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페이스북 그룹 '신학 서적 표절 반대'에 표절 의심 자료가 연달아 올라오면서 1999년 출간한 차정식 교수(한일장신대)의 주석 <로마서> 1·2(대한기독교서회)가 '표절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차정식 교수는 이에 <뉴스앤조이> 지면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후 차정식 교수의 신간 <예수 인문학>이 새물결플러스 출판사에서 출간되면서 논란이 다시 불거졌습니다. <뉴스앤조이>는 <크리스찬북뉴스>가 보내온 <예수 인문학> 서평을 게재합니다. 이 서평과 관련해서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은 언제든 <뉴스앤조이>로 원고를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자 주

1. 예열

<예수 인문학>(새물결플러스)은 표절 논란의 중심이 된 지은이가 자신의 심정을 직간접으로 표현한 서문으로 이미 세간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책을 펴낸 곳 역시도 파란을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처럼, 이런저런 이유들로 <예수 인문학>은 그야말로 화제였다. 자칫 마케팅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그만큼 많았다.

서문이란 것이 대체로 작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도취적 용단(?)을 미화하는 내용 일색이 아닌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분노 모드의 온건한 작동으로 보인다. "언제나 냄비처럼 들끓는 내 분요한 조국의 한 후미진 구석에서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서푼어치의 지적인 양심을 걸고" 이런 문장도 불편을 가속했지만 마치 당신 스스로를 대가로 설정한 듯한 쌍팔년도식 올드한 문장과 오만함이 더 거슬렸고 한편으론 촌스러웠다.

"나는 지적 식민지로서 (중략) 그저 서구학자들이 해 온 방식을 기계적으로 모방하고 그것을 절대 불변의 기준인 양 맹종하는 학문적 풍토를 안타까워하며 거기에 조그만 균열을 내고자 자유분방하게 내 사색의 결을 따라가고 싶었다 (중략) 나는 어설픈 흉내 내기로서의 공부가 한없이 역겨웠고 (중략) 잡다한 각주를 다는 식의 학문이 불쌍했다."

이쯤 되면 동서양 그것들을 통달한 초인의 질타성 발언 같은, 21세기 한국 지성계를 겨냥하는 이분의 요즘 내면이 여실히 묻어나는 대목이었다. 서문은 이렇게 종결된다. "훠이 물렀거라! 예수의 본심과 무관한 잡것들아!" 어림짐작으로도 당사자로 지목되는 분들은 좀 불쾌하지 않을까.

▲ <예수 인문학> / 차정식 글, 유영성 그림 / 새물결플러스 펴냄 / 316쪽 / 1만 6,000원

<예수 인문학>은 제목과는 달리 산문 형식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이다. 서평으로 남기기도 그런, 읽기도 쓰기도 쉬운 책이다. 애초에 출판사와 이걸 약속했고 출판사는 이 책을 기대하여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출판을 감행했단 말인가? 그런 생각들이 가시지 않아 글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저런 연유로 <예수 인문학>을 삐딱하게 읽기로 한다.

서문에서도 밝히듯이 저자가 주장하는 사라진 전통이라 통분해 마지않는 예수 모습이란 넓은 의미의 인문적 공부를 폭넓게 체득한 "공부와 해석을 중시한 구도자적 현자"로서의 예수 전승이라 한다. 문장도 분석도 관점도 진부한 지적이다. <하나님나라의 향연>의 동일한 저자로 믿기 어려울 만큼 옥시덴탈리즘적인 발상과 통찰이다.

이전에도 쉬운 내용을 어렵게 쓰려는 경향이 보였는데, 결국 이런 결과를 스스로 야기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서글펐다. 이만큼 불을 지폈으니 이제 삐딱하게 본문으로 들어가자.

2. 융해열

<예수 인문학>은 총 50장에 이르는 소주제들을 간략하게 엮었다. 마태복음 중심의 적용은 34장에서 그치지만 복음서 읽기는 선별적으로 계속된다. 요상한 한자 조합인 '교학상장(敎學相長)과 점입가경'을 붙인 1장만은 예외다. 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한다는 '敎學相長'과 마찬가지로 공부법을 물어 오는 학생으로부터 조성된 생각을 덤덤히 써 내려간 글이다. 이 틈새는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와 '나' 역시 어리석은 길에서 혼미하게 헤맸다는 독백이다.

