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정말 교회를 떠나야 할 때"(원제목은 '보고 싶은 교회')라는 제 글에서 이 시대 가나안 성도들의 출현이 영적인 흐름일 수 있지만 가나안 성도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더 어렵고 중요하다는 내용을 보고 포이멘이라는 분이 이런 댓글을 다셨습니다.

교회를 떠나서 가나안 공동체를…
교회 떠난 사람들 모여라.
이 글에 댓글이 많으면 성도들이 모이는 가나안 공동체 만듭시다.

자신이 가나안 성도이며 제 글에 내용에 공감한다는 의미로 단 댓글임에 틀림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일이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님을 알리고픈 마음에 다시 글을 써봅니다.

제가 글에서 언급한 예수 공동체, 성령 공동체, 하나님나라 공동체는 기존의 교회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내용들입니다. 언급을 하는 경우도 그 정확한 의미가 전달되는 경우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말로 표현하였지만 같은 말인 이런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권력이 된 교회를 떠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훨씬 더 어려운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권위주의적인 목사를 제거하고, 헌금을 바로 사용하고, 평신도 중심의 교회를 세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더 깊고 총체적인 변화를 개인과 공동체에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공동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복음의 알짬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변화된 사고를 가진 분들이 모여 성령에 이끌리는 공동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저는 십여 년 전부터 하나님나라 중심의 복음 이해와 설교를 해 왔지만 그것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간혹 관심을 보이는 분들이 있었지만 항상 그것이 현실에서 가능하겠느냐는 의심이 언제나 그분들의 결론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달려가자는 속시원한 반응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또 그런 결단을 내리더라도 실제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간적인 좌절과 오래고 혹독한 훈련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렇게 깨지고 훈련된 사람들을 '반석'으로 삼아 당신의 몸인 교회를 세우시기 때문에 말씀하신 가나안 공동체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나라를 짧은 글 하나를 통해 설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가나안 성도님들이 하나님나라로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은 마음에 오래전에 제가 전했던 설교문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강아지 똥과 겨자풀 나라 (요 13:3-15) 2013년 1월 6일

"당혹스러운 예수님의 말씀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비유는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당혹스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알고 이해하고 있는 것같이 지나치는 말씀들 가운데는 우리를 오싹하게 만드는 말씀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말씀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우리는 그동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얘기를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전해 왔고 우리 자신도 예수 믿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는 말씀은 우리 또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당황하게 되는 것은 심판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심판의 내용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믿음의 내용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중도에 믿음을 버린 배교자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선포를 하셨다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선포를 하신 대상들이 놀랍게도 "주여 주여 하는 자", 다시 말해 틀림없이 믿는 정도가 아니라 열정적으로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해 그와 같은 선포를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하는 바를 음미해 보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주여 주여 하는", 다시 말해 단순히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부르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혹스러운 것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항변을 들어보면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추호도 의심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는 반문에는 자신들이 틀림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믿고 있지만 주님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주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그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비단 이러한 일들은 이 말씀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예수님의 말씀과 비유들에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치 수수께끼 같은 그 차이를 발견하거나 깨달아 아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러나 모든 깨달음이 그러하듯이 깨달음이란 깨달아 알 때까지는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또 깨달은 자라도 깨닫지 못했거나 깨달음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전하거나 일깨워 주기가 불가능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깨달음을 사모하는 자에게만 그것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엇보다 먼저 자신에게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강아지 똥'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여러분들에게 동화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권정생 선생이 쓴 '강아지 똥'이라는 제목의 동화입니다. 이 동화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돌이네 흰둥이가 골목길 담 밑에 똥을 눴습니다.

그래서 강아지 똥이 태어났습니다.

강아지 똥은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참새가 쪼아 보고는 더럽다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소달구지 바큇자국에서 뒹굴던 흙덩이도 "넌 똥 중에서도 제일 더러운 개똥이야!"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외톨이가 된 강아지 똥은 스스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난 더러운 똥인데,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짝에도 쓸 수 없을 텐데
"

봄비가 내리던 날, 파란 민들레 싹이 돋아났습니다.

