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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의 교회
공교회적 비차별성 잃어버린 한국교회
  • 주원규 (bay3135@empal.com)
  • 승인 2016.07.23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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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는 계승되었는가

초대교회의 모습에는 하나의 일관된 특성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절대에 가까운 관심이 그 특성의 근간을 이룬다.

당시 초대교회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취급받을 위험성이 다분했다. 교세도, 세력도 미미한 예수를 메시아로 섬기는 초대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론이 있었을 것이다. 종교와 집단의 생리를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체득하는 인간은 사람을 모으고 이를 조직화해서 권력화하려는 욕구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그런 손쉬운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을 설명하는 정체성의 전위에 내세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진 집단의식에 대한 환멸, 조직화를 향한 역겨움의 토로를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초대교회가 자연스럽게 추구한 또 한 가지 주요한 특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포개어진다. 바로 공교회적 비차별성이다.

흔히 가톨릭교회를 생각하면 오늘의 비대화된 종교 체제로서의 가톨릭교회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본령적 가톨릭교회, 곧 공교회의 출발은 사도행전에서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사도행전 13장 1절에 등장한 이른바 안디옥 교회의 구성원을 보면 그 구성원의 면면이 조직화의 생리와 얼마나 큰 편차를 갖는지 알 수 있다 바나바, 니게르라 부르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그리고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사울까지. 이들이 가진 사회적 위치나 문화, 사상과 신념이 얼마나 큰 스펙트럼을 갖고 전개되었을지는 불을 보듯 훤한 것이다.

이렇듯 가톨릭교회, 곧 공교회는 신분, 인종, 나이, 빈부 격차로 인해 교회 구성원 사이의 차별을 의도하지 않는 특성으로 일관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생활 방식의 특징인 유무상통의 원리적 실천을 살펴보더라도 교회가 공교회적 비차별성의 논지를 얼마나 철저하게 유지하려 했는지 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러한 초대교회의 주요 특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복음으로부터 파생된 주요한 교회 존립의 한 기능인 공교회적 비차별성이 온전히 계승되어 왔는지 말이다. 이에 대한 답은 두 개의 다른 국면에서 도출해낼 수 있다.

3세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이후의 교회사적 측면과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에서의 답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국면을 성찰함에 있어 놀랍도록 일치하는 공통분모가 발견된다. 바로 계급의 교회가 망령처럼 따라붙는다는 사실이다.

교회사적 비극으로서의 계급

조심스런 진단일지 모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시작부터 비종교적인지도 모른다.

복음은 예수의 언행에 집중한다. 그러한 예수의 언행이 얼마나 당대의 종교, 정치, 문화와 불화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예수는 힘으로 몰아붙이는 로마의 권력에도 저항했으며, 헤롯당원의 피식민지적 비굴함과도 맞섰으며, 유대교적 문화적 토양이 된 율법주의와도 대립각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니 예수의 언행을 일종의 종교적 경구 또는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게 얼마나  어색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국교의 태동, 조직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한계와 위험천만한 동거를 계속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중세 암흑시대, 십자군 전쟁을 통해 나타난 종교적 광기, 마녀사냥과 면죄부로 대표되는 조직화된 종교의 야만적 미신에 근거한 이상주의까지. 종교 체제의 옷을 입은 교회와 교회사는 문명사적 발달과 궤를 같이하는 계승의 차원에서는 긍정적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진 불화의 정신을 직, 간접적으로 학살함으로써 초대교회 정신의 심각한 훼손을 초래했다.

불화의 정신이 작동 오류에 빠지면서 동시에 부각되는 것은 초대교회의 주요 특성 중 또 다른 한 축인 공교회적 비차별성을 계급화의 의식으로 대치해 버리는 오류의 지속화다. 이른바 비차별성을 그 뿌리에서부터 잘라 내는 계급의 교회가 교회사를 주도한 것이다.

계급의 특성이 교회 안에 스며들 수 있는 치명적인 기류는 복음의 사유화다. 이를 성경적으로 우아하게 표현해 제사장과 일반 성도와의 차이, 선지자와 세속적 인간의 차이로 언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표현은 궁색한 변명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진 불화의 정신, 그 핵심엔 제사장 권력, 왕권 권력, 스승과 제자 사이의 권력 등. 모든 권력 구조가 낳은 계급성의 해체와 비차별의 지평이 초대교회의 유일한 자산이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계급이 교회사의 중심을 종교의 이름으로 독점하면서 때론 사제의 이름으로, 때론 신의 대리인인 왕의 이름으로 계급화의 지속을 정당화했다. 그러한 계급화의 지속 속에서 계급은 우아한 전통이 되고 그 전통이 종교적 뿌리의 근간을 포박하는 존재의 마조히스트적 순응 기제를 정당하고 숭고한 신앙 정신으로 포장하기에 급급했다.