2장은 예수의 소년 시절을 통해서 듣는 마음, 심지어 침묵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태도를 노래한다. 3장에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다"는 마태복음 모티프에서 비롯된 '눈의 중요성'이란 보는 기능이라기보다 시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가 숭상하는 것이 빛이 아니라 어둠일 수 있음을 암시했다('지독한 회의와 눈빛 훈련').

'단순성의 복합적 차원'(4장)에서,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면"이란 마가복음 10장 14절을 심각하게 숙고했다는 저자는 마침내 '어린이다움'(childness)의 온전한 말뜻을 깨우쳤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예수의 영성을 닮아 그렇게 천진성과 단순성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갈 존재임을 밝힌다.

단순하지만 복잡하다는 이유로 어린아이의 가난으로 회귀하는 무의 상태,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전복에 근거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어린이다움'으로의 전환은 지적인 섬세함을 무시하지 않는 단순함을 표방하지만, 당시 사회의 가장 약하고 무가치한 존재의 표상으로서 '어린아이같이'에서 깨우친 다른 무엇은 이전 해석들과 다를 바 없어 밋밋하다.

지독한 회의와 눈빛 훈련(3장), 단순성의 복잡한 차원(4장)에서 보듯, 저자가 제목을 이렇게 기호화하는 이유는 뭘까? 심오한 무엇으로 봐 달라는 건지, 단지 그 같은 꾸밈의 일상을 이룬 건지 모를 일이다. 쉬운 내용을 어렵게 쓰려는 여전한 경향과 이 과신은 뭘까?

'삭개오의 후일담'(5장)에 이르면 저자의 난독증(?)이 재발되는 듯하다. 진골 신학자의 속살이 여간 껄끄럽지 않다. "삭개오를 향한 예수의 구원 선포가 성급하지 않았을까"로 발생한 그의 의문은 삭개오를 향한 예수의 너무 이른 선포, 그가 열매를 맺는지를 보지 않는 신중치 못함, 삭개오의 선제적 미끼일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지은이는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 예수는 냉철한 판단보다는 미완료의 희망을 거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예수식의 담백한 낙관주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예수는 삭개오뿐 아니라 인간을 외적 표피로 파악하시는 분이 아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를 찾아왔을 때 이미 그가 당신을 시험하기 위해 다가온 것을 간파하신 분이다. 저자는 왜 예수의 구원 선포를 낙관주의로 부각시킬까? 그리스도 예수를 인간 예수로 환원하는 자기 관점의 투영은 아닐는지. 식상하다.

'온전함에 이르는 공부'(6장)는 온전과 완전에 대한 지난 오해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온전해지려면 먼저 우리의 상용 어휘에 박혀 있는 고정관념을 탈색시켜야 한다. (중략) 이는 그 결과로 생기는 존재론적 균열을 미봉하면서 (중략) 그 연상 작용 속에 온전함은 불온한 완벽주의에 저당 잡혀 버린다." 간증이나 설교집을 제쳐 두고 신학 책을 구입할 정도의 독자라면 익히 알 만한 논지를 에둘러 표현하면 이런 묘사에 환호하는 독자가 여직 남아 있을까.

저자는 용서 이야기를 두 장에 걸쳐 다뤘다. 우리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이므로 하찮은 생명에게까지 공손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자들의 질문과 주기도문으로 풀었다.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자세는 극진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용서를 구하는 자만이 아니라 반대인 자라도,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 자라는 지점에서, 관대와 긍휼의 예수의 심성은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바른 말이다. 그런데 자꾸 저자 자신을 변호하는 글로 보인다. 공손히 용서를 비는 모습은 차체에 두고라도 "잡것들아"가 환청처럼 들리는 통에 아무리 신묘막측한 변을 하더라도 수긍이 쉽지 않았다.

