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빨아서 줘." 순간 귀를 의심했죠. 제가 이십 대 초반일 때 직접 겪었던 일입니다. 교회의 공식 행사에 참석하려고 어느 남자 전도사님 차로 이동하는 중이었죠. 저보다 서너 살 선배님이시고 신학생이라 평소 깍듯하게 대했던 분입니다. 아내도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어서 평소에 "언니, 언니" 하며 따랐던 사이였고요.

저는 당시 조수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선배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떡 하니 사모님처럼 타고 갈 배짱 좋은 후배는 없으니까요. 가는 길이 멀고 더운 여름이었기에 시원한 캔 음료를 두 병 사서 발랄하게 조수석에 앉았습니다. 그러고는 운전 중인 전도사님에게 건네려고 보니,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면서 캔 음료를 마시기 어려워 보이더군요. "에이, 스트로까지 챙겨 올 걸 그랬어요. 불편하시죠?" 이렇게 건넨 말에 저런 답이 온 거였습니다.

순간 당황했죠.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응시한 전도사님 눈빛을 보니,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물리적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아주 길게, 제 머릿속에서 복잡한 생각들이 빠르게 지나갔죠. 일단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하는 난감함이었습니다. 제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다행히도 저는 '쎈 언니들'의 집합소인 이화여대 출신이었고, 여성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어요. 평소 이런 방식의 성추행에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죠. 정말 '가까스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는 고속도로를 빠져나가기 직전에 자연스럽게 말했습니다. "아, 전도사님. 저기 옆에 잠시만 세워 주실래요? 잊은 게 있어요."

밝은 제 목소리에 의심 없이 차를 멈춘 사이, 저는 그 차에서 내렸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고속버스로 가겠습니다. 행사 장소에서 만나죠." 그리고는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네. 이게 핵심이에요.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그 시절, 부모님께도, 그리고 그 전도사님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 일화를 지금 공적인 기사 글에서 밝히는 이유는 소위 '남성 목회자-여신도' 사이 성적 권력 위계의 고리를 끊는 법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예요.

삼중겹의 권위를 갖는 대한민국 목회자

대한민국에서 '목회자'는 삼중겹의 권위를 가지는 자리입니다. 일단 대부분 '남성'이죠. 21세기 "탈성적 전문가 개인"(성별을 초월하여 양성평등적으로 전문성에 입각하여 직업 활동을 하는 개인)이 승부수를 던지는 세계에서, 여전히 그 '전문가'의 자리가 압도적으로 '남성'인 몇 안 되는 직군이 목사입니다. 심지어 몇몇 교단은 남성 중심적인 교리를 들어 여성의 목사 안수를 원천적으로 막고 있는 처지입니다. 제도적으로 여성 목회자 안수가 가능한 교단들조차도 여성 목사의 숫자는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한 실정이죠.

특강하러 들린 어느 교회에서는 작은 꼬마 여자아이가 제게 다가와 속삭이듯 물은 적도 있어요. "오늘 강사님에요? 여잔대요?" 의외로 인간의 사회적 상상력은 무궁무진하지 않습니다. 본 것들을 기초로 꿈을 꾸죠. 멋진 여자 목사님, 인생을 인도해 주는 멋진 여자 목회자를 자연스레 접하지 못한 여성 청(소)년들에게 '여자가 된다는 것'은 권위의 이름이 아닙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목회자는 '영적 아버지'의 권위를 가집니다. 유교 문화적 관성이 아직 남아 있는 한국 사회에서 스승과 아버지의 역할이 접합된 이미지입니다. 더구나 성스런 텍스트인 성서를 해석하고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영적' 존재라고 인식됩니다. 그러니까, 남성, 스승, 아버지의 세 사회학적 자리가 집결된 인격이 바로 대한민국의 '목사'라는 말입니다.

하여 한 세대쯤 손위에 있는 남자 평신도조차도 "목사님, 목사님" 하고 부르며 영적 인도자의 권위에 따르는 일이 다반사죠. 목사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합리적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급하게 택시로 이동하는 중에 기사님이 계속 난감해하며 전화를 받고 계셨습니다. 교회 일에 관해서는 '3년 서당개'를 넘어 눈치의 달인인지라 금세 정황을 파악했습니다.

기사님이 교회 담임목사님 기사로 오랫동안 봉사를 하셨는데, 그 아들이 세습한 뒤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생계를 위해 택시를 시작하셨다는 거죠. 그런데 스무 살은 더 어린 새 담임목사님이 심방 다니실 때마다 계속 교회 차를 운전하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목사님 말씀인데 어떻게 순종을 안 해요. 그래서 정말 이렇게 저렇게 회사에 반차도 내고 휴가도 몰아서 차량 봉사하고, 그러는데 정말 힘들어요. 더구나 오늘처럼 30분 전에 전화하셔서 바로 오라고 하시는 때에는."

이미 목적지에 다 도착한 마당이고 거기서 신학 수업을 할 수도 없는 처지라 안타까움을 가득 담고 차에서 내렸죠. '빈 차'라는 빨간 알림등을 끄고 부리나케 달려가는 그 장로님의 뒷모습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권력 위계의 고리 끊어 내려면…

나이 예순 넘으신 교회 장로님조차 그러하신데, 스무 살 서른 살 젊은 여자 평신도에게 목사님은 어떤 존재겠어요? 목사님 말씀에 이성이나 합리성을 적용할 생각을 '감히'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당연하다 하여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그러했다는 말이죠. 교회 남성 목회자와 여신도 사이의 권력 위계가 유발하는 성추행이나 성폭력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아니요"라고 말하면 됩니다.