민들레가 예쁜 꽃을 피울 거라는 말을 듣고 강아지 똥은 부러워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강아지 똥은, 민들레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거름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강아지 똥이 민들레의 거름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들레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네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 속으로 들어와야 해. 그래야만 별처럼 고운 꽃이 핀단다."

민들레가 도움을 요청하자 강아지 똥은 너무 기뻐서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아 버렸습니다. 

사흘 동안 내리는 비를 맞으며 강아지 똥은 자디잘게 부서져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 민들레 뿌리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줄기를 타고 올라가 꽃봉오리를 맺었습니다.

이 동화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습니다.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어요.
향긋한 꽃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어요.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 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 어려 있었어요."

권정생 선생은 처마 밑에 버려진 강아지 똥이 비를 맞아 흐물흐물 녹아 내리며 땅 속으로 스며드는 그 옆에 민들레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 동화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가 자신의 몸을 녹여 생명을 꽃피운다는 사실에 감동했습니다.  

강아지똥은 실제로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꽃을 피울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민들레꽃은 강아지 똥의 희생으로 피어납니다. 아름다운 꽃은 냄새나고 더러운 똥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작가인 권정생 선생은 민들레꽃에서 강아지 똥의 희생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를 보았습니다. 민들레꽃은 강아지 똥의 희생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강아지 똥의 희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민들레꽃은 배은망덕한 것입니다. 또 강아지 똥의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오만한 일입니다.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그러나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바쳐진 희생은 숭고한 것입니다. 꽃이 꽃으로 피어나는 아름다움은 강요되지 않은 희생에 의한 것입니다. 꽃이 그 사실을 기억한다면 꽃 자신도 다른 꽃을 피우기 위해 강아지 똥과 같이 희생할 준비를 해야 하고 그렇게 할 때 꽃은 더 아름다운 꽃이 됩니다. 어차피 시들어야 할 운명의 꽃이라면 그렇게 아름답게 희생할 수 있을 때 더욱 찬란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권정생 선생의 삶이 투사되어 있는 동화 '강아지 똥'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나라가 오롯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동화의 주인공은 흔히 왕자나 공주입니다. 그런데 그런 존귀한 신분과는 거리가 먼 '강아지 똥'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강아지 똥처럼 사셨습니다. 그리고 강아지 똥 취급을 받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시며 또한 섬기셨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낮아진 사람들이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며 섬길 때 세상이 이제까지 보지 못하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하나님나라가 그들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활짝 피어난 민들레꽃처럼 그렇게, 소박하지만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진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고 꿈꾸셨던 하나님나라는 죽음 이후의 맛볼 '지복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경험하는 또는 경험해야 할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삶의 충만함으로 구현됩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는 삶을 짓누르는 일체의 억압에 대한 저항입니다. 죄와 가난, 억압과 착취, 질병과 소외 등등 예수님은 실낙원 이후 시대를 특징짓는 이런 요소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비유를 통해 그것이 극복된 세상을 권정생 선생의 동화 '강아지 똥'처럼 그림 언어로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강아지 똥이 보여준 것과 같은 자발적인 희생, 곧 섬김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 

본문이 증언하고 있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결코 위대한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슈퍼맨의 모습도 아니고 슈퍼스타의 모습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제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두른 그분에게는 최소한의 권위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당신의 전능함과 권위를 완전히 벗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여러 번 말씀드렸던 것처럼 당시 유대 사회의 관습상 발을 씻어주는 일은 가장 천한 일이었고 종들 가운데서도 가장 천한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발을 씻는 종은 이방인 종들이었고 유대인 종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유대 사회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 종들도 하지 않는 일인데 어떻게 유대인의 스승이신 그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메시아이신 그분이 인간의 발을 씻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당시 유대 사회에서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인 랍비들을 인격적으로 섬기는 행위를 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다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당시 사회의 관습을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방법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러한 파격적인 행동은 관습적인 인식의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인 것이었는지, 이 사건에 대해 제자들이 얼마나 당혹감에 사로잡혔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를 음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나가시다가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역시 베드로답게 그는 가만히 있지를 못했습니다.

