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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성경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하나님 경험 부재한 설교는 화려한 말로 가득하다
  • 최성수 (sscc1963@hanmail.net)
  • 승인 2016.06.29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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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8장에는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와 만나 세례를 주는 장면이 나온다.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시는 고난받는 종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빌립의 도움으로 내시는 그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된 내용임을 깨닫는다. 이후 세례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에서 빌립의 설명은 일종의 '해석하는 행위'로 본다. 빌립의 설명은 초대교회 시기에 유행했던 기독론적인 해석의 단면을 보여 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구약을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읽었고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이해했다.

그런데 내시와의 만남을 기록한 본문을 읽어 보면, 그 핵심이 단순히 내시의 기독론적인 깨달음을 말하는 데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것이 중요한 동기지만 의미를 깨달음과 동시에 세례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주목하길 바라는 것 같아 보인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내시가 성경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깨닫는 것과 세례를 받는 행위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도록 인도한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문헌을 읽고 이해하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관건은 이 성경을 읽는 우리들에게 본문이 무엇을 겨냥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의미를 깨닫는 자는 자신을 하나님의 행위에 전적으로 내맡길 결심을 하게 된다는 말일까? 한편으론 그렇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 본문에서 우리는가 단순한 깨달음이 아니라 세례를 받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말한 내시의 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내시가 경험한 하나님과의 사건을 주목하자는 말이다.

내시는 세례에 필요한 거룩(회개)의 문제에서 어떤 거리낌도 느끼지 않았다. 이 표현은 그동안 내시에겐 거리낌이 있었다는 점을 전제한다. 고환이 상한 자를 회중에서 배제하는 구약 기록으로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레21:20, 신23:1). 그런데 그 거리낌이 사라졌다고 확신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건을 재정의해 보면 어떨까? 내시는 빌립의 성경 해석을 통해 단지 의미만을 깨닫게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따라서 성경 해석은 단순한 깨달음을 넘어 하나님 경험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한국교회에서는 워낙 당연한 말이라 여겨져 이 문장에 아무 의심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의 '해석학적인 의미'에만 매달리는 신학함(doing-theology) 관행에 의문을 제기한다. 좀 더 명확해지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해보자.

"성경은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텍스트인가, 그래서 해석 혹은 분석으로 독자들이 성경에서 의미를 발견하길 원하는가? 아니면 성경은 의미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겨냥하는 걸까, 그래서 읽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경험을 기대하도록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성경의 의미는 결국 해석이나 분석을 통한 텍스트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의미를 깨닫는 일과 실천을 분리하는 것이 그동안의 해석의 관행에서 오는 결과였다. 그러나 의미를 하나님으로, 의미를 깨닫는 일을 하나님 경험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해석은 깨달음과 실천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실천되지 않는 깨달음은 아직 의미를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의미가 이해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것이라면, 만남은 사건으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 어떻게 성경을 봐야 할까.

주석 해석만 풀어놓은 설교는 부족하다

참고로 과거 불교계에 다소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현응 스님(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의 글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2015년 9월 16일 자 <법보신문>)를 읽어본 적이 있다. 이 글에서 현응 스님은 '이해하는 깨달음'과 '이루는 깨달음'을 구분하면서 그동안 이해하는 깨달음에만 치중했던 불교 수행의 방향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해에만 머물고 깨달음을  현실로 옮기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관행을 비판한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의 요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곧, 그의 비판은 기독교에서 깨달음을 보는 시야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무엇보다 성경은 이해되는 텍스트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게 좋겠다. 오히려 성경은 독자들이 하나님의 행위에 자신을 노출시켜 하나님을 만나길 원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를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이면서 여전히 우리를 하나님 경험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세상을 규정한다. 말씀을 읽는 자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는 진리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도록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현실이 되게 하고, 말씀에 우리 자신을 노출시키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지시고 고치신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다 함은 단순히 성경의 내용을 알고 이해하는 일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만나는 일을 뜻한다. 알고 이해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까지 나아가는 일이다. 도중에 중단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

하나님을 만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은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고 말씀을 사실로 옮겨지도록 한다. 이 일이 자신을 통해 일어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깨달음의 본질이다. 내시는 빌립의 도움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내시의 세례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것이면서 또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뤄진 죄 용서를 현실로 나타내는 일이었다.

성경이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왜 사건을 겨냥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해는 우리의 인지 체계 안에서 일어난다. 이해는 지성 작용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인지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으면 이해가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기억은 이해의 틀이 되고, 또 지성은 텍스트를 기억에 따라 이해하도록 작용한다. 결국 이해 행위는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는 일이다. 과거를 현재화해서 성경을 이해하게 되니, 결국 하나님과 그분의 행위는 늘 나를 이끌고 있고 나는 늘 과거에 매여 있게 된다.

