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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감정 해소'는 교회의 사명
동성애, 이슬람 반대 집회보다 진정한 공동체의 회복이 우선
  • 황준배 (jun77291@naver.com)
  • 승인 2016.06.2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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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2)

인디언 속담 중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개인보다는 팀이 더 유능하고 강하다. 그만큼 공동체 의식은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지역감정의 심화, 지역 간 불균형과 지역 차별은 심각하다 못해 현실적으로도 암울한 상황이다.

지역감정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특정한 지역에 살고 있거나 그 지역 출신인 사람들에게 다른 지역 사람들이 갖는 좋지 않은 생각이나 편견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 사회적 병리 현상을 '지역감정 신드롬(regional antagonism syndrome)'이라고 명명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지역감정'의 본질은 1차적으로 지역 격차나 차별이고, 2차적인 현상적 반응으로 해석한다. 아무튼 지역감정의 기원이나 그 진행 방향, 그 결과나 현상은 기존 연구로도 충분하다. 다행히 최근에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지역적 구도가 완화되는, 다소나마 진일보한 결과들이 나오기를 기대하지만 이는 요원한 길이다.

지역감정이나 차별은 사악함과 구조적 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경의 진리나 가치에 반하는 행태이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지역주의 또는 이념의 우상화나 절대화에서 오는 세속주의의 영향력을 극복해야 한다. 지역감정, 지역 차별 철폐는 교회의 자기 존재 증명과 시대적 사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도 그 당시 지역 차별의 피해자였다. 나다나엘은 예수의 등장에 대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있느냐"(요 1:46)고 출신 지역을 폄훼한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지향’이라는 거대한 구도 안에서, 지역적 편견과 차별을 무력화하시거나 적극적으로 이를 타파하고 극복했다. 그 당시 차별과 소외 지역이었고, 이방인이라 취급을 받았던 갈릴리 사역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정통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통혼으로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지 못한 그들을 개에 비유하며 극단적으로 정체성을 표현했던 '사마리아'에서도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이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유대 땅에서 이방인과 같은 개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 말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파격이다.

누가 형제이고, 자매인가? 예수는 분명하게 말했다. 단순히 인간적인 혈연, 지연으로 얽혀있는 관계가 아닌 믿음 안에서의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의 뜻,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 예수의 사랑으로 맺어진 온전한 관계가 바로 형제, 자매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 12:46-50)

구약의 여호수아는 자신의 출신 성분과 지역을 초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모세를 통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대한 언약이 성취되었다. 야곱의 생애를 마감할 시점에 특별한 복을 받은 지파는 유다(창 49:10)와 에브라임(창 49:24), 이 두 개의 지파이다. 여호수아는 요셉의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의 후손이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착 시, 각 12지파별로 "기업을  제비 뽑아"(수 14:2)서 분배한다.

레위 지파는 제사장 역할과 성전 봉사로 각 지파가 드리는 봉헌물과 십일조로 살아가게 된다(민 18:21). 특이한 점은 기존 가나안 족속들이 잔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미리 배분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이고, 이처럼 분배의 원칙은 믿음과 공동체의 원리를 따라 행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때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에 불만(수 17:14)이 있었다. 유다 지파의 기업이 에브라임 지파보다 편중되어 있다는 점(수 15:1-12, 16:1-10)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단호했다. 그들에게 별도의 혜택을 부여하지 않았다(수 17:16-18). 교만하고 시기심이 많은 에브라임 사람들(삿 12:1-6)에게 더 어려운 조건의 땅을 개척하라고 선언한 것이다.

사무엘 선지자의 '미스바' 기도는 외국의 침략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 회개와 금식, 영적 갱신, 민족 단일화 운동이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신앙으로 통합했다. 말씀과 하나님과의 영적 회복, 제의 회복, 영적인 교통과 관계 회복으로 민족 공동체가 바로 서게 되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특정 대상의 사람을 구분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전한다. 그는 복음 안에서 크게 세 범주의 차별과 대립의 해체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유대인 대 이방인(헬라인), 자유인 대 노예, 그리고 남자 대 여자이다. 현실적인 적용에서도 당연히 민족공동체에서 차별을 극복해야 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한국 사회에서 지역감정은 해결해야 하는 문제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는 지역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입장이다. 남한과 북한의 통일을 생각한다면 자연스럽게 지역감정을 초월하게 된다. 그리고 마인드나 성품 자체가 분열보다는 통합과 연합을 좋아하고 지향하는 편이다.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인, 문화적, 감정적, 정서상의 대립이다. 크리스천들이나 목회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1:22)

