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연이는 모두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사진 제공 윤경희)

"우리 반 아이들 잘 있겠죠? 선상에 있는 애들이 무척이나 걱정됩니다. 진심입니다. 부디 한 명도 빠짐없이 안전하게 갔다 올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 41분. 20초 짧은 영상에서 시연이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배는 이미 90도 이상 기울었다. 시연이 친구 예진이는 구명조끼를 입고 바닥에 등을 붙인 채 긴장한 듯 미동도 하지 않는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친구들을 걱정하며 올렸던 기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영상을 기억할 것이다. 시연이의 기도는 많은 사람을 울렸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충격이 컸다.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배 안에서 기도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 기도를 실제 육성으로 들으니 뭐라 말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그 기도는 들어줘야 하지 않나. 교회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시연이 엄마 윤경희 씨를 안산에서 만났다. 윤 씨는 참사 이후 지금까지 416가족협의회 대외협력분과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교민들 요청으로 가족협의회 예은 아빠 유경근 집행위원장, 416연대 사람들과 함께 유럽에 다녀왔다. 보름 동안 교민과 현지인을 만나 간담회를 열고 피케팅을 했다.

윤경희 씨와 1시간여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유럽에서 경험하고 느꼈던 일과 시연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연이 이야기를 할 때 엄마는 휴대폰으로 시연이 사진을 보여 주며 딸 자랑을 했다. 아주 평범한 엄마의 아주 평범한 자식 자랑. 하지만 이제 딸은 사진 속에만 존재한다.

▲ 시연 엄마 윤경희 씨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귤의 요정 깨박 시연

시연이는 '야! 이 돼지야'라는 곡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음악을 좋아했던 시연이는 친구와 있었던 일을 소재로 곡을 만들었다. 기타를 들고 자작곡을 노래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겼다. 이 영상을 가지고 장영승 대표(서촌갤러리)와 윤일상 작곡가가 시연이 목소리에 음악을 덧입혔다. 노래는 2014년 9월 정식 음원으로 출시됐다.

"아빠가 집에서 기타를 치니까 아이들한테도 영향이 있었나 봐요. 시연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아빠한테 기타를 배웠어요.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학원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미디 음악을 시작했어요. 1학년 때 연극부 음향감독을 하더니 2학년 때는 연극부장을 했어요. 집에서 작업할 때는 꼭 헤드폰을 끼고 했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멋졌는지 몰라요."

시연이는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엄마가 어렸을 적 사 준 물개 인형을 좋아했다. 이름을 '깨박이'라고 지었는데, 어느 새 자기 별명이 깨박이가 됐다. 중학생 때부터 '깨박이'라고 쓰인 목걸이를 하고 다녔다. 귤을 너무 좋아해서 친구들은 시연이를 '귤의 요정 깨박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시연이 침대 사진을 보여 주며 "항상 이렇게 깨박이랑 흰둥이(인형), 귤이 있어야 해요"라고 말했다.

어디 하나 빼 놓을 데 없는 아이였다. 친구도 많아서 초등학생 때부터 서너 명이 아니라 여덟아홉 명씩 집으로 데려왔다. 시연이 방은 그 자체가 친구들이 쓴 '방명록'이다. 벽이 친구들 메시지로 가득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금구모(금쪽 같은 9반 모임)'라는 이름으로 같은 반 친구 13명이 무리 지어 다녔다. 공부도 잘했다. 초등학교, 중학교까지는 반장을 도맡았다.

▲ 154cm에 38kg. 시연이는 작은 체구였지만 중학교 때까지 반장을 도맡았고, 고등학교 때는 연극부 음향감독과 부장을 했다. (사진 제공 윤경희)

"시연이 가고 나서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정말 힘들어했어요. 시연이 친구들은 '김시연 미안하고 사랑해'라고 피켓을 만들어 광화문에서 들곤 했어요. 시연이를 딸처럼 생각했던 선생님은 새벽에 시연이 보러 와서 한두 시간 울고 가고…."

시연이는 어려서부터 엄마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놀러 다니면서 좀 뜸해지긴 했지만, 고등학교에서는 크리스천 친구들과 수요일마다 기도 모임을 하기도 했다. 2014년 4월 첫 주 수요일, 시연이의 기도 제목은 이랬다. "지금처럼만 행복하게 해 주세요." 엄마는 그래도 시연이가 생전에 행복을 느껴 다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딸의 기도를 왜 들어주지 않았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저도 지금 계속 교회를 가긴 하는데, 솔직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해가 안 가요. 교회 가는 다른 이유는 없어요. 시연이가 하나님 곁에 있을 거니까, 우리 시연이 잘 부탁드린다고 기도하러 가는 거예요."

▲ 시연이는 수학여행 전, 꾸미려고 하기보다 수학여행 때 할 공연을 위해 음악 작업에 몰두했다고 한다. (사진 제공 윤경희)

여러 참사 유가족들 만나니

윤경희 씨는 5월 3일부터 15일간 416가족협의회 대외협력분과 팀장으로 유럽에 다녀왔다. 유경근 집행위원장과 416연대에서 2명이 동행했다. 해외에서는 1주기 때보다 2주기 때 세월호를 기억하는 행사가 더 많았다. 유가족을 초청하고자 하는 교민도 2주기를 전후해 더 많아졌고, 일정을 맞추어 5월에 가게 됐다.

독일·바티칸·이탈리아·벨기에·영국·프랑스 6개국 뮌헨·보훔·베를린·로마·브뤼셀·런던·리버풀·파리 8개 도시를 방문했다. 각 도시에 방문할 때마다 광장에서 피켓을 들었다. 교민들이 하나둘씩 몰렸고, 세월호를 잘 모를 것 같았던 현지인들도 관심을 가지고 물어봐 주었다. 교민들의 도움으로 교회나 대학 등에서 간담회를 열었다.

