 바뀌었는데, 베트남 선교사라는 사람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대부분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에 기겁을 했었고, 마지막 날에 온 박득훈 목사의 설교 내용이 이념 논쟁으로 번지는 걸 보면서 절망감을 느꼈었다. (이때인지는 모르겠으나. 기도회 시간에 어느 간사는 '영적 포퓰리즘'을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전국위원회에 보낸 나의 글에 대해, 담당 간사는 너무 급진적인(?) 글을 쓰지 말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사실 허세 가득한 조잡한 내용이었다). 솔직히 <흑역사>에 실린 '로마서 13장의 정치학'이라는 챕터는 MB정권 시절 위의 구절로 국가에 대한 복종을 강조한 선배를 떠올리면서 쓴 내용이었다(현재 울산 지역 SFC의 대표간사).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SFC는 교리를 강조하는 그룹과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그룹 간에 노선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긴장이 있었다. 교리를 강조하는 보수 그룹은 주로 충청,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반면, 사회참여에 대한 고민은 서울과 전라 지역을 중심으로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사회참여 노선은 몇몇 기제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는데, 보수 그룹은 담당 학생들을 빨간 물에 들지 않게 하느냐고 진땀을 빼고 있다.

어쩌면 이번 사태는 SFC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둘러싼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SFC 내부의 보수 그룹은 소위 불온한 사상과 신학을 견지한 세력을 하나하나 거세해 나가는 식으로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이를 표면화시킨 건 <기독교 공동체의 성서적 기원과 실천적 대안>이라는 책을 둘러싸고 빚어진 검열이었다.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숙청의 본격화가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고신 교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구조가 문제를 심화시켰다고 본다. 그러니까 SFC 내부의 보수 그룹과 SFC를 종속화시키려는 고신 교단 인사들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교단에 대한 SFC의 종속성은 신학 간사와 비신학 간사에 대한 차별로 나타나는데, 이는 주로 여성 간사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제서야 말하지만, SFC에서 6년 동안 근무한 아내를 통해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어휴… 이와 관련해서는 <여성 사역자의 삶과 사역에 관한 질적 연구>(송희영, 고신대, 2014)를 꼭 읽어 보길 권한다. (지금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지 모르겠으나 SFC의 수련회 때 조직되는 의전부도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7년 SFC의 성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손봉호 교수는 SFC가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고신 교단의 운동으로 갇혀 버린 것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 1981년 당시의 전국위원장은 SFC가 과거 집착주의에 빠져 변화의 몸부림을 거부하는 걸 비판하였다. 지나치게 재래적인 사고에 사로잡힌 결과 비판적 시각이 반영되지 못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정책이 수용되지 못한 SFC를 안타까워했다. 동문으로서 아쉬운 마음에 몇 글자 끄적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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