특정한 개인이 지역감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은 사람들의 출신지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왜곡된 마음이 잠재되어 있다면 내가 아무리 호의를 베풀어도 원만한 대인 관계나 인격적인 관계, 중요한 사역이나 일을 함께하기에 장애물이 될 수가 있다. 이것은 사회적 리스크로 막대한 손실 비용이다. 국민 통합이나 정치 질서는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사회심리적으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잠 21:2-4)

굳이 정치적, 경제적 차별의 수치나 통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다수의 국민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다. 각 분야에서의 진급이나 인사권, 예산 편성권, 대기업 임원진 분포, 언론사의 핵심 인사들, 각종 특권이나 혜택이 특정 지역 중심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 3:5)

리더십의 중요한 원리 중 하나는 이슈 선점이다.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왕, 제사장, 선지자적 사명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정치권이 이 문제에 대해서 앞서간다는 것이 성경을 믿는 자들의 아이러니이다. 심지어는 교회나 목회자들도 대부분이 자신이 위치하거나 기반한 지역으로 정치적 지지나 판단을 우선시한다.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더 편견을 갖고 있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한마디로 성경적 가치나 권위보다 출신지나 지역구도가 우위이고, 의식과 행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목회자들이나 교회의 정치적 지지나 성향으로도 지역구도의 행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설교에서나 글이나 행동에서 소외 지역이나 차별 지역에 대한 자기 포기나 배려, 사랑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렘 17:5)

소외와 지역 차별 타파와 국가 공동체의 화합, 이 일을 바로 한국교회와 기독교 연합 단체가 나서야 한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한 화해자, 조정자의 역할이다. 이는 성경적 가치와 믿음의 신실한 신앙 고백적 행위와 결단이다. 남, 남간의 갈등해결, 남북한과의 통일문제에서도 하나님 안에서의 영적으로 수직인 화해자의 역할, 수평적인 양극화 해소의 역할 감당이 곧 전도와 선교의 대안이 될 것이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지역 차별 극복, 한국교회와 기독교 연합 단체가 나서야

오늘날도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테러나 폭력, 국가 내에서의 살인이나 폭력성은 역사가 깊다. 창세기 4장에는 인간의 근원적 폭력성, 시기와 질투의 DNA를 보여 준다. 아담과 하와의 자녀는 가인과 아벨이었다.

농사꾼 가인은 양치는 동생 아벨을 죽인다. 자기를 부정하는 모든 타자를 제거하려는 인간의 심리가 드러난다. 가인이 아벨을 들로 유인해서 돌로 쳐 죽이게 된다. 자기의지와 욕망으로 인해 내면의 잔인한 폭력성이 일순간에 본능처럼 폭발했다. 결국에는 잠재된 폭력성이 자신의 의지와 존재를 압도해 버린 것이다.

가인은 도피해서 유리하는 신세가 되어 에덴의 동쪽으로 가서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였다"(창 4:17). 그는 성을 쌓았고, 그의 후예들은 무기를 제작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악기를 제작하여 음악과 향응으로 타락한 문화를 즐겼다.

이렇게 아담과 하와는 두 아들을 모두 떠나보내게 되었다. 하나님은 셋이라는 또 한 아들을 주셔서 믿음의 대를 잇게 했다. 셋의 후예들은 죄를 회개하고 나름대로 말씀에 따라 제단을 쌓으며 생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셋의 후손)과 사람의 딸(가인의 후손) 사이에 교제와 통혼이 있게 되자 셋의 후손이 타락하게 되고, 모든 인류가 타락하게 된다.

힘을 의지하는 가인의 후손들과 동화되어 갔고, 음란성과 폭력성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하나님은 노아의 때에 그 세대들을 멸망시키려고 홍수심판을 작정, 당신의 영을 거두신다.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이자 셋의 9대손이다. 이것이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함이 잘 드러난 성경의 기록이다.

우리가 믿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와 사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긴 부활과 화해의 사건이다. 신앙은 우리의 화평이 되시고(엡 2:14), '하나님과 화목'(엡 2:16)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신앙이다.

모든 사람은 이 그리스도의 화해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에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들이 자동적으로 화해에 참여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해의 은총, 이를 거부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저주 가운데 거하게 되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교회 공동체를 한 지체로 표현한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6-27)

하나님의 평화는 생명을 억압하는 힘에 기초하지 않고 정의로운 통치에 기초한다. 그래서 차별과 억압은 성경의 가치가 아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고 원수 된 존재였다. 화평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예수로 인해서 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화평을 이루게 되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6)

   
▲ 성경은 연합 대신 편을 가르는 것에 대해 죄악시한다.

