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피켓 시위 중인 신요섭 씨. ⓒ뉴스앤조이 구권효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1인 시위를 하다 보면 많은 눈빛과 만난다. 피켓에 있는 세월호 참사 미수습자의 얼굴들을 지긋이 쳐다보는 사람도 있고, 피켓과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흘끗흘끗 보는 사람도 있다.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피켓을 보는 사람들은 한 번 더 '세월호'를 떠올리게 된다.

청운동과 효자동이 만나는 길, 오전 11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서너 명이 매일 피케팅을 한다. 지난해 미수습자 다윤이 부모님과 은화 부모님이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했던 피켓 시위를 이어 가는 것이다. 1년 12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피케팅을 해 왔다.

신요섭 씨(37)는 작년 5월 말부터 지금까지 이 자리에서 피케팅을 하고 있다. 올해 들어 회사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어 일주일에 두세 번 나오게 됐지만, 작년까지는 네다섯 번씩 나왔다. 청운동 피케팅이 끝나면 홍대로 넘어가 피케팅을 하든지 아니면 광화문광장으로 가서 서명대 봉사를 한다. 오후 늦게 회사로 들어가 밤까지 일을 한다. 친구들과 사업을 해 시간을 유동적으로 쓸 수 있지만, 일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다.

▲ 무엇이 그를 여기까지 오게 했을까. ⓒ뉴스앤조이 구권효

7월 28일, 청운동에서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신요섭 씨를 만났다. 마침 이날은 세월호 선수 들기를 재개한 날이었다. 그는 다윤이 부모님, 은화 부모님과 일주일에 서너 번은 통화한다. 팽목항에도 자주 간다. 그러다 보니 인양 관련해서는 전문가가 다 됐다. 선수 들기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그는 말했다.

"지금 1.5도 들어 올렸대요. 앞으로 10m까지 더 들어야 해요. 그다음 리프팅 빔 18개를 한꺼번에 집어넣는 거예요. 선수 들기가 성공하면 인양이 상당 부분 진척됐다고 봐요.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빠르면 이틀 안에 할 수도 있어요. 이번에는 꼭 성공해야죠."

'이게 내가 아는 대한민국 맞나'

지금은 피케팅하면서 경찰과 실랑이하는 게 익숙해졌지만 신요섭 씨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전까지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관심은 있었지만 뉴스만 보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세월호 참사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게 됐을까.

"제가 당시 경산에 살았는데요. 참사 다음 날 친구들과 팽목항에 내려갔어요. 마침 친구들과 같이 있었는데,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예요. 지금도 그때 왜 팽목에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냥'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어요. 다만 '이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조선 강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 저게 사실일까', '설마 사람들을 저대로 두진 않겠지' 그러면서 내려갔죠."

▲ 신요섭 씨는 자주 팽목항에 간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충동적으로 내려간 팽목항에서 그는 보름 넘게 있었다. 잠잘 곳도 마땅치 않아 차에서 잤다. '내일은 올라가야지' 했지만 막상 떠나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팽목항에서 목격하게 된 일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뭔가 계속 이상했어요. 조명탄을 쏘고 전력 구조하고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고. 부모님들이 분노하면서 청와대 가자고 했을 때도 결국 경찰 벽에 가로막혔잖아요. 곳곳에 유가족인 척하는 사복경찰도 많았고요. 몇몇 기자는 시신 눕혀 놓는 천막을 들고 들어와서 사진을 찍었어요. '이게 내가 알고 있던 대한민국이 맞나' 싶었죠.

한 부부가 며칠 동안 붙박이처럼 바다를 바라보면서 쪼그려 앉아 있는 거예요. 비가 올 때도 다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어요. 제가 사업을 해서 모르는 사람에게도 말 잘 걸고 빨리 친해지거든요. 근데 그분들한테는 한마디도 못하겠더라고요. 그 무게가 어떨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되니까요. 그분들 뒷모습이 계속 잔상으로 남았어요."

그 기억 때문에 춘천에 돌아와서도 세월호 관련 집회가 있을 때면 서울로, 안산으로 향했다. 한번은 뭐라도 도우러 광화문광장에 갔다. 서명대에 봉사자가 몇 명 있었는데 모두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었다. 그날 하루 저녁 약속 전까지만 하려고 했는데, "언제 또 올 수 있느냐"는 봉사자들의 말에 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후 정기적으로 서명대 봉사를 하게 됐다.

▲ 피켓 넣은 가방을 양쪽에 들고 가는 모습이 능숙해 보였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특별히 미수습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참사 1주기가 다가올 때였다. 2015년 3월 30일, 세월호 가족들은 416시간 농성에 돌입했다. 집회에 참여한 신요섭 씨는 얼결에 세월호 가족들이 발언할 때 뒤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역할을 했다.

"제가 든 게 조은화 학생 얼굴이 있는 피켓이었어요. 사실 슬프기는 하지만 아이들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잖아요. 마주친 적도 없고. 근데 그날 은화 어머님이 발언하실 때 뒤에서 엉엉 울었어요. 원래 남들 앞에서 잘 안 우는 성격인데…."

