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듀오라는 프로에서 가수 김태우와 월미도 작은 거인 박주현이 함께 노래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둘의 키 차이는 얼핏 보아도 30센티는 넘을 것 같았습니다. 마치 꺼꾸리와 장다리와 같은 모습의 두 사람은 거의 완벽하게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특히 눈높이를 맞춰 가며 작은 거인 박주현을 리드하는 김태우의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노래하는 것을 들으며 패널로 앉아 있던 홍석천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고 객석에서도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노래를 잘 부른 탓도 있지만 격려하고 이끌어 주는 모습, 서로를 신뢰하는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노래가 끝난 후에도 감동이 가시지 않아 눈가를 닦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감동에 젖던 저는 어느 순간 갑자기 슬픔에 마음이 에이는 듯 하였습니다. 저렇게 노래하는 사람들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따듯한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데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는 위로가 아니라 상처를 주고, 감동이 아니라 절망을 느끼게 하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냉랭함이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허황되게 느껴지기만 해서 한동안을 눈물을 참느라 애를 써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절망'을 느끼는 이유

오래 전, 노숙자들을 VIP 고객으로 섬기는 '민들레국수집'에서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보고 우리들의 교회가 저랬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제 글을 보고 어떤 분이 "주여! 교회를 겨우 민들레국수집과 비교하다니…"라는 댓글을 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견해의 차나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사망 선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대해 알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복음의 대적자로 기능하는 것입니다. 긍휼이 없는 신앙은 거짓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그런 신앙은 차별을 정상으로 만들고, 남의 고통을 자신의 기쁨으로 만듭니다. 그것은 '절망'이라는 말 이외에는 어떤 다른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모습을 기독교 매체에 들러 기사를 읽을 정도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에게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댓글의 예를 들었지만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리스도인이란 간판을 내세우는 너무도 많은 분들에게서 무정함과 폭력을 일상처럼 보아왔습니다. 교회를 잘 나가면 잘 나갈수록, 봉사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면 할수록, 성경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할수록, 더 권위적이고 더 폭력적이고 더 매정한 사람들이 되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판듀'라는 연예 프로에서 키가 너무 작아 오래도록 힘겹게 살아온 한 젊은이와 눈높이를 맞추어 최선을 다해 노래하는 대중가요 가수에게서 아름다움과 존경을 느끼는 것이 그토록 가슴 아팠던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는 저를 너무도 싫어합니다. 남을 비판하고, 큰 교회 훌륭한 목사님들의 책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러려니 합니다.

과연 제가 단지 반골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요?
실패한 자가 성공한 자를 시기하는 것일까요?
마음이 비뚤어진 것일까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혼자서 잘난 척 하는 것일까요?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예, 저는 어떤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실제로도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제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걸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처럼 말하지 않으려 해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정말 불쌍한 사람이 하나 있는 셈입니다. 심지어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까지 심각하게 "자신의 모습을 좀 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아픕니다. 견딜 수 없이 아픕니다. 하지만 이 길이 제 길인가 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목사였던 키에르케고르는 '경건한 풍자'로 유명합니다. 그의 풍자 가운데 거위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위들이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보았다. 이 자리에서 한 마리의 수거위가 설교를 했는데, 거위들에게 얼마나 숭고한 사명이 주어졌는지 말했다. "창조주는…" 예배에 참석한 암거위들은 '창조주'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모두 허리를 굽히고, 수거위들은 고개를 숙였다.

창조주는 은총 안에서 모든 거위들에게 날개를 주었고, 모든 거위들은 이 날개를 사용해 강 건너 복지로 날아갈 수 있다는 설교였다. 이 집에서 그들은 다만 이방인일 뿐이고, 자유롭게 본향으로 날아가는 게 그들의 사명이다.

그들은 주일마다 이 설교를 듣지만, 집회가 끝나면 저마다 맡은 바 일을 하기 위해 자기 집으로 다시 비틀거리며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만이다. 거위들은 식성이 좋아서 곧 통통해졌고, 포동포동 살이 올라 먹음직스럽게 되었다. 그리고는 성 마틴 축제 전날 밤에 집주인에게 잡아먹혔다. 그러나, 창조주에게 요구받았던 목표를 향해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사용하려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거위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언제가 올 죽음에 대비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느끼는 자신의 건강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괴로워하며 비쩍 말라가는 거위들도 더러 있었다. 이런 거위들을 볼 때마다 '현실적인' 다른 거위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다고 날 수 있겠어. 날개에 집착하다 보면, 저들처럼 말라빠지고, 발육도 못 하고, 우리들처럼 하느님의 은혜를 듬뿍 받을 수 없어. 우리는 그분 은총으로 이렇게 포동포동 살이 찌고 먹음직하게 되었잖아. 우린 지금 충분히 건강해."

그렇다고 거위들은 날개를 떼어 버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도 주일 외에는 날개를 이야기를 하는 거위는 없었다. 이들은 운동을 하지 않았고, 예배 때에 잠시 하는 경건한 허리 운동과 목 운동으로 만족했다.

키에르케고르는 당시 기독교의 예배가 이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공감하지만 제겐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하는 현실이,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되지 못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날지 못하는 거위가 된 것이,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된 새 이스라엘이 모질고 완악한 자가 된 것이 너무도 가슴 아프기 때문입니다.

혹 이런 제 마음이 주님의 마음은 아닐까요?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지금 우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이 그래서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기 땅에서도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나그네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몸소 그렇게 사셨습니다. 허름한 마구간에서 태어나 평생 가난한 사람을 위해 가난하게 살다 가장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그렇게 사셨고,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의 할 일은 인생 연락을 즐기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행복한 거위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자신에게 질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지금 어떤 거위인가?

그리고 날개를 퍼덕여 하늘을 나는 거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충분히 여위어서.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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