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그대로 6천 년?

젊은지구론이라는 말은 사치스럽다. 결국 '문자 그대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창조과학'이라는 주장을 할 뿐이다. 이는 기독교 내부에서도 심각한 반박에 봉착한 지 오래다.

젊은지구론을 주장했던 초기 창조과학자들은 이미 다중 격변설을 넘어 창조과학적 논변 자체를 포기하기 시작했고 지적 설계론 등 새로운 형식의 인식론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냉정히 따져 우리나라에 창조과학 연구자가 있기라도 한가. 어떤 연구서를 내놓고 있으며 과학계와 어떤 학문적 충돌을 경험하고 있는가.

개혁신학은 문자주의를 옹호하지 않았다

과학을 둘러싼 뻔한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그들은 과학이 아니라 그들의 '신념'을 강요하고 싶은 것이다. 그 신념이 무엇인가. 성경에 나온 '문자 그대로'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주장이며 '문자 그대로' 분석해 보니 지구가 창조된 지 대강 '6,000년'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도무지 상식적인 주장이 아니다. 과학적 견지에서, 역사학적 견지에서 비상식이라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그리고 개신교 신학의 견지에서 비상식적이라는 말이다.

네덜란드 태생 칼빈주의자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펼쳐 보라. 시작부터 창조에 관해서 논하고 있는데 6,000년설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창세기 1장 1절과 1장 2절을 구분하며 제1창조, 제2창조를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을 자세히 보면 약간 이상하다. 하나님이 이미 '혼돈' 가운데 존재하는 '물질'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무에서 무'가 아닌 '유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심각한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벌코프는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무에서 유'로의 1차 창조로 설명한 것이라고 본다. 제품을 만들려면 기초 자재가 필요하듯 '질료의 창조'를 먼저 하고 1장 2절부터 그 질료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형상들을 만들어 내었다는 주장이다.

여전히 한국교회에서 이런 식의 단계적 창조론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신학적으로는 사망 선고를 받은 지 오래다. 창세기 1장 1절과 1장 2절이 원문에서 따로 떼어져 있지도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1절과 2절을 나눌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무에서 유' 다시 '유에서 유'로 나아가야 하는 '합리적 설명'이 필요했다. 벌코프는 이 무모한 설명을 위해 조직신학적 논변을 차용할 뿐이었다. 과학적 혹은 역사학적 증거보다는 형식논리적으로 주장을 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조직신학적 사유 방식이 무엇인가? 철학적 사유로 성경을 재조직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식 사고다. 즉, 중세적 사고방식, 로마 가톨릭적 사고 방식에서 연유한다. 가톨릭 얘기까지 끌어들이지는 않겠다. 중요한 사실은 성경의 정통성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벌코프가 '서양 전통 철학'의 사유 방식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그게 중요하다. 그 어디에도 '문자 그대로'라는 방식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건 벌코프식 이야기라고? 심하게 말해서 벌코프가 누군지 모른다면 개혁주의 운운할 자격이 없다. 더구나 벌코프식 주장은 벌코프만의 주장이 아니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일반적 태도 중 하나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문자주의를 거부했다

하나 더. 아우구스티누스를 살펴보자. 루터가 아퀴나스적 전통을 벗어나 종교개혁의 신학적 기초를 마련하게 되는 근저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었다. 실제 한국교회에서는 초대교회부터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그리고 중세 천 년을 훌쩍 뛰어넘어 루터와 칼뱅 시대만을 정통 기독교 시대라고 주장하는 목사나 신학자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거짓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교회, 그러니까 로마 가톨릭이 가장 소중히 여긴 교부 중에 한 사람이며 중세 천 년 전통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이다. 동시에 동방정교회에는 전혀 영향을 못 준, 오히려 동방교회에 의해 다양한 비판을 받은 서방 교회 전통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계보임을 자처하는 것은 결국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 로마 가톨릭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자처하는 것밖에 안 된다.

"그건 후대의 일이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식의 논변을 받아들이자.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에 대해 어떤 인식을 보였는가. 그의 저서 <참된 종교>를 읽어 보면 명료해질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결국 성경은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는 '알레고리' 해석학을 제시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안 된다. 문자 이면에 새겨진 의미를 유추하고 분석해 종합적인 신학적 인식으로 발전해 가야만 한다. 이러한 태도는 칼뱅에게 고스란히 이어진다. 칼뱅 역시 문자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칼뱅 이전에 에라스뮈스는 히브리어-헬라어 완역본 성경을 완성시키며 라틴어 성경의 무수한 오류에 대해 공박했고, 이로부터 시작된 성경 비평적 태도는 칼뱅에게도 고스란히 내려온다. 소위 '그리스도 중심적'인 모형론적 성경 해석 같은 것들이 칼뱅에 의해 주창되는 것 아닌가. 조금 과격하게 설명한다면 알레고리 변형판에 불과한 해석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루터 역시 '이신칭의'라는 틀거리로 성경을 해석했고, 칼뱅 역시 '하나님의 주권', '예정설' 등으로 성경을 해석했다. 여기에 '문자 그대로'라는 발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로마 가톨릭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성서 해석'이 제안된 것이다.

문자 그대로도 '해석'의 방편일 뿐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를 해 보자. 소위 '문자 그대로'를 주장하며 지구 창조 6,000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미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있다. 본인들도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6,000년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주장인가. 중세 시절 성경에 나온 족보 등을 단순하게 계산하여 나온 주장 아닌가. 이것이 중세 신학에서 의미 있게 활용된 적이 있던가. 아니면 개신교 신학에서 의미 있게 받아들여진 적이 있던가.

한국교회에서는 사도 베드로를 이야기하면서 '하루를 천년 같이, 천년을 하루 같이' 식으로 하나님의 때를 가늠할 수 없다는 식으로 편히 이야기하지 않는가. 더구나 벌코프식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기간을 고려하면 지구 나이는 6,000년보다 훨씬 길지 않겠는가.

참혹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인류 4대 문명이 기원전 3,500년경에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그 밖에 무수한 문명이 발굴되고 있는 시점이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문명이 어떻게 천 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무수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수렵과 채집에서 농경과 목축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그리 간단한 과정이라 생각하는가. 라스코 동굴벽화가 기원전 1만 5천 년의 일이며,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제작된 것이 2만 3천 년 전 일이다.

함부로 과학을 이야기하지 마라. 동시에 사탄 운운하거나 모든 것을 '진화론 대 반진화론' 식으로 단순화하지 마라. 지구 창조 6,000년설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신학적 소양도 없는 주장이다. 어떻게 이런 마구잡이식 주장이 교회의 정통 신조인 양 돌아다닌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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