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도서는 7월 4일(월) 저녁 7시 광성교회에서 '새 시대를 위한 한국교회의 회개와 소망'이란 주제로 저자 박영돈 교수가 발제하는 <크리스찬북뉴스>의 주제 도서입니다.

"네가 말 돌리고 내가 말 돌리면 서로 딴 이야기가 되잖아.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

▲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 / 박영돈 지음 / IVP 펴냄 / 348쪽 / 1만 4,000원

대학교 때 친한 친구랑 서로 말하기가 껄끄러운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말 돌리다가 친구가 답답해서 한 이야기였다. 그런 것 같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아프더라도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대화가 된다. 서로 안다는 이름하에 모호하게 말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의사가 "암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갑상선암이든, 위암이든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하고, 상태는 어느 정도인지 이야기할 때 치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한 내용을 말하는 걸 거북해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애매모호한 표현을 쓰는 이유는, 분명하고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문제는 지적할 수 있지만 종종 말한 사람에게 거북함과 불편함을 쏟아붓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크게 넘어져 상처난 이를 소독하기 위해 약을 바르면 찢어질 듯한 비명과 날선 손톱이 치료자의 얼굴에 박힐 수도 있다. 비판이란 그런 것이다.

또 직설적인 비판은 상대의 자기방어적 태도나 일부 부정확한 비판으로 인해 역공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확하고 사실적인 비판이 필요한 것은 비록 일부가 부정확하더라도 그 칼날이 예리할수록 반론이나 토론도 예리해지고 그 과정으로 정확한 문제 규명과 해결을 위한 발걸음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비판은 문제를 지닌 이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비판은 비판이 아닌 비난이 되고 치유가 아니라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와 교계 내외의 비판은 지금 상당하다. 실제로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교회에 날선 비판을 하는 이들이 제법 있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판이 상처에 양잿물을 붓는 듯하고, 모호한 표현으로 아무나 맞아도 된다는 식의 추상적 비난을 하는 이들이 있을 때가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어느 정도 그들의 이야기가 옳긴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정확한 진단보다는 그저 싫음과 혐오를 표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도 있다. 진정한 애정은 상처의 진물과 피고름에 직접 손을 대고 닦아 내고 씻어 주는 것이다. 그럴 때 비판할 자격이 있고, 비록 아프지만, 그러한 고마운 이들을 통해 치유가 이루어진다.

한국교회의 예민하고 아픈 부분을 분석하고 비판하다

<일그러진 한국교회의 얼굴>(IVP)을 쓴 저자도 교회의 아픈 이슈나 남들이 다루기 거북한 이슈들에 돌이 아닌 칼을 들이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최근 몇 년간 그가 쓴 몇 권의 책들이 그러하다. 그는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을 통해 한국교회의 성령 운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시도했다. 단순히 성령 운동만 비판했다면 그리 신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논쟁의 중심에 있는 손기철 장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고 분석하며 아주 예민한 부분에 손을 대었다. 가장 최근에 나왔던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도 젊은 층에 아주 뜨겁고 인기가 있어서 웬만한 신학자라도 공개적으로 손대기를 피하는 문제를 과감히 비판하기도 했다.

저자의 이 책은 한국교회의 가장 예민하고도 아픈 부분에 대해 실명을 거론하며 분석하고 비판한다. 사실 이런 한국교회의 문제에 대해 손쉬운 비판을 하는 이들도 있다. 손쉬운 비판이라 함은 비판을 하더라도 이미 사람들에게 돌을 맞을 대로 맞았거나 아직도 맞고 있는 이들을 향한 비판이다. 이런 경우는 이미 공공연한 비판이기에 별반 색다를 것도 없고 문제되지도 않는다. 손해볼 것도 없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에 나름 본을 보이고 있는 분들이나 교회들에 화살을 돌리는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것은 엄청난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한 것을 의식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문제를 접근하고 진단하고 있다. 만일 저자가 단순한 비판과 비난을 했다면 그의 비판은 무의미하거나 교회를 죽이고자 하는 공격밖에는 안 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문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분석을 내놓으면서 나름 해결책을 제시한다. 어떤 의사가 진단을 정확하게 내리지만 정작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기를 거부한다면 그 의사는 결코 나의 문제에 도움이 될 수는 없다. 진정 상대를 사랑하는 이는 어떻게든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함께하는 자여야 한다. 비록 그 해결책이 온전할 수는 없어도 원론적이고 피상적인 해결책을 넘어 구체적으로 제시하려 노력할 때 조금씩이라도 회생이 일어날 것이다.