죄 성이 있는 옛사람이 그리스도로 인해 죄 사함 받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연합을 이룬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엡 1:10)이 성경의 가치이다.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지체들이 차별이 없어야 한다.

사회과학적 관점으로 엄밀히 조명하자면 '지역감정'이라는 말은 옳지 않은 표현이다. 이 말은 동등한 대상에 대한 규정과 표현이다. 명확하게 정리하자면 '영남 패권주의와 이에 저항하고 항거하는 호남의 집단적 대응 의식'이라고 규정해야 한다.

영남의 장기간의 군부독재 세력, 전국의 경제적, 문화와 교육의 지역 차별, 5·18광주 민주화 운동, 부·마 민주화 운동의 실체가 이를 증명한다. 국가 안에도 식민지 형태의 차별과 억압이 존재한다. 영남 지역도 지역감정의 포로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스스로 깨어나서 벗어나야 한다.

현재 영남 지역의 경제도 과거에 비해서 못 미친다고 하나, 객관적 지표나 통계상, 영남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지역이 영남 중심의 경제적 특혜나 발전상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기회의 차별이지 결과의 차별이 아니다. 한국을 8도라고 하는데, 영남을 제외한 '7도 연합'이 태동해야 할 정도로 나머지 지역 간 정치, 경제, 언론, 사회, 문화적 차별이 극심한 것이 현실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 3:15)

크리스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와 능력을 믿어야 한다. 교회가 먼저 이러한 문제의 실체를 알고, 교회 공동체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예언자적 사명을 갖고 선포해야 한다. 정치 리더들에게도 권면해야 한다.

교회 내 성도들에게도 설교나 책을 통해서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용서와 화해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 일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 교회가 이 사명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 받길 기대한다.

교회에서 예배를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한정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의 연속이라는 것이 성경의 적용이다. 신앙생활에서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영적, 재정적 관계를 세워가는 과정이다. 형제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예물을 드리기 전에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에게 먼저 사과하고 용서를 청해서 화해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영호남민들 모두가 피해자들

사실 알고 보면 영호남민들 모두가 피해자들이라 할 수 있다. 호남이나 모든 지역에 대한 폄훼는 영적, 정치, 사회적 죄악이다. 먼저 영적으로도 건강치 못한 현상이다. 정치적으로는 소수 불의한 세력이 만든 지배체제 유지 구도에 이용당한 것이다. 독재자들의 통치 수법 중에는 "갈라놓고 지배하라"는 말이 있다.

성경적으로 조명하자면 교회가 이를 풀 수 있는 화해와 치유의 메신저와 대안이다. 숱한 외침을 받은 한반도의 모든 영혼들도 포함될 것이다. 각 지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호남 사람들은 산업화 시절에는 경제 발전의 소외로 인해서 현대판 유대인들처럼 고향을 떠나기도 했다. 차별과 억압을 받은 내면의 상처가 존재한다.

교회만이 치유의 역할을 감당할 유일한 공동체인지도 모른다. 소외되고 차별받은 모든 지역 사람들도 이러한 아픔이 치유되고 승화된다면, 각 분야에서 더욱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리라 생각한다.

영남 지역도 일부 영남패권주의나 스스로 지역감정의 굴레와 자기모순에서 이를 자각하고, 영적인 묶임으로부터 풀려나야 한다. 모든 '잡혀 있는 자', '흑암에 있는 자'는 구속받아야 할 자들이다. 공동체의 온전한 치유는 영, 혼, 육의 전인적 치유이다. 현대 학문에서 '치유'의 개념도 내면이나 외적인 치유만을 말하지 않는다. 개인을 둘러싼 모든 사회, 국가 환경까지도 포함한다.

건강하고 지킬만한 국가 공동체가 되었을 때, 모든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자긍심과 소속감을 갖게 되고 전 국민이 평화와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 정치적 대결이나 서로 저주에 가까운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진영 논리, 인터넷에서의 극한 용어들을 보면 암담하고 암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동서남북 화해의 사명은 이 시대 크리스천들의 준엄한 책무이자 사명이라 생각한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요일 2:10-11)

주님의 교회가 참된 것은 그 지체들의 공로나 자질이 아니라 그가 베푸시는 은혜로 말미암는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의가 완전하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단지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선언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진정한 크리스천들의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부터 교회는 유기적인 조직으로서 통일과 일치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고 연결되고 결합되는 것이 교회이다.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 한 분이신 하나님"(엡 4:6)께서 이미 이루어 가시고 있다. 하나님나라는 진행 중인 시제에 있기 때문이다.

