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았능가 살았능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
대답하라는 소리
살았능가 죽었능가
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
대답하라는 소리만
살았능가 살았능가

삶은 무지근한 잠
오늘도 하늘의 시계는
흘러가지 않고 있네

- 최승자, '살았능가 살았능가', <빈배처럼 텅 비어>(문학과지성사, 11쪽)

▲ <빈 배처럼 텅 비어> /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 124쪽 / 7,000원

마치 병원이나 단칸방에 갇혀 몽롱한 정신 상태로, 시계마저 멈춰 버린 듯한 이 세상의 고독 속에 내몰린 시인의 내면 상태를 읊조린 고백입니다. 요즘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 최승자 시인의 〈빈 배처럼 텅 비어〉에 나오는 시죠. 유년시절 부모와 떨어져 충남 연기의 외갓집에서 살아야 했던 그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엔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서울로 전학을 가야 했던 그녀. 어려서부터 그녀는 고독과 부대끼며 살았던 것이죠.

중·고등학교 시절 문학소녀로 꿈을 키우던 그녀는 24살 고려대학교 화장실의 용공 사건에 휘말려 술과 수면제를 먹고서야 겨우 잠들던 쓰라린 아픔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죠. 그만큼 끝없는 감시의 그늘에 짓눌려야 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칙도 갑작스레 변경돼 제적을 당해야 했죠. 그 뒤 홍성사에 취직해 번역일로 밥벌이를 할 무렵엔 사랑하던 어머니마저 이 세상을 떠나 버렸죠. 우울증의 쓰나미가 한꺼번에 밀려 드는 그런 시절이었죠.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 '나의 생존 증명서는', <빈 배처럼 텅 비어>(50쪽)

인생의 그늘진 삶과 외로움으로 인해 '정신분열증'을 겪었다는 그녀. 그 때문에 병원에서 지낸 세월도 태반이었다고 하죠. 어쩌면 그 '고독의 병실'이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독하고 끔찍한 시들을 온몸으로 써 내려갈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죠. 그녀가 읊조리는 시어 그대로 '절대 고독'이 없었던들 결코 탄생되지 못할 '실존적인 시'입니다. 그녀에게 고독은 한마디로 시 창작의 산실이었던 것입니다.

"군인은 군인이 되었고 실업인은 실업인으로 변해 있었다. 의사는 의사가 되어 버렸고, 나와 몇 친구는 콜콜한 선생이 되어 있었다. 사람과 젊음은 다 어디로 가고 직업인과 직업인이 마주 앉아 웃고 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직업과 직업이 떠드는 것 같았다." <고독이라는 병>(홍림, 21쪽)

▲ <고독이라는 병> / 김형석 지음 / 홍림 펴냄 / 224쪽 / 1만 3,400원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고독이라는 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랜만에 중학교 동창회에 참석하여 느낀 작은 소회(素懷)라고 할 수 있겠죠.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과거의 어느 지점들을 떠올리며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실은 현재의 직업과 사회적 신분으로 서로를 가늠하는 모습뿐이었다는 것이죠. 그로 인해 고독감에 내몰린 자기 자신을 발견케 됐고요.

그래서 그랬을까요? 그 고독감, 그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길은 '자유롭고 초탈한 인간성'을 지니며 사는 것이라고 강조하죠. 직업이나 사회적인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와도 어깨동무할 수 있는 '자유혼'을 지니는 것 말이죠. 한평생 철학자요 교육자로 산 그가 영화나 음반을 즐긴 것도 그런 연유였겠죠. 그를 통해 타인과 접촉점을 찾고, 작은 나눔과 섬김도 베풀고, 궁극적으로 자기 고독감도 기꺼이 떨쳐 버릴 수 있었겠죠.

사실 이 책은 1960년에 처음 세상에 나왔는데, 반세기가 넘어 이번에 재출간된 것입니다. 이제는 96세가 된 노(老) 교수는, 이 책이 마치 시골서 살다가 도시로 올라와 낳은 '첫딸 같은 책'이라고 고백하죠. 이 책을 쓸 때만 해도 '고독은 창조의 원천'이라고 적바림했는데, 이제는 반세기가 넘었고 부인과 사별한 지도 11년째 접어드는 시점이니, 그에게 고독은 집 나간 엄마를 하루하루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생리적인 외로움을 이겨 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인간을 통하여 고독을 잊을 수 있으며 미를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미에서 고독을 해소시킬 수 있다. 그러나 실존적인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영원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영원을 얻을 수 없는 한 언제나 고독 속에 살아야 한다. 그는 이러한 고독보다도 죽음을 달라고 요청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수 없는 법이다. 영원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고독해지기는 하나 그 사랑하는 영원 때문에 죽을 수는 없다." <고독이라는 병>(223쪽)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라고 읊조렸던 그. 그런 허무주의를 지나 실존주의철학 앞에 드디어 영원한 사랑과 존재 앞에 무릎을 꿇고 만 그. 그 뒤로는 일평생 죽음 후에도 기억되고 사랑받을 영원한 가치에 자기 인생을 던지며 살아왔다는 그.