특히 저자는 비판은 날카로워도 해결책은 정통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교회 갱신과 부흥을 이야기하는 많은 이들이 교회에 대한 진단을 그럴듯하게 제시하다가도 정작 그 해결책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겉의 틀만 손대는 제안을 하곤 한다. 마치 차 엔진이 망가졌는데 차 외관을 도색하고 에어컨을 교체하는 어리석은 이들과 같다. 그러나 저자는 보다 본질적으로 다가가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특히 이미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에서도 나타났지만 성령의 주관하심을 강하게 이야기하고 말씀과 기도 및 성도의 깊은 교제를 이야기한다. 너무 단순해 보이면서도 정답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회자를 제대로 길러낼 수 있도록 목회자의 소명과 신학교 등에 대한 비판과 해결책도 이야기한다. 더불어 저자는 거의 절반이 넘는 분량을 목회자의 설교분석에 집중한다. 물론 교회 갱신을 위해 목회자의 설교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방법론을 정용섭 목사의 책들만을 중심으로만 분석한 것은 아쉽고 불균형적으로 보인다. 그가 정용섭 목사의 책을 비판적으로 읽어 내기도 하지만, 단 한 사람의 책만을 대상으로 설교를 분석하는 것은 설교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는 아닌 듯싶다. 물론 정용섭 목사만큼 최근 설교자들을 연속적으로 분석해 낸 이도 드물뿐더러 일부 분석한 저자들도 비판보다는 대부분 칭찬과 장점에 치중한다.

비판하더라도 약간의 장식용 같은 비판은 비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저자에만 의지하여 그 책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게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저자 자신이 지적하듯 정용섭 목사의 신학적 잣대를 지적한 것은 저자의 정용섭의 설교 비평에 대한 중요하고 뛰어난 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저자의 이 책은 한국교회를 반성하는 데에 가장 모범적인 진단은 아닐 수 있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진단과 짚고 넘어가야 할 많은 이슈들을 제시하고 또 적절한 처방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좋은 비판이지만 놓친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아쉬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앞서도 부분적으로 지적하였고 또 지엽적일 수 있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불편한 문제들이 있다. 사실 이제 지적하고자하는 것은, 필자 자신도 껄끄럽고 불편하지만 그래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서 거론해 본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두루뭉술한 비판은 두루뭉술한 반론을 낳거나 반론 자체가 애매할 수 있다. 예리한 비판이 있을 때에 예리한 반론이 나올 수 있고 예리한 반론은 예리한 비판을 한 이도 아프게 할 수 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러한 비판을 한 이도 그것이 비난이 아니라면 받아야 하고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필자도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한 가지 반론을 하려고 한다. 그것은 '복음주의 4인방'에 대한 부분이다. 이것은 저자가 예로 든 것이고 이 책의 본질은 아닐 수도 있지만 결국 제대로 된 분석을 위해서는 사실관계나 비판은 좀 더 적실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거론하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저자의 4인방에 대한 비판은 상당수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틀린 점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 상황에서 그들이 행한 것을 지금의 교회 갱신의 잣대로 일률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제국의 초가집은 70년대의 눈으로 보면 새마을운동의 대상인 집이 되지만, 이렇게 개선된 70년대의 집은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낡고 추례한 집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분들은 50~60년대의 한국교회의 상당한 문제들에 도전했고 비판을 넘어 그들 스스로 변화를 이루어 낸 분들이다. 그렇다면 그 공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의 이찬수 목사님이 과연 옥한흠 목사님이 없었다면 태동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또 지금의 사랑의교회 문제는 제자 훈련의 실패라기보다는–제자 훈련이 온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후임목사 선정의 실패이다. 그 상황에서 지금까지 이루어져 왔던 제자 훈련의 토대가 십여 년 동안 천천히 붕괴되어지고 왜곡된 상황 속에서 발생한 문제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사랑의교회가 대형화되지 말았어야 했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사랑의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달리 각 소그룹을 통해 상당히 깊은 교제가 이루어져 왔다. 성도들의 은사를 활용하기 위해 애써 왔던 것도 사실이다. 사랑의교회가 예배 출석 인원에 비해 등록과 소그룹 출석이 저조했던 것은 그 제자의 기준을 높게 잡음으로 오는 문제도 컸다고 본다. 물론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월요일 아침의 강단이나 일상의 영성이란 표현으로 지적하듯이, 삶 속에서의 신앙이 지금의 기준에서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4인방의 토대가 없었다면 기윤실이나 기독교공정선거감시단, 기독교남북나눔운동과 같은 활동과 각 직장인 선교 등의 토대가 형성되었을까 하는 것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문제는 이 토대 위에서 우리가 새롭게 더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그들의 과오만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지금 사랑의교회 사태나 대형 교회의 문제는 저자가 지적하듯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형 교회의 이슈 중 좀 더 세밀한 부분 하나를 지적하고자 한다. 저자는 홍정길 목사님을 다른 4인방 목사님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별성을 두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비판을 가한다. 한 예로서 홍정길 목사님이 모 방송 매체에서 자신의 목회는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저자의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그 문제는 홍정길 목사님의 반성이기도 하지만 한국교회의 문제를 선배 목회자로서 책임을 감수하고 자신의 죄로 짊어지는 회개로 보아야 한다.

홍정길 목사 비판 부분은 아쉽다

저자는 홍정길 목사님에 대해 분립을 여러 차례 시도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좋은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이찬수 목사님에 대해서는 그의 시도가 참신하고 우호적이라 평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의 비판은 객관적이지 못한 듯싶다(미리 전제할 것은 저자에 대한 비판이 홍정길 목사님이나 이찬수 목사님에 대한 비판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두 분에 대해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고 있고 설교나 목회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있다. 단지 저자의 이 두 분에 대한 비판과 태도에 대한 아쉬움임을 미리 전언하고 이야기한다).

