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더 나은 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 즉 남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무엇인가를 좋게 만들려는 사람의 제물을 받으신다. 하나님이 아벨에게서 이 특징을 보셨고 이것이 그의 제물을 받으신 이유다." (140쪽)

▲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 요람 하조니 지음 / 김구원 옮김 / 홍성사 펴냄 / 436쪽 / 3만 3,000원

요람 하조니의 〈구약성서로 철학하기〉(홍성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중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를 설명한 거죠. 굳이 말하자면 '성서의 윤리학적 관점'이라고 할까요? 가인의 제사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땅을 경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 드렸지만 궁극적으로 농경 생활의 부와 권력의 축적물로 연결된 것이고, 아벨의 제사는 다윗 왕조의 유목민적 자유로움과 순전함의 헌신으로 연결된다는 관점이죠.

이 책은 그래서 구약성서를 전체적인 내러티브로 봐야 하고, 그를 위해 세 개의 틀로 엮여 있다고 하죠. 하나는 창세기로부터 시작해 열왕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발흥과 독립국가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아홉 권의 책, 둘은 선지자들의 설교 즉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대선지서와 12권의 소선지서들, 셋은 성문서 곧 150편의 시가 묶인 시편과 도덕철학을 주로 다루는 잠언과 신학적 질문에 답하는 내러티브서 욥기, '작은 두루마리'를 뜻하는 메길롯(아가, 룻기, 예레미야애가, 전도서, 에스더)과 다니엘, 그리고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역대서 등으로 말이죠.

물론 그런 구조와 구성에 대해 이 책이 심혈을 기울인 건 아닙니다. 이 책의 무게중심은 이스라엘 나라의 흥망성쇠라는 역사 속에서 발견코자 하는 '철학적 관점'이죠. 그것에 강조점을 두는 이유가 있겠죠? 이 책을 보면 알겠지만 그리스철학과 독일철학의 '주역들'. 굳이 주역들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중심부에 있다는 사실인데, 그들은 구약성서를 의도적으로 소외시켰다고 하죠. 이른바 구약성서는 신의 계시로부터 나온 산물로서 인간의 이성을 개발하고 극대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이죠.

바로 그것을 돌아보고 또 돌이키기 위한 차원으로 이 책을 쓴 것이죠. 그래서 그리스철학과 독일철학조차도 구약성서와 같은 계시적인 차원의 영향을 받았다는 관점을 밝히죠. 이른바 존재의 본성에 지대한 철학적 영향을 미친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기원전 515-440)는 플라톤의 〈대화편〉에까지 등장하는 인물로, 그의 지성과 이성과 철학적 견해는 '신의 계시에 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언급합니다. 또한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기원전 490-430)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철학적 언설이 '신의 목소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죠.

그래서 이 책에서는 구약성경의 예레미야와 플라톤 시대의 약 200년 동안 서양철학을 태동시키고 번성시킨 과정들이 실은 신의 계시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게 아님을 강조하죠. 그만큼 계시와 이성은 따로 뗄 수 없는 관계요, 구약성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철학적이 기반은 물론이고 이성적인 합리성까지도 구축할 수 있다고 하죠.

"구하고 질문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호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질문을 제기하고 하나님과 논쟁하고 때때로 하나님의 마음까지 바꾸게 한 인물들의 전통이 성서 안에 생겨났다. 여기에는 소돔을 멸망시키는 것이 정의로운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과 논쟁한 아브라함이 포함된다. 모세도 여러 번 이스라엘을 도말해 버리겠다는 하나님을 설득한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하박국, 요나, 욥 등도 하나님의 정의에 질문을 제기한다. 이 모든 예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에게 칭찬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297쪽)

하나님에 대한 도전장을 내민 구약의 인물들을 언급한 내용입니다. 그만큼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에 위배되는 교리를 무조건 강요하거나 복종케 하지는 않았다고 하죠. 구약성서의 기자들은,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 진지하게 묻고 따지기를 원하는 분이었고,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도 다르지 않았다고 하죠.

어떤가요? 신선한 발상이지 않습니까? 이 책을 읽다 보니, 요즘 새벽에 묵상하고 있는 욥기서의 마지막 부분(욥38:1-42:17)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욥과 세 명의 친구들보다 한 참 나이가 어린 '엘리후'가 중재자로 등장해 욥의 고통을 '교육적인 차원'에서 언급했는데, 그 뒤에 곧장 하나님께서 나타나 욥과 대화를 나누고 욥을 회복시켜 주시는 장면이 그려져 있죠.

