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향력을 지녔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순간부터 현대 철학에 빗대어서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의미 있는 과정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유효한 과정일까? 우리가 들뢰즈를 이해하고, 푸코나 니체를 이야기하고 현대 철학적인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기 시작한다면 신앙과 교회는 고쳐지고, 개혁되며 변화, 발전할 것인가.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현대 철학을 공부하는 것과 현대 철학을 기준으로 기독교 신앙을 재정립하는 것. 19세기 이후 유럽 사회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시도했던 방식인데 과연 무엇이 남았던가. 몰트만의 종말론과 희망을 공부하는 것과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사회주의 사상가 에른스트 블로흐가 주장한 역사의 완성과 희망은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에른스트 블로흐만 알아도 충분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던가. 칼 라너와 한스 큉을 공부하는 것과 보편주의적 관점에서 철학함이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그토록 노력했으나 중세와 근대 초기에 뚜렷이 새겨진 기독교적 역사성은 왜 근현대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토록 가얼차게 근본주의와 보수주의 교회를 비판했지만 왜 그들만 살아남는가.

더구나 이 현란한 지적 고뇌에는 사람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가. 지적 고뇌의 결과가 운동이 되고 사람을 살리는 실천이 되고, 혹독한 고난의 현장이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수난 당하신 것처럼 세상이 싫어하며, 세상의 혹독한 탄압을 불러 일으킬 만큼 충격적인가.  절실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부분이다.

아주 오래된 문제가 있다. 사회주의와 기독교. 교황 루트 베네딕토 16세의 말처럼 서구의 지식인들에게 마르크스는 이성의 신이 되었지만 한반도의 복판에서 마르크스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며 현실의 문제이다. 남북 관계. 북한은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남한의 기독교는 그 어떤 단체보다 반공주의적이다.

사회주의는 이념의 근저에서부터 반기독교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했으며 무신론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평화공존을 표방하였던 흐루쇼프조차도 동방정교회에 대해 어마어마한 물리적 탄압을 가했으며 수많은 정교회 성당들이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적 정신과 기독교는 조우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그들 세계의 정신과 직면해야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휴머니즘과 희망, 특별히 김일성에 의해 주창된 북한식 휴머니즘과 희망. 이것들은 무엇이며 기독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기독교는 고난받는 종교. 원수를 용서하는 종교 아닌가.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건 타인을 사랑해야 하며 짓밟히는 순간에도 상대를 위해 용서를 구해야 하는 종교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념을 뛰어넘으며,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궁국의 비책 아닌가. 화해는 필요한가? 화해는 절실히 필요하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사회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을 넘어, 화해의 신학 그 자체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정신에 근거한 실천, 정신에 근거한 운동, 정신에 근거한 집단이 탄생되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전혀 새롭지 않은 주제. 그럼에도 부딪치며 고민하며 해결해야 할 주제. 이 분야에 권위자 홍성현 박사에게 배워야 한다.

기독교인문아카데미,사람ing에서 홍성현 박사를 모셨다. 7월 11일부터 8월 8일까지 매주 월요일 저녁, 장신대 근처에서 ‘맑시스트들의 종교 비판을 넘어, 화해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강의가 열린다. 시간을 내자. 그리고 치열하게 근본적인 대답을 마련해 보자.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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