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청년아카데미 '사회 선교 학교' 참여자들이 백혈병이나 암으로 투병하는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을 위해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농성하는 반올림을 7월 15일 탐방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강남역 8번 출구 앞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 삼성전자 홍보관 건물이 서 있는 곳 한 귀퉁이에 있는 '반올림' 농성장이다. 반올림은 백혈병이나 암으로 투병하는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을 위해 280일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7월 15일 기독청년아카데미(기청아) '사회 선교 학교' 참여자들이 반올림을 찾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에도 반올림 활동가들은 농성장을 지키고 있었다. 예정 시간 저녁 7시보다 이르게 도착했다. 이종란 노무사와 권영은 활동가, 미디어뻐꾹 이병국 씨, 사진작가 이기화 씨가 맞아 주었다. 퇴근하고 부랴부랴 온 참가자들도 하나둘 들어왔다. 10명 정도 들어가면 꽉 차는 공간에 16명이 붙어 앉았다. 

▲ 기독청년아카데미 수강생들은 2007년 반올림의 출발부터 함께한 이종란 노무사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이종란 노무사가 말문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도 한국·중국·멕시코 페미니즘 활동가들을 만났는데, 지친 기색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가 급성 백혈병에 걸려 2007년 숨을 거둔 고 황유미 씨(당시 23세)의 아버지 황성기 씨를 만난 게 인연이 되었다. 이종란 노무사는 자식을 잃은 슬픔과 억울함을 하소연할 데가 없는 황성기 씨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2007년 11월 반올림이 출범했다.

고 황유미 씨는 기흥공장 3라인에서 오퍼레이터로 일한 지 1년 8개월 만인 2005년 6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2년도 안 되어 숨졌다. 같은 공장에서 2인 1조로 일한 고 이숙영 씨(1997년 입사)도 2006년 7월 백혈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한 달 만에 숨졌다. 이 씨의 나이는 당시 30세였다.

▲ 반올림은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가 급성 백혈병에 걸려 2007년 숨을 거둔 고 황유미 씨 사연을 계기로 출범했다. 반올림에서 제보받은 피해자 수만 220명이 넘었고, 그중 76명이 중병으로 사망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삼성반도체·LCD 공장 직업병은 황유미 씨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반올림에 제보가 들어온 피해자 수만 하더라도 220명을 넘어섰습니다. 그중 76명이 백혈병이나 각종 암에 걸려 사망했습니다. 20·30대에 중병에 걸려 투병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런데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피해자는 11명에 불과합니다. 회사가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반도체에 들어가는 화학물질이나 작업 환경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어 산재로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2010년 서울대 산학협력단에서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에서 쓰는 감광제 속에 백혈병을 유발하는 발암물질 '벤젠'이 들어 있다는 게 밝혀졌다. 2012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조사 결과에서도 삼성 온양공장에서 쓰는 에폭시 수지류 화학물질 부산물인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등에서 발암물질이 생기는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반도체 직업병은 진상을 규명하기 어렵습니다. 암의 잠복기가 10년입니다. 직업병으로 인정받으려면, 10년 전 작업환경 속에서 어떤 유해 물질에 노출되어 병에 걸렸는지 입증해야 합니다. 반도체는 공정 변화가 매우 빠른 산업이다 보니 과거 작업 환경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입증하기 어려운 점이 노동자들의 산재 불승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약점 때문에 삼성은 피해자들의 병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 220명 넘는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중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사람 수는 11명에 불과하다. 반올림은 사과와 보상,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280일 넘게 농성하고 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반올림이 요구하는 것은 삼성 측의 책임 있는 반응이다. 사과와 보상, 재발 방지 대책 마련, 이 세 가지를 요구하며 노숙 농성을 이어 나가고 있다. (반올림이 노숙 농성을 하는 이유?) 이종란 노무사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피해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거듭 얘기했다. 뇌종양으로 투병했던 한 피해자는 "내가 일할 때 쓰던 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왜 얘기해 주지 않았나. 꼭 사과받고 싶다"며 피를 토한다. 보상 이전에 더 중요한 건 사과하고 책임지는 자세였다.

이종란 노무사는 피해를 입증하는 문제에 앞서 오랫동안 투병하는 피해자와 가족의 아픔을 헤아려 달라고 삼성 측에 당부했다. "피해자를 지켜보면서 기업이 피해자가 당한 고통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낍니다. 문제 해결은 삼성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삼성이 하루속히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 줘, 피해자들의 고통이 덜어지기를 희망합니다."

▲ 기청아가 반올림을 찾은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사회선교 학교 참가자들은 피해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숨진 76명을 생각하며 추모했다. (사진 제공 기독청년아카데미)

기청아가 반올림을 찾은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이종란 노무사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지만, 함께하는 이들이 있어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사회 선교 학교 참가자들은 피해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숨진 76명을 생각하며 추모했다.

농성장에서는 외부 인사들을 초청해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뿐 아니라 여러 이슈를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이어 말하기'를 매일 오후 6시 진행하고 있다. 7월 28일에는 농성 300일을 맞아 문화제를 개최할 예정이다.

사회선교 학교 다음 탐방지는 청년 문제를 함께 풀어 나가는 청년들의 새로운 공간 '무중력지대'다. 7월 29일 저녁 7시다. (자세한 내용 보러 가기)

▲ 반올림은 7월 28일 강남역 8번 출구 앞 농성장에서 농성 300일을 맞아 문화제를 개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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