하나님께서 욥과 첫 번째 대화하실 때(38:1-40:2) '폭풍 가운데'(욥38:1) 나타나셨죠. 왜 하필 폭풍(סַעַר, sah'·ar, whirlwind, storm)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갈 때(왕하2:1,11),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대적들을 물리칠 때(시83:15), 적국을 심판(겔1:4)하거나 악인을 심판(렘30:23)할 때, 불순종한 하나님의 사람을 바로 잡고자 경고장을 보낼 때(욘1:4)도 그랬죠. 어떤 학자는 바알신 숭배사상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하기도 하죠. 욥기서와 관련해서는, 자기 의로움을 항변하는 욥의 오만함을 잠재우고자, 폭풍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등장치 않았나 싶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땅과 바다와 태양과 천체와 기후를 주관하시는 분(38:4-38)으로, 또한 살아 있는 산염소와 들나귀와 들소 등 10개의 특별한 짐승들의 이치(38:39–39:30)에 대해 차례로 질문을 던지죠. 이제 욥이 첫 번째 대답(40:3-5)을 하는데 그저 입을 다무는 수준이었죠. 그렇다고 자백을 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하나님의 대화가 시작되는데(40:6-41:34), 그때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두 개의 짐승 곧 '베호못'(בַּהֲמוֹת, extinct dinosaur)과 '리워야단'(לִוְיָתָן, sea monster, dragon)에 대해 욥에게 질문을 던졌죠. '베호못'은 보통 '거대한 공룡'으로 생각하는데 또 다른 의미의 '베호못'(בְּהֵמָה)은 모든 '짐승들'의 총체를 가리키기도 하죠. '리워야단'은 보통 '악어'로 알려져 있지만, 가나안 종교에서는 '악한 신화적 괴물'로도 보죠. 더욱이 성경에서도 그것을 은유적인 상징물로 여기기도 하죠. 시편에서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그걸 물리친 바(시74:14) 있다고, 마지막 묵시록 전쟁 때에는 그걸 완전히 도말시킨다(사27:1)고, 묘사한 게 그것이죠.

요람 하조니의 〈구약성서로 철학하기〉처럼, 욥기서를 하나의 내러티브로 읽을 때, 그 베호못은 모든 살아 있는 육지 짐승의 총체로, 리워야단은 바다 생물의 총체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대표성으로 말이죠. 물론 베호못을 하늘과 땅과 바다의 짐승을 대표하는 것으로 본다면, 리워야단을 영적 세력들의 총체로 볼 수도 있겠죠. 사실 욥기서의 서론에서 욥은 사탄의 시험조차 몰랐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그런 영적실체에 대해 욥의 무지함을 깨우쳐 주려는 하나님의 의도였을지도 모르죠.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욥은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대답(42:1-6)을 하죠. 그때 욥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자신의 무지함과 연약함,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무한 신뢰를 차례로 고백하죠. 이른바 자백과 감사의 고백이죠. 그것은 욥의 고통을 세 친구들이 인과응보식의 관점으로, 엘리후가 교훈적인 관점으로 바라본 차원을 넘어서서, 더 깊은 하나님의 차원을 깨닫는 바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자녀가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해도 끝까지 하나님 안에 거하며 순종하면, 하나님의 주권과 신실하심 속에서 새 길을 열어주신다는 걸 말이죠.

이제 욥기서는 결말(42:7-17)로 끝을 맺죠.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들의 무지를 일깨우며 '내 종 욥'에게 사죄하도록 했고, 그런 그들을 위해 욥이 기도(42:7-9)하도록 요청하죠. 그런 연후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전 소유보다 갑절을(42:10-17) 주셨다고 밝히죠. 그런데 욥이 140년을 향수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욥은 70살에 고통을 당한 걸까요? 유대 전승을 따르는 칠십인역(LXX)은 욥이 240살에 죽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하죠. 다만 서론 부분에 등장한 천상의 회의나 사탄의 언급, 그리고 욥의 아내에 대한 부분은 없죠.

이상이 욥기서의 결말인데,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욥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중재자(욥9:33, 딤전2:5), 부활자(욥14:14, 요11:25), 변호인(욥16:19-21, 히9:24,요한일서2:1), 대속자(욥19:25-6, 히7:25, 벧후3:9-10), 심판자(욥23:3-9, 행17:31) 등이죠. 그만큼 욥기서를 통해서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겠죠.

요람 하조니의 〈구약성서로 철학하기〉처럼, 욥기서를 통해서도 '철학하기'는 가능할까요? 충분하겠죠. '하나님은 왜 의로운 욥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지'에 대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을 비롯해, '욥의 고통에 대해 세 친구들처럼 인간적 본능과 감성에 의존하기보다 이성적 사고만으로 판단'하려는 '합리주'(合理主義, Rationalism), '극심한 고통의 터널을 지난 욥은 과연 자기 주체적으로 존립의 근거를 확립할 수 있는가?'하는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e), '고통당하는 욥을 떠나는 아내를 누가 욕할 수 있는가?'에 대한 '페미니즘'(女性主義, feminism) 등이 그것이죠. 그 밖의 다른 철학적 논의도 가능하겠죠.

비록 지금은 구약성서가 그리스철학과 독일철학의 소외와 무시에 의해 중심부에서 한참이나 밀려나 있다고 하지만 머잖아 중심부에 설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 거대한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그리고 로마제국은 역사의 종국을 고했지만 그 작은 변방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은 지금까지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 있으니 말이죠. 이스라엘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철학도 분명코 새롭게 급부상할 날이 올 것입니다. 철학의 가치도 역사적 가치처럼 그 크기보다는 영원성에 있을테니 말입니다. 샬롬.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