홍정길 목사님에 대한 적절하지 못한 비판은 복음주의 4인방을 비판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교회 규모가 작은 홍정길 목사님을 도매금으로 비판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남서울교회와 남서울은혜교회에 대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비판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단순하게 보았을 때, 홍 목사님을 제외한 나머지 세 교회의 교회 규모는 결코 비슷하지가 않다. 작게는 몇 배, 크게는 10배 전후 정도의 차이가 난다. 물론 수천 명도 대형 교회이긴 하지만 몇 만 명의 교회들과 동일선상에서 취급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더구나 참신하다고 예로 든 분당우리 교회가 10.10.10 운동을 전개하면서 장기적으로 교회를 10개 정도로 분립한다고 했을 때, 10개로 교회를 분립해도 그 규모가 남서울은혜교회 규모보다 조금 작은 규모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분립을 해도 저자가 대형 교회로 치부하는 남서울은혜교회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홍정길 목사님은 남서울교회와 남서울은혜교회를 담임하면서 교회 건물을 짓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남서울교회가 건물 신축을 피하기 위해 모 고등학교 강당을 빌리려는 노력을 수년간 해 오다가 막판에 재벌이 그 학교를 인수하는 문제로 밀알학교를 짓게 되었고, 그 마저도 교회소유가 아니라 단지 수십 년간 학교를 빌려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건물만이 아니라 분립에 있어서도 남서울교회 초창기 때 당시 모 부교역자가 적지 않은 성도를 데리고 교회를 개척할 때도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감수하여 수백 명이 나가는 것을 인정했다. 남서울교회와 남서울은혜교회에서 부교역자들이 평균 수십 명의 교인을 데리고 개척할 때 교인들이 좇아 나갈 것을 장려하고 지원했던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그렇게 개척한 대부분의 교회들은 홍정길 목사님의 본을 따라 대형 교회로 나아가는 것을 피하고 작은 교회를 지향했고 심지어 일부 교회는 교회 분립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일부 목사들은 교회가 너무 커져 가는 모습이 있자 후임을 정하고 다른 곳으로 떠난 목사들도 있다.

그중 여러 교회들과 목회자는 지금 한국 교계에서 건강한 목회를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문제에도 관여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저자가 말하듯 일상의 영성을 실천하고자 힘쓰고 있다. 그런 점에서 홍정길 목사님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일부 받아들일 점은 있지만 지나치게 피상적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비쳐진다.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심도 있게 파고드는 저자가 이 문제만큼은 적절하지 못함은 유감이다. 오히려 긍정적인 부분은 긍정적으로 부각하면서 객관적으로 다루었어야 했다.

4인방 중 한 분인 하용조 목사님의 온누리교회는 타 교회 대학 청년부를 지원하기 위해 본 교회의 대학 청년부원을 일 년 이상 파송했다. 수십 명 또는 백 명이 넘는 인원을 사역자와 더불어 어려운 교회에 보내는 일을 제도적으로 지원했다. 그 교회에 정착하도록 돕는 일을 행하기도 했다. 그러한 방법론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방법에서 발전된 형태가 분당우리교회의 10.10.10 운동에서 있었던 분당의 미자립 또는 연약한 교회에 성도를 일 년간 파송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일에 은연중에 도움을 준 것이 아닐까?

또 학교 강당을 빌려 교회 건축 때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것을 피하는 문제도 주님의교회, 남서울은혜교회, 세대로 회 등의 영향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하지만 이찬수 목사님의 노력을 폄하하거나 낮추자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진실함을 안다. 그분의 겸손과 정직을 안다. 그보다는 저자가 시행착오를 거치며 기존 세대의 목회를 벗어나고자 힘썼던 그들의 분투를 너무 폄하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있다. 많은 문제에도 그들의 수고와 시험지가 있기에 지금의 차세대 목회자들의 새로운 시도와 노력이 싹틀 수 있는 토대가 된 사실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든다.

홍정길 목사님의 지금의 결과는 대형 교회를 피하고자 했던 나름의 노력이 맺은 결과들이고, 이찬수 목사님은 앞에 분들을 토대로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결과들이다. 두 분 다 한국교회에 귀중한 분들이다- 다른 4인방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이다. 선배의 공과를 돌아볼 때 그 뒤를 잇는 분들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고 발전적일 수 있다.

홍정길 목사님이 자신의 목회를 패배라 말한 것처럼 우리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아니 내 자신도 그렇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지적하기엔 내가 얼마나 불량 목사인줄 안다. 비판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일그러지고 고름과 염증 투성이에 악취가 나는 한국교회를 우리 자신이 끌어안고 보듬을 때 진정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책은 귀하다. 한국교회를 돌아보는 값지고 귀한 진단이다. 그리고 저자의 책에 대해 불편한 이야기를 한 것은 내 무지와 오독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이 비판이 저자의 책의 값어치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세우는 것이기를 바란다.

문양호 목사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함께만들어가는교회' 담임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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