주기도문 묵상(9장, 14장) 이후, 보신주의와 낙관주의에 실종된 '구함'과 '주어짐'에 대한 관점과 '언어와 분수 공부'(17장)와 같이 절제로서의 분수, 즉 각자 제 분수를 파악하라는 저자가 보내는 추파가 은근하다. 언어에 관한 예수의 근원적 요지라는 것인데, '예'와 '아니요' 용례(마 5:37)가 깜냥껏 시시비비에 대한 자기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와전된 것이라 한다.

이런 강박적 사태는 화끈하게 소신껏 발언함으로 일어나는 사안이다. 언제라도 자기 확증적 언어는 하나님이라도 된 오만방자한 폐쇄적 도그마에 붙잡힌 신성모독의 언어로 나아가는 단계라는 것인데, 비굴한 언어와 동일하게 자기 확신의 언어 역시 자기 성찰을 생략한 맹세의 사생아다. 저자의 거듭되는 요점은 "자기 분수를 알라"였다.

<예수 인문학>은 '인생 공부 예찬'이라 할 수 있다. 연출된 경건이 그렇고(18장) 신중한 처신이 그러하며(19장) 상호주의가 그러하다(20장). 열매 전성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개신교인들에게 바라는 당부(21~23장) 역시 수직적인 어조인 것을 제외하면, 위장술로 양의 옷을 입은 자들의 행함 매너리즘을 바라보며 진정성의 선행을 권하는 무색무취한 교훈을 만날 수 있다.

24장 '기동력과 결단력'은 5장에서 밝혔듯이 인간 예수에 집착하는 지은이의 초점이 유랑 선교자들에게로 옮겨진 듯 보인다. 부름을 받아 떠난 제자들의 길 위에 존재자들의 재해석을 통해 예수는 유랑 선교에 가장 중요한 자구책으로 "숙식을 의탁할 후원자 확보"를 꼽았다고 전한다.

마태복음 10장 11-14절은 '민첩한 기동력'을 명시한 것이며, 신속한 기동력과 결단력은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 방어기제로 제시한다. 그런데 위 진술 어디에도 "하나님만을 바라는" 제자, 주의 예비하심을 믿고 떠나는 복음 전도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전제가 지워져 있다. 단지 인생 경험이다. 저자에게 반사된 성경이란 사람의,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지혜를 지목하는 것은 아닐는지, 자가당착에 빠진 제자들이 떠올랐다.

정치판은 물론이고 교회도 사람을 모아야 한다는 '인력과 척력'(25장),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전적인 의존과 비굴하고 체면 구기는 무소유가 뒤엉킨 '무소유의 참뜻'(26장), 혈통가족에 대한 책임은 일차원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고차원적이라는 '가족과 함께 가족을 넘어'(27장), 뱀처럼 비둘기처럼(마 10:16)의 모순어법 속에 드러난 예수의 상황 논리인 '뱀과 비둘기의 아이러니'(28장), 이처럼 알레고리 수준의 봉합을 넘어섰음을 공개하는 것과는 달리, 유대 무화과나무의 특성을 간과하여 예수를 기행과 폭언의 주체로 단언한 '일탈과 폭력의 아이러니'(29장)와, 천국의 비밀 코드인 '성장과 도약'(30장),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는 종교적 상투어를 해부한 '자율성의 원리'(31장)에서 확인되는 것은 언어는 고결하고 풍성한데 새로운 제안은 없는 반복이 이 산문집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선, '종말론적 판단 유보'(32장)는 심각했다. "세상을 하직하는 인생들을 향해 하나님이 꼭 행하신다는 게 심판이라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인생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종말론적 판단 유보다." 연역적 구성이 주는 논점과 쟁점도 그러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비견하는 자기 견해에 대한 확신이 거북했다.

"성급한 결론에 매달리지 말 것"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종말론적 판단 유보라 하여 혼란을 가중시킬 필요가 있을까? 대단치 않은 것을 대단하듯이 들어 줘야 하는 어느 고관대작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그 불편함. 가라지를 뽑지 말라 하신 예수의 의도 역시(마 13:27-29), "성급함의 제지"라기보다는 문맥 그대로 알곡의 보호가 더 적절치 않았을까.