"도시마다 인상적인 일들이 있었어요. 특히 독일 보훔에서의 일이 기억에 남아요. 보훔은 광산 도시로 1970년대 한국에서 독일로 간 광부·간호사들이 많이 살았던 곳인데요. 교민 분들이 나이가 많으시고 동네가 조용했어요. 저희를 초청한 분들도 계속 '동네가 이래서 간담회 때 사람이 별로 안 올 것 같다'고 걱정하셨어요. 막상 도시에 도착하니 정말 적막해서 저도 걱정이 되더라고요.

아무도 없는 광장에서 피켓을 들었어요. 그런데 정말 거짓말처럼 한두 명씩 사람이 모이는 거예요. 나중에는 50여 명이 모여서 같이 피켓을 들고 노래도 불러 줬어요. 프랑크푸르트에서 김밥·과일 이런 거 싸 가지고 오신 분도 계시고요. 간담회에도 몇 명 오겠나 싶었는데 150명 정도가 왔어요. 백남기 씨 딸 백민주화 씨도 네덜란드에서 저희를 만나러 오셨어요. 저희와 나란히 앉아서 간담회도 했죠.

이탈리아에서도 특별한 일이 있었어요. 교황님께 알리려고 바티칸 광장에서 열리는 미사에 가기로 했어요. 좋은 자리를 맡으려고 2시간 전에 광장에 도착했어요. 피켓을 들어도 되나 싶어서 현수막을 몸에 감싸고 피켓을 반으로 접어서 들고 그랬어요. 저희가 현수막을 드니까 옆에 선 사람들과 약간 마찰이 있었어요.

그들은 슬로바키아에서 온 사람들이었어요. 그중 한 명이 현수막을 보면서 묻더라고요, 이게 뭐냐고. 세월호라고 하니까 한 명이 알아 들어요. 유가족이라고 하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현수막을 들어 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현수막을 들면 교황님 보기가 어렵거든요. 그 사람들도 멀리서 교황님 얼굴 한 번 보러 왔는데, 그 기회를 저희를 위해 포기한다는 게 너무 고마웠어요."

▲ 시연이는 귤과 노란색을 좋아했다. 엄마는 시연이를 시연이답게 보내 주기 위해 노란 국화를 준비했다. (사진 제공 윤경희)

유럽 여러 나라에서 벌어진 참사 관계자들을 만나는 일정도 있었다. 독일에서는 에스토니아호 참사(1994년) 유가족들을, 영국에서는 힐스버러 참사(1989년) 유가족들을, 프랑스에서는 파리 테러(2015년) 생존자를 만났다.

"힐스버러 참사 유가족을 만나러 갔을 때였어요. 저희가 만난 어머니는 그때 10대였던 딸 두 명을 잃으셨어요. 눈앞에서 딸들이 압사당하는 걸 본 거죠. 어떤 남성 분은 눈을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아, 희생자 아버지신가 보다.' 역시나 맞더라고요. 이런 분들이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저희를 격려해 주셨어요.

프랑스는 재난 관리 시스템이 정말 잘되어 있더라고요. 아예 참사 유가족과 정부 인사가 함께 조직된 단체가 있어요. 재난이 발생하면 피해자가 피해자의 마음을 가장 잘 안다고 해서 바로 그쪽으로 연결되는 거예요. 거기에는 장관급 고위 공직자가 있고, 수사권·기소권이 다 부여돼 있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부러웠어요. 우리는 그거 때문에 그렇게 투쟁을 했는데…. 부럽다고 얘기했더니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우리도 20년 전에는 당신들과 같았다. 그런데 열차 사고로 자식을 잃은 한 아버지가 당신들처럼 싸웠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지금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 시연이네는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을 '엄마의 날'로 정했다. 그날은 엄마와 두 딸이 오롯이 시간을 보내는 날이었다. (사진 제공 윤경희)

유럽에 있는 동안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일정 때문에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도 해외에서 이렇게 세월호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힘이 났다. 간담회 때도 오히려 한국보다 더 날카로운 질문이 나왔다. 타향살이하면서도 세월호에 대해 꾸준히 검색하고 알아본 것이다. 교민들은 한국에 있는 봉사자들처럼 세월호를 마치 자기 일같이 생각하고 행동했다.

"정말 대단한 분들이죠. 저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나는 40년간 뭐하고 살았나…. 부끄러웠어요. 한국이나 해외에서 여러 참사가 벌어졌을 때 금방 잊어버리고 전혀 관심도 안 가지고 살았어요. 저는 제 아이, 제 가족만 생각하고 살았거든요. 제 아이에게 벌어진 일이 아니었으면 아마 지금도 신경 쓰지 않고 살았을 거예요.

제가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서 시연이가 이런 일을 당한 건가라는 생각을 그동안 많이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금구모 아이들. 인천 여객선 터미널에서 찍은 사진. (사진 제공 윤경희)

공부하는 이유

윤경희 씨는 지금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있다. 2012년, 시연이가 중학교 3학년 때 엄마도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엄마는 대학을 졸업하고 시연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함께 유럽 여행을 가자고 약속했다. "정말 좋아했었는데…."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시연이가 가고 둘째 딸과 함께 안산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한 캠프에 참석한 적이 있었어요.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여러 활동을 했어요. 그런 분들이 참 대단해 보이더라고요. 마치 자기 일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기 실력으로 도움을 주는 게.

거기 다녀온 후에 수학지도사 과정에 등록해서 자격증을 땄어요. 제가 수학을 좋아하거든요. 사실 대학 공부도 노후 대비로 시작한 건데 이제 목표가 바뀌었죠. 제가 받은 만큼, 제가 할 수 있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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