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 보면 별의별 인간을 만난다. 인격이 구비되지 못하면 엉망진창인 인생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려면 땅의 사람이 하늘로부터 새로워져야 한다.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이 되고, 땅의 사람이 하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성 주도적인 사람은 성령 주도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주도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산다는 것이고, 성령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이며, 점진적 성화를 이루면서 산다는 것이다.

성령 주도적인 삶을 살려면 매일매일 순간순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것이 쉐마(שמע, 들으라) 교육이다.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순종으로 실천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쉐키나(שכינה, 하나님의 임재) 신앙이 있어야 한다. 나와 하나님이 동떨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내가 일체의 관계로 '임마누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쉐키나' 하신 하나님 주도로 사는 삶이 성령 주도적인 삶이다. 하나님은 범죄하고 타락하여 자꾸만 세속주의로 흐르는 이스라엘을 살피시고 인도하시기 위해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고, 거기 거하겠다고 하셨다. 이것을 '쉐키나'라 한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갈 바를 알지 못해 우왕좌왕할 때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 '쉐키나'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시고 그 가운데 '쉐키나'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후에는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곧 '쉐키나'의 하나님이 되셨다.

쉐키나 신앙 대신 '땅의 것' 자랑하는 목사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성령 주도적 삶이 아니라 세속적 삶을 산다. 세속적 자존심은 지나친 자기 집단 자랑과 이기주의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우리 교단은 장자 교단이다", "우리 교회는 판검사가 200명이다", "우리 노회는 역대 총회장이 둘이나 나온 노회이다" 등이다. 이런 주장을 한다면 아직도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부흥사라는 이들 중 강단에서는 좋은 말만 골라 가며 하고, 성경 구절을 달달달 암송하여 전하다가 자기들끼리 모여서 음담패설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비단 부흥사 문제만이 아니다. 각 교단 총회장 출신들의 간통, 횡령 문제, 목회자 선교사들의 추문이 갈수록 성행하고 있다.

소위 기득권 목사들은 노회 안에서 원로목사와 은퇴목사를 가르고, 위임목사와 임시목사(시무목사)를 가른다. 교회 세습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의 세속적 사고는 세속 사회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총회나 노회는 스스로를 바리새인 집단 같이 만든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외에 많은 규칙 조항을 만들어 활동을 제약하고 봉쇄했다. 그렇게 해야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보통 사람들을 율법의 올가미로 걸려는 심보가 저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노회 규칙 조항이 늘어나는 것은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더 우세하다. 약한 자를 묶는 밧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성령 주도적이 아니라 이성 주도적인 발상에서 나왔다. 이런 모습을 보면 무엇을 믿고 교회당에 가야 하나 하는 근심 어린 질문이 나온다. 더구나 이들에게 회개가 없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영광스런 인생길이 아니라 욕스런 인생길을 주저 없이 달려가서는 안 될 일이다. 

개혁주의의 모토 '코람데오(Coram Deo)' 신앙 사상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면전에서 하는 것처럼 하라는 가르침이다. 코람데오는 거듭남과 점진적 성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쉐마 신앙과, 하나님의 임재를 몸소 체험하는 쉐키나 신앙이 있다. 신앙적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의 삶에서 나타내 보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신령한 메시지를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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