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한국의 프란치스코', '맨발의 성자'.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수도 공동체 '동광원' 설립자 이현필 선생이다. 한국교회사에서 자기 신학 세계를 구축한 사람은 몇 안 된다. 이현필 선생도 그중 한 사람이다.

7월 4일 서울 광진구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공동체지도력훈련원 연수회가 열렸다. 이현필 선생의 생애와 신앙관을 듣는 자리였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회 공동체가 참석했고 공동체에 관심 있는 사역자·평신도도 함께했다. 창조적인 사상운동을 펼친 이현필 선생의 삶을 듣는 것으로 첫 시간을 시작했다.

김영락 목사(하늘길수도원)가 이현필 선생에 대해 설명했다. 김 목사는 과거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지금은 강원도 횡성에서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수도 생활을 하고 있다. 김 목사가 이현필 선생의 일대기를 정리해 발표했다.

고아원이자 최초 개신교 수도 공동체 '동광원'

이현필 선생은 29세부터 전북 남원 지리산 자락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농사를 지었다. 수도 공동체 생활의 시작이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추종자가 생겼다. 산에서 부인·소년·소녀들이 움막을 짓고 조악한 먹거리로 끼니를 때우며 이 선생과 함께 수도의 삶을 살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수도 공동체였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많은 고아가 발생했다. 이현필 선생은 1949년부터 화순 도암에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1950년 광주에 고아들을 돌보기 위한 '동광원'이라는 고아원을 만들었다. 이 선생과 제자들이 고아원을 섬겼으나 후에 없어지고 '동광원'이라는 명칭은 수도 공동체의 이름이 됐다.

▲ 이현필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광주에 고아원 '동광원'을 설립했다. 많을 때는 100여 명이 함께 사는 곳이었다. 나중에 '동광원'은 개신교 수도 공동체가 된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동광원은 동시대를 살았던 다석 류영모 선생도 자주 다녀가던 곳이다. 류 선생은 동광원에 참석해 한학을 중심으로 강의했다.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이현필 선생은 이 강의에 대해 "한마디 한마디가 피투성이"라고 평하며 류영모를 존경했다.

이현필 선생이 세운 수도 공동체 '동광원'은 이후 전국 10여 곳에 생겼다. 남원시 대산면에 본원이 있으며 40여 명이 살고 있다.

이현필 선생의 최고 덕목, 겸손

이현필 선생은 늘 겸손했다. 식사를 할 때도 밥상 위에 밥을 올려놓고 먹지 않았다. 자신은 죄인이라며 방바닥에 놓고 먹었다. 동광원 사람들은 좁은 논두렁에서 사람과 마주치면 자신이 먼저 내려서서 상대방을 보낸다. 이현필 선생이 몸소 실천한 겸손의 미덕을 보고 배웠다.

한국전쟁 때 동광원 식구들은 100명이 넘었다. 사람은 많은데 식량과 땔감은 부족했다. 이 선생은 제자와 함께 기거하는 중에 한 벌밖에 없는 이불을 내어 주며 다리 밑에 누워 앓고 있는 거지에게 갖다 주라고 한 적도 있다. 그의 삶은 늘 헐벗은 사람을 챙기고 도와 주는 일이었다. 구호 사업을 많이 했으나, 구호 사업을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 이현필 선생은 '한국의 프란치스코', '맨발의 성자'라고 불렸다. 그는 '가난'을 그리스도인의 덕목으로 여겼다. 거지에게 옷을 벗어 주고 한 벌뿐인 이불을 갖다 주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믿음뿐이요, 사업이 아닙니다. 사업에는 반드시 간음 행위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만 요구됩니다. 교육도, 구제도, 전도도 아닙니다. 병원·고아원·장애인 요양원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주님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가 삶을 사는 자세는 겸손에서 비롯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 몸으로 이 땅에 오시되 말구유에 오셔서 갖은 고생을 다 하시다가 나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이 역시 겸손에서 비롯된 것이다. 겸손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라고 했다.

"겸손을 주소서. 제가 극진히도 겸손케 해 주옵소서. 제가 주님에게 용납되도록 겸손케 만들어 주소서. 제게는 조금도 겸손이란 것이 없습니다. 주님, 다른 이를 용인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들의 것이라

이현필 선생은 성경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가난한 삶을 택했다. '맨발의 성자'라는 별명은 그렇게 얻었다.

김영락 목사는 "내가 가난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자는 복 있다는 말씀을 진짜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가난한 자가 복 있다는 말씀에 '아멘'하고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한편으로는 안 믿고 거부하면서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나. 믿음이 필요하다. 내가 현실적으로 그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나의 현실을 뛰어넘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 목사는 다양한 사례와 글을 들어 이 선생의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설명했다.

"절제의 생활, 모든 것이 풍부해도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처럼 절약해서 쓰고 아끼는 생활. 그것은 모든 것에 풍부를 부릅니다. 아껴 쓰는 이에게 모든 좋은 것이 넘치도록 쌓입니다. 없는 것이 없고 부족된 것도 없습니다. 물 한 방을 아껴 쓰고 나무 한 부럭지를 아껴 때는 그 모습 그대로가 바로 풍부와 만족한 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요.

존귀보다 겸손이 먼저 있고, 풍부가 있기 전에 절약이 먼저 있습니다. 빈핍이 있기 전에 낭비가 있습니다. 패망이 오기 전에 천박한 인생관이 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풀이나 나무나 돌이나 무엇이든지 천하게 여긴 만큼 자기가 천해집니다."

이현필 선생이 가난을 택한 것은 철저히 예수님의 삶을 일상화한 결과다. 예수님도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 이 선생은 예수님을 그대로 따라가려고 애썼다. 이 선생은 "주님을 사랑하는 이가 가난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가난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난 이외의 것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김영락 목사(하늘길수도원)은 이현필 선생이 삶으로 보였던 '십자가 신앙'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는 이현필 선생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철저한 자기 부정의 삶을 사는 것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이현필 선생은 순간순간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철저한 자기 부정의 삶을 사는 것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의 삶 자체가 영적 순례였다. 인위적이 아닌 성령 충만함을 받음으로 표출된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예수님의 겸손이었다.

김영락 목사는 물질만능주의, 자본주의, 세속주의 속에서 이현필 선생의 삶은 십자가 신앙을 생각하게 한다고 했다. 그는 이현필 선생 삶의 열쇠는 십자가이고 십자가가 근원이라고 했다. 긴 강의를 마치며, 김 목사는 이현필 선생이 즐겨 불렀던 찬양 '갈보리 십자가'를 소개했다. 이 찬양은 동광원 성가집 1번에 수록된 곡이다. 이현필 선생이 작사했다는 말도 있다.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 예수는 귀중하신 보배 피를 흘리사 / 구원받을 참길을 열어노셨느니라 /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 아 십자가 아 십자가 /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 김영락 목사는 2016 공동체지도력훈련원 연수회 - 한국공동체교회한마당 첫 번째 시간에 이현필 선생을 소개했다. 현재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이들, 공동체를 준비하는 이들이 모여 이현필 선생의 삶을 공부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