미수습자 가족들이 청운동에서 피케팅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5월 말, '한번 가 볼까' 하고 찾아간 게 시작이었다. 피케팅을 하고 있던 미수습자 가족들과 유가족들이 너무 반겨 주었다. 이후 미수습자 가족들이 팽목항으로 가고 피케팅을 할 수 없게 돼도 신요섭 씨는 일주일에 네다섯 번을 나와 피케팅을 했다.

"피켓 들고 있으면 오만 가지 생각이 들어요. 심적으로 힘든 날에는 '이거 한다고 뭐가 될까'라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에요. 청운동은 오가는 사람이 많지는 않거든요. 근데 차는 많이 지나다녀요. 저희도 일부러 건널목 앞에 서 있어요. 차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보이게요. 경멸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있지만, 천천히 다가와서 창문을 열고 응원해 주는 사람도 있어요.

때로는 '아직 못 나온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어요. 정말 몰라서 묻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설명을 해 주면 눈물이 그렁그렁해요. 우리 주변에는 우리 같은 사람만 있어서 다 세월호에 대해 알고 있겠지만, 실제로는 관심도 없고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 같더라고요."

역사에 부끄럽지 않게, 양심이 시키는 대로

일주일에 4~5일 피케팅하러 나가 있으니 아무리 밤늦게까지 일을 한다더라도 생업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동업하는 친구들과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올해부터는 일주일에 두세 번, 회사에 일이 많을 때는 아예 일주일간 못 나간 적도 있었다. 그래도 피케팅하는 사람 중 신요섭 씨만큼 꾸준한 사람은 없다.

세월호로 삶의 패턴이 맞춰지면서 자연스럽게 친구 관계도 소원해졌다. 참사 전에는 친구와 어울리는 게 삶의 낙이었는데, 이제는 세월호에 대한 입장이 다른 친구들을 만나면 불편하다. 실제로 세월호에 대해 잘못된 정보로 나쁘게 말하는 한 친구와 크게 다툰 적도 있다. 현장에서 만나는 세월호 가족들이나 봉사자들과 어울리는 게 오히려 편하다.

▲ 피케팅이 끝나고 광화문으로 왔다. 땡볕 아래 단식 중인 특조위 이석태 위원장에게 얼음물을 건네는 모습. ⓒ뉴스앤조이 구권효

신요섭 씨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부모님이 열성 신자인 모태신앙이다. 보수적인 교회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님을 따라 착실하게 교회를 다니다가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교회가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사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은데 교회만 가면 착한 척, 거룩한 척하는 사람들이 싫어졌다. 세월호와 관련해서는 다른 종교보다 개신교가 참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교회 목사들이 세월호 참사를 두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잖아요. 현장에 나와서 뭘 좀 보고 말을 해야죠. 사실 자기들도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그런 모습이 싫어요.

기독교인들도 그래요. 이상한 문자메시지가 오면 최소한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고 하는 노력은 있어야죠. 그걸 그대로 퍼 나르는 건 세월호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일이에요. 반대로 꼭 현장에 나오지 않아도 올바른 정보를 찾아보고, 왜곡된 메시지 대신 그걸 보내 주는 것만 해도 큰일이 될 수 있어요.

다 그런 건 아니더라고요. 현장에서 알게 된 장신대 친구들 보면서 생각을 좀 달리 했어요. 저는 성경을 잘 모르지만 예수님이 그 시대의 가장 낮은 자들, 세리나 창녀와 함께하셨다는 건 알아요.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가장 낮은 사람들과 함께해야죠."

▲ 7월 29일, 세월호 선수 들기는 성공했다.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8~9월 안으로 선체 인양을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수습자를 찾는 건 그 이후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그냥' 팽목항에 갔다가 대한민국의 실체를 목격했고, 한 번만 하려고 갔다가 광화문과 청운동에 지금까지 나가고 있다. 그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자기 자신과의 약속, 그게 중요한 거 같아요. 저도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 냄비 근성이라고 하잖아요. 맘 같아서는 다른 사람들도 다 마음이나 의지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다른 사람보다 나 하나 변하지 말자, 그런 생각을 해요.

제가 대구 지하철 참사 때 대구에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금방 잊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워요. 나중에 나이 먹고 젊은 사람들이 '당신은 그때 뭐했느냐'고 하면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역사에 부끄럽지 않고 싶어요. 그러려면 양심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시작할 때도 그랬지만 계획은 없어요. 작년에 다윤이 부모님 은화 부모님과 피켓 만들면서 작년 안에 인양될 줄 알고 '올해까지만 하면 되겠지' 했는데, 이때까지 그 피켓을 들고 있어요. 인양이 되고 미수습자 찾으면 다음에는 진상 규명 피켓을 들어야죠. 빨리 끝날 일은 아니잖아요. 바람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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