이제는 요단강을 건널 시점이지만, 그 강을 지금 당장 건넌다 해도 결코 그는 외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진정한 목표와 방향성을 제시하는 나눔과 베풂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죠. 그것 하나만으로도 영원토록 사랑받을 그이겠죠?

언제까지나 주여 나를 아주 잊으려 하시나이까
언제까지나 당신 얼굴을 감추려 하시나이까

언제까지나 나는 영혼의 쓰라림을,
마음의 근심을 나날이 되새겨야 하오리까

언제까지나 원수는 내 위에서 우쭐대오리이까
야훼 내 하나님, 굽어보시와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

행여 죽음의 잠을 잘세라 이 눈을 밝혀주소서
내 원수 이르기를 "저를 이겼노라" 할까 두렵나이다

나는 당신 자비를 굳이 믿거늘, 행여 나 쓰러지면
원수들이 날뛰며 좋아할까 저허하나이다

주님의 도우심에 이 마음 크게 기쁘오리니
갖은 은혜 베푸신 야훼께 찬미드리오리다

최민순 신부의 <시편과 아가>(가톨릭출판사)에 나와 있는 시편 13편의 시입니다. 요즘 새벽에 시편을 묵상하고 있는데 이 책에 번역된 시편을 읽을 때면 그만큼 운율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죠. 이 책에 수록된 시편들은 6개 국어로 된 번역본을 모두 살피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노랫말로 옮겨 놓고 있습니다. 그만큼 시적 운율이 풍부하고, 의미도 더 깊죠.

시편 13편은 '다윗의 시'로 표제가 나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시는 '개인적인 탄원시'(Individual Laments Psalms)1), 곧 '고난의 시'에 해당됩니다. 고통스런 상황에 직면한 다윗이 하나님께서 언제쯤이나 돌아보실지, 언제쯤이나 응답해 주실지, 간절히 탄식하며 읊조리고 있죠.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숨어 계시는 모습일 뿐이죠. 그로 인해 '죽음의 잠'과 같은 고독 속에 갇혀 버렸다며 온갖 불평을 터뜨리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탄원시'는 150편의 시편들 가운데 제1권에 가장 많습니다. 제1권이라고 말한 것은 유대인들 전통에 따라 모세오경처럼 시편을 다섯 권으로 분류하는 까닭이죠. 제1권은 1편~41편, 제2권은 43편~72편, 제3권은 73편~89편, 제4권은 90편~106편, 그리고 제5권은 107편~150편으로 말이죠. 그중 73개나 되는 다윗의 시편들 중에 46개가 '개인적인 탄원시'이고, 27개의 시편이 제1권에 속해 있죠. 한마디로 제1권은 절반 이상이 '개인적인 탄원시', 곧 '고난의 시'임을 알 수 있죠.

본래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 명칭은 '테힐림'(םילהת’, Tehillim)이죠. '찬양의 노래'란 뜻입니다. 그것이 영어 성경의 '쌈'(Psalm)으로 불린 건 70인역(LXX)의 영향 때문이죠. 70인역 번역자는 시편의 표제들 중에 57개나 나오는 '미쯔모르'(מִזְמוֹר, Mizmor, '현악기로 부른 노래들')를 그리스어 '프살모이'(ψσλμοι, Psalmoi)로 번역했고, 그것이 영어 성경의 제목이 된 것이죠.2)

더욱이 시편은 '다윗의 시' 외에 '모세의 시'(90편), '솔로몬의 시'(72편, 127편), '아삽의 시'(50편, 73-83편), '헤만의 시'(88편), '에단의 시'(89편), '고라 자손의 시'(42편, 44-49편, 84-85편, 87편)가 있죠. 그만큼 기원전 1500년경의 모세로부터 시작해 고라 자손들(민26:9-11), 기원전 1000년경의 다윗과 솔로몬, 그 뒤 성전의 레위 찬양대를 이끈 아삽과 헤만과 에단 곧 여두둔(대상 6:44, 대상 25:1), 그리고 작자 미상의 50편 중 포로기 이후를 담는 시들도 있죠. 그런 점에서 시편은 기원전 1000∼400년경까지의 역사를 아우르는 시들을 한데 묶어서 엮었다는 걸3) 알 수 있죠.