동서 간의 소모적인 지역감정은 국가적으로 감정 에너지의 소모적인 행위이고 낭비이다. 국력 낭비이다. 국가적으로 경제적으로도 손실 비용이 발생한다. 미움이나 적대감정은 불신이고 신앙에 반하는 생각이나 태도이다. 남북한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큰 지역감정, 증오와 적개심이 존재하는 지역은 남한과 북한이다.

지체가 아프면 한반도가 몸살을 앓는다. 한반도가 지치고 아프다. 동서남북의 치유와 회복, 화합과 통일은 민족의 아픔과 상처의 치유이며 건강한 민족공동체의 부활이다. 또한 평화통일과 북한 복음화는 하나님나라의 지상적 실현이다.

   
▲ 크리스천은 성경이 말하는 '평화'의 길을 가야 한다. 

'평화 만드는'(peace-makers) 사람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the children of God.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s)'의 또 다른 번역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자'이다. 우리는 평화를 파괴하는 사람인가, 평화를 즐기는 사람인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가, 평화를 지키는 사람인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크리스천들의 올바른 정체성은 교회 공동체는 물론이고 세상 가운데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평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할 길. 그 길밖에 없다. 그 길은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들과의 평화이다.

시편 107편은 자기 백성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동서남북' 사방에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시는 여호와께 감사하는 시이다. 이스라엘의 분단과 멸망을 거쳐서, 외국의 포로로부터 해방되고 구속받은 모습을 표현한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가 되어 살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 후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과 주의 백성들과의 연합은 은혜이다. 분리나 파멸은 징계나 저주이다.

사단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분리시킨다. 교회 공동체는 한 형제, 자매라는 사랑과 은혜 공동체라는 기본적 가치와 속성을 갖고 있다. 우리의 신앙 지침은 성경이 기준이다. 자신의 자아나 패권주의, 특정 집단의식이 아니다. 이것은 허탄한 마음이다.

"참된 은혜는 약한 경우라도, 거짓 은혜가 가장 강력할 때보다 더 강한 법이다." - 윌리엄 거널

국가 안보도 지킬만한 가치가 있고 소속감이나 유대감이 강할 때 애국심도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어떤 가치나 목적에 반대하는 네거티브 방식에는 다수의 의지와 행동을 결집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5·18 민주 항쟁 기념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합창과과 제창을 두고 행정부는 국민 다수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다수 의견(리얼미터 여론조사,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55.2%, 반대 26.2%)은 제창이다. 프랑스 대혁명 때 마르세이유 의용군(의병, 데모대)들이 불렀던 노래가, 지금의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이즈’가 되었다. 프랑스는 이 노래에 긍지를 느낀다.

노래는 그 시대 대중들의 정서와 역사적 산물이다. 노래는 그 정신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전파하는 것이다. 이미 광주의 정신은 한국을 넘어서 세계적인 가치와 빛이 되었다. 민주, 인권, 평화, 이 중에 무엇인 문제인가.

미국의 문필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에드워드 애비는 "애국자는 정부에 맞서 자신의 나라를 지킬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유민주주의, 인권과 평등의 가치가 들꽃처럼 만발할 때 그 가치와 효용이 극대화 된다. 그 결과 전체주의나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그 ‘자유와 민주’라는 지상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다하는 것이 국민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이것이 공산주의를 이기는 지름길이자, 사상전의 강력한 토대이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성경과 삼위하나님은 진정으로 믿고 따르고 섬기지만, 잘못되고 불의한 목회자나 타락하고 병든 교회를 목숨을 다해서 자원해서 섬길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동성애나 이슬람 문제도 중요한 이슈이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의 존재 의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0)

한국교회에 동성애, 이슬람 반대에 열을 내고 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반대하는 것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저급한 논리이다. 임기응변이나 일시적 이슈나 방편에 불과하거나 그칠 수 있다. 보다 더 중요한 동기부여는 무언가 지킬만한 확고한 명분과 고귀한 가치가 있을 때 한 공동체에 소속된 구성원들은 이를 지켜내게 되어있고, 그리하게 된다. 그것이 작은 공동체이든, 국가이든 교회이든지 마찬가지이다.

성경에는 모순과 부조리한 사회적, 영적, 현실적 차원의 대안이 있다. 성경 진리에 거슬리는 지역감정이나 차별은 제거되어야 할 신앙적 죄악이다. 이는 교회 내부적으로는 우상숭배의 형태이고, 국가적으로는 국민 화합과 통합과 발전을 저해하는 암적인 요소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지금이 바로 주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할 때이다(눅 4:19). 이 희년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가 왔다.

황준배 / 목사이자 <통일과 크리스천 리더십>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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