베드로: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6)
예수님: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7)
베드로: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8)

베드로의 태도는 겸손한 사양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예수님에게 항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32절에서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비슷한 항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고 예고하시는 말씀을 듣고 항의를 했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에 메시야는 고난받고 처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지배자들 위에 군림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야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베드로의 생각에 스승이신 예수님은 섬김을 받아야 하지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왕위에 오르시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권위와 영광을 얻는 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수치와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섬김을 받으셔야지 다른 이들을 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주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예수님께 대한 존경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함께 누리게 될 어떤 특권을 얻게 되리라는 기대가 숨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수치와 고난이라는 것을,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8:33)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발씻기를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께 충성하고 헌신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다시 한 번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런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위는 당시 사회 관습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몇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단호한 그분의 표정을 보고 자신의 발을 씻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예수님을 만류하였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보다 더 단호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는 최후통첩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은 인류를 위한 희생적인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완성해 가야 할 하나님나라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배하고 섬김을 받는 세상의 왕의 길을 포기하고 오히려 수치와 고난을 받는 약자의 모습으로 인류를 섬기시는 하나님나라의 왕, 즉 메시야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사단적인 교만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거부하는 베드로의 태도는 겉보기에는 겸손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남을 지배하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완악함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발을 씻기는 관계를 맺지 않고는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엄중하고 단호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씻김을 받았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요청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로써 세상의 위계질서와 도덕적 가치가 설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상식과 관습이 설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지니고 있던 기대와 환상도 여지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일상의 삶 한 복판에서 철저하게 새로운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를 관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폭력 없는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12)고 물으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행동이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던 제자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시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음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요구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4-15)

제자들은 주님의 행동을 통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그 행동은 제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섬김을 받음으로써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존재, 즉 남을 섬기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섬기는 일을 실천하는 자만이 주님에 의해 제대로 깨끗하게 씻긴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제자들은 새로운 해방을 경험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제자들을 지배욕과 권력욕, 권위주의적인 태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인류를 궁극적으로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당신의 권위와 생명을 버리심으로써 제자들과 우리 모두와 온 인류에게 참된 삶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희생으로 피어난 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꽃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이나 영광에 도취된 꽃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권정생 선생의 동화에 나오는, 강아지 똥의 도움으로 피어난 민들레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민들레꽃 역시 스스로를 비우고 낮아져 섬김으로써 또 다른 꽃을 피워내는 강아지 똥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섬김과 차이가 있습니다. 아주 미묘한 차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묘한 차이가 아니라 전혀 반대인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항상 가장 앞에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든 것이 수포가 될 뻔 했습니다. 다행히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비록 반면교사이지만 오늘날 지배욕과 권력욕을 가지고 권위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의아해 하던 사람들의 잘못된 점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나라와 하나님나라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주님을 따랐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겨자풀의 나라"