저자가 일관되게 다루는 핵심 주제는 '공부'이다. 공부는 상상력이라는 동력을 제공받으나 상상력이 불가능의 벽을 뚫어 내는 현장에서 종종 부대끼는 문제가 우발성이다. 그래도 우발성이 은총의 분깃으로 발현되는 앎의 영역에는 온기가 감돈다.

그러므로 밭에 '감추인 보화'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농부가 얻는 기쁨은 일확천금이 아니라 진리를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었다(마 13:34). 이렇듯 인생도 공부도 발견의 기쁨과 함께 개화한다('우발성의 은총'). 33장은 불시에 무릎을 세우게 하는 우아한 치환이었다.

'정감법의 대화' 편에는 주 텍스트였던 마태복음이 제외되고 마가복음이 등장했다. 부자 청년과의 대화는 이미 마태복음서에도 언급되는 것이었지만 굳이 마가복음을 올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선한 선생'에 있었다. 마태는 이 기사를 옮기면서 '선한 일'로 바꾼 것이 분명했다.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는 예수의 대답이 그 점을 증명한다.

나는 '선함'(good)에 관한 특별한 관점을 기대했지만 저자는 '예의 바른 청년'을 부각할 심산이었을 뿐이다. 화제는 영생으로 가는 행함으로 옮겨졌다. 저자는 청년의 경우에서와 같이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살피는 여유(?)가 공부의 진전을 가져온다는 것으로 이 본문을 차용했다. 부자였기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을 놓칠 수 없었기에 근심하며 돌아간 게 아닐까?

마지막 장 '죽음과 부대끼기'에 다다랐을 때의 심정은 절박했다. 숙성된 무엇을 반드시 찾으리라.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읽고 들은 각주들의 나열만 보였다. 예수가 남긴 제3의 유산, 겟세마네 기도가 '생명에 대한 애착'이었을까, 죽고 싶지 않은 인간의 생태적 욕망에서였을까?(313쪽) 저자가 바라보는 예수의 죽음과 기도의 부조화가 두드러진다. 예수는 어떤 고통을 호소했을까.

3. 응고열

복음서를 모티프로 한 묵상 글 <예수 인문학>은 일관된 흐름이 있다. 공부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며, 얼마나 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발적 물음과 자기 대답을 깨알 같은 비범한 문장으로 채웠다. 구성을 보면 글이 먼저였고, 복음서의 구절들이 덧입혀진 듯하나 상관없다. 저자도 괘념치 않고 자신이 원하는 요지로 해석했다.

그야말로 본문이 먼저인 경우는 아마도 37장부터 일 것이다. 곧 파탄에 이를 부실한 성공을 부여잡으면서도 주야장천 하나님을 불러대는 애물단지를 끌어안은 사람들을 바라본 36장 '계산하는 믿음, 포기하는 용기'(눅 14:28)와 39장 '돈에 대한 지혜' 등이다.

애초부터 <예수 인문학>은 내 마음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고의로 삐딱하게 뒤집어 읽었으나 어찌 일개 목사가 대교수의 글과 심정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냥 내 방식대로 글을 탈탈 털기도 하고, 부러 비비 꼬기도 하였다.

<예수 인문학>은 읽음과 동시에 잊혀지는 책이다. 이 책처럼 독서하면서 예열에 뜸을 들인 적도 없었지만, 읽기 무섭게 빠르게 식은 기억은 별로 없다. 무슨 변고냐 하면 여기에 있는 묵상들은 오랜 시간동안 점진적으로 분량이 채워진 것이 틀림없다. 저자는 단순하고 익숙한 내용을 다듬어 빛나는 문체로 바꾸는 작업에 열중했던 것 같다.

글을 잘 쓴다는 소리를 들으려는 강박이 아직 남아 있는지, 정말로 글을 잘 쓰려는지, 좋은 글을 쓰려면 수사의 기교나 변화무쌍한 용어 발굴이 아니라 전하려는 알맹이가 새로워야 하겠다. 하지만 전자는 풍성한데 후자는 밋밋하다. "아하!" 무릎을 치거나 가슴이 벌렁거려 책장을 넘기는 손끝이 떨리는 그런 기대는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성호 / <크리스찬북뉴스> 페이스북 운영자, 포항을사랑하는교회 담임목사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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