이렇듯 교회사는 안타깝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능력이 가진 자생적 신비에 의해 성장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종교의 생래적 불순물 중 하나인 계급화에 의해 그 중심 사상이 심각히 훼손되어 온 부침을 반복해 온 것이다.

이러한 교회사의 흐름이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개신교의 세력화를 일궈 온 한국교회에 그대로 수혈되었다. 그리고 그 전이의 심각한 징후 역시 계급의 교회로서의 한 특성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한국교회 안의 숨은 기질, 계급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 스며든 계급의 징후는 제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 해도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는 악의의 기질로 가득 차 있다. 20세기 초반, 역동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한국 사회는 그렇게 수용한 교회의 기질 속에 생래적으로 개입된 계급의 속성을 악진화의 질료로 활용하는 데 익숙했다.

그 익숙함이 오늘날 성장 일변도의 교회 움직임이 주춤하고 매체를 각종 사건 사고로 도배하는 데 앞장서는 트러블 메이커로 기능하게 했는데 이제는 아예 만성적 기질이 되어 버렸다.  

여기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교회사적 비극으로서의 계급을 한국교회가 어떻게 수용하고 악진화시켰는지 말이다. 비극의 계급성으로서 한국교회는 두 가지 악진화의 기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국교회 계급화의 첨병에 선 것은 유교적 가부장제다. 유교에 대한 사상적 비판이나 그 폐단에 대한 지적은 차치하고서라도 한국교회가 받아들인 유교적 가부장제는 심각한 수준의 신분제 의식, 그 악의적 변종으로 자리매김했다. 목회자와 성도 간 수직적 위계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내 재정, 행정 관리의 도가 넘는 주먹구구식 운용과 불투명성은 이제는 수습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가부장제의 패악질은 남녀의 성차별을 넘어서 신지와 불신자의 구분, 믿음 좋은 가문과 믿음 부족한 가문의 구분을 세속적 성공과 실패의 기준으로 견고히 했다. 이렇듯 무자비한 무지로 도배된 가부장제는 성서의 몇몇 구절들에 대한 앞뒤 고려 없는 적용으로 인해 성역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 천민자본주의의 오염이 가부장제의 영속화를 새로운 신분제 사회의 공고화를 일구는 데 앞장섰다. 자본의 많고 적음으로 인해 교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새로운 계급이 형성된다.

그렇게 형성된 계급이 앞서 말한 가부장제의 계급적 특징인 학연, 지연, 혈연의 세습으로 인해 이른바 신분제 사회의 무리 없는 출현에 앞장섰다. 특별히 독재 시대를 통해 악한 성장의 특혜를 고스란히 누린 재벌 위주의 독과점적 자본주의 수혜자들은 21세기로 들어선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을 견고히 해 나가며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가고 있다.

비겁한 것은 이러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나가는 데 한마디의 비판 의식도 가질 수 없도록 체질화된 교회가 자유와 민주, 평등과 차별 없는 사랑의 보루인 것처럼 선전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교회는 더한층 수치스런 신분제 욕망의 홍위병, 그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흉물적 유산으로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다.

공교회적 비차별성 기억하기

이러한 실체적 진실 앞에서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입바른 소리처럼 초대교회를 외쳐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더 이상 쉽게 내뱉어서는 안 된다. 이는 뼛속까지 오염된 자신을 스스로 치료해 보겠다며 나서는 추한 꼴로 기억되고 말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사소하면서도 익숙한 것 속에 숨어 있다고 한다.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그 시작조차 가늠하기 힘든 진창 속에 빠진 한국교회는 초대교회 어쩌고저쩌고하는 거창한 정신이나 구호의 기름기 죄다 걷어 내고 초대교회가 남긴 예수 그리스도의 거의 유일한 영적 유산인 공교회적 비차별성이 어떤 의미였는지부터 인지하는 재활이 요청된다.

비차별성이 살아 있던 적이 언제였는지, 살아 꿈틀대던 복음의 정신이 어떤 특장(特長)으로 작동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작업, 비록 그 작업이 지난하고 요원해 보여도 계급의 교회로부터 한 걸음 넘어서는 첫걸음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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