내가 보는 하나님, 내가 아는 하나님, 내가 경험한 하나님, 내가 기대하는 하나님이 이해의 순간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텍스트 이해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행위를 인지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언약을 통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경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왜 보수적이 되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들이 이해하는 성경은 모두 기억 작용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난 사건, 경험이 녹아들기를

그러나 사건은 다르다. 사건은 예기치 않은 일이며, 나의 기억과 기대에 의지하기보다 오히려 언약에 근거해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를 기대하게 하고 또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도록 한다. 사건이 내 기억에 의존해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연출이고 조작이다. 엄밀히 말해서 발생한 사건을 파악하는 일에서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지 체계가 작용하고,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해의 중심에는 나 혹은 나의 기억이 있는데 비해, 사건의 중심에는 나의 기억이 아닌 결코 예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위가 있다.

이 점은 특히 설교를 위한 본문 읽기에서 매우 중요하다. 설교자는 자신을 세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하나님 경험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설교자에게 어떤 말씀이 주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단지 본문 주석을 통해 이해하여 얻은 의미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렇게 얻은 의미는 설교자의 인격이고 설교자의 기억이며 또한 설교자의 생각과 꿈이기 때문이다. 설교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받은 말씀이다.

성경이 보편화되지 않고 오직 교역자에게만 전유되었던 시대에 설교는 성경의 내용을 전하는 것이 곧 설교였다. 성경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지만 신학적인 이해 방식에 낯선 성도들에게는 전문적인 신학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성경의 의미를 해석하여 전해 주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모두가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또 신학 서적이 대중화된 환경에서 성경 구절의 의미를 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게다가 설교자의 이해와 성도들의 이해가 달라지는 경우에 발생하는 해석과 이해의 갈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성경의 내용과 해석된 의미에 매달리는 성도는 성경을 스스로 읽지 않을 때 나타난다. 성경을 스스로 읽는 시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태함이다. 특히 Q.T.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성도들의 성경에 대한 깨달음은 목회자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신학적인 내용일 텐데, 설교자 스스로 신학함을 통해 얻은 것이기보다는 주로 주석에 의지하는 편이니, 결국 차이가 있다면, 주석을 참조하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의 Q.T. 교재는 웬만한 주석에 못지 않은 도움을 수록해 놓고 있다. 결국 설교자와 성도 사이에 성경 이해 수준에서 큰 차이를 갖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설교자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이해한다면, 설교자는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특히 오늘날의 선지자와 설교자를 동일하게 볼 수 없지만, 선지자 전통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선지자는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했다. 들은 말씀을 전한 것이지, 듣지도 않은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 종종 듣지도 않은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들을 가리켜 거짓 선지자라고 하여 차별화 했다. (신18:9~22)

설교자는 본문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의 차원을 넘어, 본문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말씀을 받는 경험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말씀에 관한 생각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받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것을 직접 계시로 오해하면 안 될 것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말할 뿐이다. 이 경험을 위해 치열한 영적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모든 성경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행위를 증거한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성경 안에서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성경 저자들이 만난 하나님, 그 하나님을 오늘 우리가 먼저 만나는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받아들인 말씀을 공감적이면서 설득력 있게 전하는 일, 바로 이것이 설교라고 생각한다.

   
▲ 설교에는 주석 해석 대신 설교자가 만난 하나님과의 경험이 들어가야 한다.

공감 없는 설교,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날 예배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점은 감동이 없다는 거다. 한편으로는 예배에 필요한 스토리텔링이 없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설교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감동이 공감에서 온다면, 공감의 부재를 현저하게 느끼게 하는 부분은 설교다. 물론 찬양에서 세대 간의 차이 때문에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기도 역시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기복적인 내용 때문에 공감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공감의 결여를 느끼게 하는 것은 설교다. 설교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점은 신학의 부재와 묵상인 것 같다. 신학의 부재라 함은 한편으로는 신학적인 이해 과정을 생략했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그분의 행위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묵상의 부재는 한편으로는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콘텍스트와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말씀과 설교자 자신과의 관계에서 깊이 생각해 보는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는 말이다.

신학과 묵상의 부재를 지적하는 말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부분은 설교자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 경험의 부재다. 따라서 나는 설교의 가장 큰 문제로 설교자에게서 하나님 경험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단지 주석에 따른 의미 발견이나 개인적인 관계에서 그 의미를 해석하여 수용하는 것으로만 가득찬 설교는 현대판 영지주의적인 기독교를 양산할 뿐이다. 설교자에게는 말씀에 관한 생각이나 사상이 아니라 말씀 자체와 만나는 경험이 필요하다. 설교자는 본문이 증거 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전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에게 전권을 위임 받은 설교자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지도 않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선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하나님 경험이 부재한 설교에는 인간의 화려한 말로 가득하다.

처음으로 돌아가 결론을 맺는다면, 성경은 단지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결코 제한되지 않는다. 설교자의 성경 읽기는 말씀에 관한 해석된 의미가 아니라 말씀 자체와 직면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설교자가 하나님을 경험하길 원한다. 굳이 의미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독자의 하나님 경험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무엇을 행하시는지에 주목함으로써 그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말한다. 성령을 통해 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한 치열한 영적 수고를 통해 일어나는 이 경험을 통해 설교 본문은 하나님이 먼저 설교자에게 주신 말씀으로 작용하며, 그 말씀을 성도들에게 힘 있게 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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