물론, 그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그때 무려 '목사의 딸'이었고, '여성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음에도, 아주 짧게는 정신이 혼미했었죠. 하지만 그 기억하기도 싫은 성적 모멸감의 상황을 아주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말씀드렸다시피 '예방 교육' 덕분입니다. 인식이나 경험담을 미리 나누고 대처 방법들을 미리 의논했던 '언니들'과의 토론 과정이 큰 힘을 발휘한 것이죠.

21세기 현 문명을 학자들은 "육체 문화"라고 부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인간 육체의 성적 탐닉에 빠진 문화라는 겁니다. 아니, 이상하죠. 언제는 인간이 육체를 가지지 않은 적이 있었나요? 인간의 육체로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가장 대표적으로 물리적 노동, 재생산(출산), 그리고 성적 탐닉입니다.

산업혁명 이후로 인간의 물리적 노동력은 대부분 기계로 대체되었어요. 재생산이요? 대한민국이 저출산 1위 국가가 된 것은 별도로 분석할 일입니다만, 어쨌든 이제 더 이상 출산은 몸의 '주된' 그리고 '지속적'인 기능이 아닌 상황입니다. 이제 하나 남았죠. 더구나 소비 자본주의는 인간의 몸조차 소비 상품으로 전락시켰어요. 우리는 매일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근육질의 남성 복근과 터질 듯한 여성의 볼륨감 넘치는 몸매를 어디서나 봐야 합니다. 그것도 HD 고화질 화면으로. 확대 기능까지 장착한 온갖 기기들을 통해서!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회뿐만이 아니라 온 나라가 '성적 응시'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상호적이지 않은 성적 응시와 욕망의 분출구는 대개 힘의 권력 구조 아래로 작동하죠. 그래서 요즘엔 유치원에서조차 아동들에게 성교육을 하지 않습니까? 어떤 상황이 위험한 상황인지 가르치고, "싫어요. 안돼요. 아니요." 하고 말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그런데 왜 교회는 이걸 하지 않죠? 거룩한 성도들의 집단이라서요? 우리 한 번 웃고 가죠. 실상이 그렇지 못한 건 우리가 더 잘 아니까요. 그래요. 인간은 죄인이고 그래서 스스로 자기 의(義)를 이룰 수 없죠. 하지만 그걸 직시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기독교 신자들은 고질적인 정신분열증을 앓게 생겼습니다. '성도'와 '죄인' 사이에서요.

목회자들은 어찌 보면 더욱 가여운 존재입니다. 평신도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하니, 즉 거룩한 성직자의 모습으로 항상 비춰져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이번에 이동현 목사가 오랫동안 괴롭혔던 A 학생의 경우도 그랬다잖아요? 하나님나라 사역에 힘쓰는 귀한 목회자에게 동력을 주고 위로를 해 주는 여성의 역할을 요구한 거예요. 남자를 구원하는 여자! 그래서 힘을 얻은 그 남자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플롯'은 남성들의 상상물이에요.

서로, 함께 건설하는 하나님나라

물론 '사피엔스'종인 인간은 자신들의 상상을 제도 속에 구현할 능력을 가졌기에(유발 하라리의 주장이죠.) 오천 년 가부장 역사는 이런 구성을 때론 은밀하게 때론 공공연하게 실재화해 왔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서로가 함께"(카이 알렐론-사도 바울이 말한 교회의 이름이죠) 이루는 거예요. 임마누엘, 우리와 동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에 힘입어…. 하나님나라는 소수의 영능 있는 남성 목회자들만이 건설하는 것이 아니에요. 함께 건설해 나가는 거죠.

<뉴스앤조이> 기사를 보니 A가 구체적인 제안들을 편지글로 보냈더군요. 아주 지혜롭고 적절한 제안입니다. 필요해요. 물론 그 내용을 '경전'처럼 각 교회마다 그대로 실행할 필요는 없어요. 각 공동체는 저마다의 개별 특수성이 있을 테니까요.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 규칙이나 제도도 함께 만들라는 것.

젊은 여신도들 마음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남성 지도자들 머리에서 만들지 말고, 또한 그동안 목사님들이 가해자였으니 목사님은 빼고 가자는 배타성으로도 말고, "서로가 함께"요. 서로가 나약하고 범죄하기 쉬운 인간임을 고백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런 위험성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면서 서로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거룩한 씨앗을 발견하고 싹 틔우는 공동체적 관계성을 '지어 나갈' 수 있을지.

그러니 이런 과정이 진행되기 전에 만약 남성, 스승, 아버지의 권위를 내세워 상호적이지 않은 성적 관계를 요구하는 목회자를 만난다면 당당하게, 그리고 현명한 방법으로, 말하세요. "저는, 아니에요!" 혼자 하기 어렵다면, 언니(들)을 찾아가세요. 요즘엔 시민단체나 교회, 그리고 학교 안에도 "쎈 언니들"이 아주 많아요.

언니들이 "쎄"진 건 성격 탓이 아닌 거, 아시죠? 교회는 소유만 나누는 곳이 아니에요. 권위도 함께 나누는 곳이죠. 그런데 남성들이 그 권위를 독점하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쎄"질 수밖에요. 예수께서는 무려 신적 권위조차도 인간과 함께 나누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에요.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한편으로 권위를 독점하려 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러니, 기억해요.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불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백소영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기독교사회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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