한편 시편은 '문학 유형'에 따라 '이스라엘의 역사시'(105, 106, 135, 136편), '시온시'(46, 48, 76, 87, 122편), '제왕시'(2, 18, 20, 45, 72, 89, 101, 110편), '지혜시'(시37, 49, 73, 112, 119, 127, 128, 133편), '감사시'(34, 67, 92, 107, 118, 124, 138편), '성전 제사시'(68, 82, 115, 120-134편), '신뢰시'(시11, 23, 27, 62, 63, 91, 121, 131편), '비탄시'(시3, 12, 22, 31, 39, 57, 80, 85, 88, 90, 94, 137편), 그리고 '심판시'(시35; 58; 69; 83; 109; 137편)4)로 분류하죠.

시편은 분명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그래서 각권 끝부분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제1권 41:13, 제2권 72:18-19, 제3권 89:52, 제4권 89:48, 제5권 150:6)으로 끝맺고 있죠(왕대일, <시편 사색, 시편 한 권으로 읽기>, 대한기독교서회, 64쪽). 특별히 '성전 제사시'의 경우엔 악기들까지 동원해 찬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테힐림인 동시에 '테필라'(תְּפִלָּה, Tefilah)입니다. 이른바 '기도시'란 뜻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실은 곡조 있는 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죠. 더욱이 다윗이 쓴 시들 중 47개 시편이 '개인적인 탄원시'로서 하나님께 '간청 어린 기도'를 읊조리고 있는 셈이죠. 그중 절반가량이 제1권에 담겨 있다고 하니, 다윗의 간절함이 눈에 선하게 다가옵니다.

최민순 신부는 앞선 책에서 "시편의 기도는 아나빔(없는 이들)이 야훼님(있으신 분)을 노래한 것"이라고 칭한 바 있죠. 다윗도 실은 '없는 이'의 삶을 살았죠. 배다른 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양치기로 내몰린 것도, 물맷돌로 6척 장신 골리앗을 쓰러뜨린 이후 사울의 칼날을 피해 8년간 은둔자5)로 산 것도, 의지할 거라곤 남편밖에 없는 밧세바를 범한 후 쑥대밭이 되는 자기 집안 사정도, 압살롬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도망쳐야 했던 모습도, 실은 그렇죠.

"피 흘리기 좋아하는 자여, 꼴 보기가 좋구나. 천하고 너절너절한 자여, 어서 가라. 어서 가거라. 네가 간다고 얼마쯤이나 피할 수 있겠더냐?" (삼하 16:7, 사역)

다윗이 그 피난길에 들었던 목소리죠. 사울 집안 시므이라는 자가 저 멀리 언덕에서 다윗을 향해 조롱하고 저주하는 소리였죠. 그때 아비새 장군이 시므이의 머리를 베고자 했지만 다윗은 그것조차 말렸죠. 그가 저주하는 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일지 모르고, 그의 저주를 하나님께서 선으로 갚아 주실지 모른다면서 말이죠. 어쩌면 그것조차 다윗의 '개인적인 탄식의 기도'였지 않나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편 13편의 기도가 그런 비탄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그 말미에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기도로 끝마치고 있습니다. 그만큼 '없는 이'의 기도, 곧 '심령이 가난한 자'(마5:2)의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외면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인생의 처참한 고독 속에 내몰려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눈뜨는 게 중요하죠. 그러면 어떤 고독 속에서도 영원한 자족의 삶을 누릴 수 있을 테니 말이죠.

정리하자면 그것입니다. 최승자 시인의 〈빈 배처럼 텅 비어〉에서 고독이 창작의 산실만 된다면 인생의 목표점을 갖게 하는 '좋은 동반자'이고, 김형석 교수의 〈고독이라는 병〉에서 고독이 세상의 나눔을 위해 스스로 자취한 거라면 '영원히 사랑받을 기념비'이고, 그리고 '시편 13편'은 인생의 벌거벗은 고독의 환경 속에서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뜬다면 자족하는 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고독해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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