그래서 주님은 많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나라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겨자풀의 비유입니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적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갈릴리 지역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낮은 지역을 다니다보면 많은 노란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겨자꽃입니다. 특히 갈릴리 지역에서의 겨자는 온 산지와 평지 등 도처에 흩어져 피어나는 다년생 풀이며 지천으로 널려 있는 흔하디흔한 들풀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겨자를 얻기 위해서 자기 밭을 갈거나 씨를 파종하거나 재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겨자를 얻고 싶다면 그저 밖에 나가서 훑어 따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만큼 재배하지 않고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겨자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의 밭을 깨끗이 간 후에 겨자씨 한 알을 가져다 심는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바보라도 그렇게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처에 널려 있어 원하는 만큼 수확할 수가 있는데 자신의 밭을 갈아 깨끗하게 한 후 그것도 한 알을 심는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바보 같은 행동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이해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그 밭에 심겨진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개념으로는 땅에서 나와 줄기가 있고 거기서부터 가지가 나와 있는 것은 모두 나무(엣츠)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어 들깨와 같은 경우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는 겨자가 풀임에도 불구하고 나무라고 쓰여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하나님나라는 백향목의 나라가 아니라 겨자풀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겨자씨는 '작은 것', '하찮은 것', '변변치 못한 것'과 동의어였습니다. 게다가 겨자풀은 번식력이 좋아 급속히 퍼질 뿐만 아니라 토양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농부들의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가 겨자풀과 같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나라는 대개 백향목으로 형상화되곤 했습니다. 백향목은 기품 있고 아름답고 귀했습니다. 성전이나 제단 혹은 궁전을 짓는 데만 사용하던 최고급 나무였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마땅히 그런 나무와 같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백향목이 아니라 겨자풀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백향목과 같이 우뚝한 사람들과 나라의 폭력성을 보셨던 것입니다. 로마야말로 백향목과 같은 나라였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변 세계를 복속시키고, 화려한 문화로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나라, 하지만 그 이면은 참혹 그 자체라는 것을 보셨습니다.

피식민지 백성들의 삶은 가혹한 수탈로 인해 거덜이 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했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는 지배계급에 속한 특권층에게만 천국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런 로마제국 아래서 예수님은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통해 임하는 하나님나라를 그리고 계신 것입니다. 강아지 똥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지는 곳, 그런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기꺼이 자기를 바쳐 희생하고 섬길 때 생명의 역사가 꽃으로 피어나고 열매를 맺어 풍성한 샬롬의 나라를 이루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백향목과 같이 빼어난 사람들이 이루어 내는 나라가 아니라 겨자풀 같이 평범하다 못해 천대 받는 사람들이 이루어 내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among you) 있느니라"(눅17:20-21)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맺는 관계를 통해 우리 가운데 임합니다. 위대한 인물이 되려는 사람,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존재가 되고 싶은 사람, 많은 돈을 벌고, 많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친밀한 관계, 서로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관계만을 맺을 수 있을 뿐입니다. 오직 겨자씨와 같은 사람들, 강아지 똥 같은 그런 사람들만이 영구적인 관계를 맺고 자기를 희생하여 섬김으로써 생명의 꽃을 피워내고 풍성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또 다른 하나님나라의 역설인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설교 내용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짧지 않은 설교이지만 하나님나라를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도 어떤 최소한의 준거점 정도는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확실한 것은 이 설교에서 소개하는 하나님나라가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다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반대로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거의 모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혹은 구약의 하나님나라와 같이 백향목과 같은 하나님나라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큰 교회, 가장 힘센 교회, 가장 일 많이 하는 교회,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 추호도 틀림없이 하나님나라의 일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나라는 그 정반대인 나라입니다. 설교의 제목처럼 강아지 똥과 겨자풀의 나라이며 그 나라의 백성은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하나님나라는 작은 자들의 나라임을 강조하고,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나라라는 말을 하지만 결과는 늘 조롱과 빈정거림이었습니다.

욕망을 거슬러 상향의 길이 아니라 하향의 길을 선택하려는 이들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나라 백성들 앞에는, '자아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절망의 자리를 지나야 하고 '십자가'라는 혼자서는 지기조차 어려운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마 27:32 참조) 엄중한 선택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공동체는 단순히 권력이 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는 베드로를 사단이라 칭하시며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고, 그 기준은 오늘날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돈의 위력이 강해진 오늘날 그 선택은 오히려 돈의 힘이 강해진 만큼 더 강화되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자본만능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제자의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불가능으로 여겨질 정도로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일은 단순히 사람의 결단만으로는 이루어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삭개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눅 18:27). 그러므로 이제 가나안 공동체를 이루려는 가나안 성도님들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가나안 성도님들로 이루어진 가나안 공동체를 꼭 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세상에서 천대받는 무리들이 사람대접을 분에 넘치게 받아 누리는 모습을 정말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포이멘님 화이팅!

가나안 성도님들 화이팅!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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