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관련 글을 접하면서, 심도 있는 토론에 필요할 것 같아 '예배'를 주제로, 다음 네 개의 글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 필자 주

1. 주일예배는 목회자 영성과 자질 드러나는 시간
2. 예배 의식의 내연적인 의미
3. 교회와 예배
4. 예배란 무엇인가

공예배는 교회의 의식 행위다. 상징과 상징 행위로 가득하다. 달리 말해, 교회의 예배는 구속사적 스토리텔링을 구성하는 상징과 상징 행위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과정을 재현하는 의식이다. 하나님과 소통이 실제로 이뤄졌는지는 오직 생각과 삶의 변화로만 알 수 있다. 성도들은 다만 변화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예배에 참석할 뿐이다.

기대가 현실이 되는 조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예배에서 사용되는 상징과 상징 행위들을 숙지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예배 의식의 의미 작용을 이해하는 일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예배 순서는 구속사적인 스토리텔링을 이끌어 가는 매개면서 상징이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것은 예배 본질과 예배 의식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예배는 하나님의 현존을 전제하는데, 정작 예배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혹은 예배에 참여하면서 무엇을 기대해도 되는지를 말할 수 있는 성도는 얼마나 될까. 상징을 매개로 이뤄지는 일이기에 예배하는 성도로서 마땅히 상징의 의미에 관해 숙지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회 교육과정에서 간과되고 있다.

예배를 위한 교육이 없지 않으나, 주로 예배자의 자세 및 예배의 신학적인 의미만을 강조할 뿐이다. 예컨대 예배가 이런 것이니, 예배하는 자가 마땅히 이런저런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식이다. 예배의 신학은 예배자 윤리로 곧잘 탈바꿈한다.

성도들은 예배에 참여하면서 진행되는 순서를 따라간다. 각각의 순서가 갖는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관심이 가는 순서만 중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런 까닭에 설교만을 중시하거나 찬양만 중시하는 해프닝이 생긴다. 궁극적으로 예배 교육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이고, 이를 간과한 교회 교육이 책임져야 할 일이다. 교육의 책임을 지고 있는 교역자의 신학적인 자질 문제이기도 하다.

예배 의식과 관련해 예배 순서가 갖는 의미 작용과 예배 안에 함의된 신학적인 주제들, 그리고 그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지면 관계상 이곳에서는 간단하게만 언급하겠다. 한국교회는 교단이 있어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개교회주의를 추구한다. 따라서 교회마다 다른 예배 의식을 갖고 있다.

개신교회는 왜 주일예배를 특별하게 생각할까?

예전으로 교회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막스 베버(Max Weber)가 실천한 종교사회학적 연구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교회 상황에서는 그런 연구가 가능하지 않다. 교회별로 다르고 많은 것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곳에서 가능한 한 많은 교회 예배에서 공통적이라 여겨지는 순서만 다루겠다.

대표적인 것으로 예배로의 부름, 송영, 참회의 기도, 사도신경, 교독문, 기도 인도(소위 대표 기도), 찬양, 설교, 성례(성찬 및 세례), 헌금, 광고, 축도 등이 있다. 현상적으로 볼 때 주일예배는 주일 오후나 저녁 예배 및 다른 날의 예배와 확연히 구분된다. 주일예배 외 예배는 대체로 약식 형태를 갖추고 있다. 예배신학적인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다른 예배보다 주일 오전 예배를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현상이다.

같은 예배임에도 주일 오전 예배가 주일 오후 예배, 수요 예배(혹은 수요 기도회), 금요 기도회, 구역 예배, 새벽 기도회 등에 비해 훨씬 중시되는 것 같은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참고로 가톨릭교회 주일미사와 다른 날 미사를 비교해 보면, 순서에서 그렇게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미사 종류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나타날 뿐이다.

다음에 이어질 예배 순서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기독교에서 일요일(주일) 오전 예배를 특별히 여기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기독교가 다른 날보다 일요일을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안식일 계명과 관련 있다. 일요일을 '주(主)의 날'을 의미하는 '주일'(主日)로 여기는 태도에 잘 나타나 있다. 구약 안식일 규정을 더 이상 지키지 않는다 해도 안식일 정신을 유지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도와 성도 들이 일요일에 모인 까닭이 유대교와 차별화를 선언하기 위한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다만 그렇게 추정될 뿐이다. 오랫동안 유대교 전통에 익숙해 있던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차별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으로써 유대인들에게는 첫 번째 계명을 위반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미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유대 공동체로부터 배척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자들은 굳이 일요일 모임으로 유대교와 차별화할 필요가 없었다. 안식일 정신이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미 신앙 때문에 이뤄진 차별화를 현실적인 필요로 일요일에 모이게 되면서 '주일' 전통으로 굳어졌다고 본다.

일요일 모임의 필요성은 다른 맥락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요일이 당시 태양신 제사를 위해 유일하게 쉬는 날이기도 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기도 해서 성도들은 부활을 기념하며 이날 모여 복음을 소통하고 성찬을 거행하였다. 사도와 성도 들이 모일 수 있는 시간과 장소에 모여 복음을 소통하고 성찬을 거행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회당 모임이 어려워져서 다른 장소가 필요했으며, 그들이 그만큼 정기 모임 자체를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대부분 가정에서 모였지만, 박해받는 동안에도 성도들은 지하로 들어가 교회 모임과 신앙 행위를 계속 이어 나갔다. 만일 주일 모임을 불필요하게 여겼고, 다만 일상의 삶만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박해 중 위험을 감수하고 모일 이유는 없었다. 어떤 이유든 그들은 모임이 필요했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이다. 예수 부활을 기념하려고 모이는 행위는 장차 있을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결국 '주의 날'은 종말론적으로 확장되어 이해되었다.

이는 주일예배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주일예배에 대한 종말론적인 이해는 단지 마지막 날에 대한 기대만이 아니라 일상 경험을 반영한다. 이 점을 좀 더 언급하고 넘어가자. 다시 말해 유럽 기독교 문화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7일의 순환과정에서 매주 금요일을 마음가짐에서부터 음식(생선을 먹었다)에 이르기까지 다른 날과 구별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보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즉 매주 금요일에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모여 부활의 기쁨을 함께 축하하면서 장차 있을 부활을 소망하였다. 죽음과 부활에 대한 생각은 특별한 절기에만 있지 않았다. 성도들 일상에서 매주 반복되었다. 한국 기독교는 이런 정신을 금요(철야) 기도회로 어느 정도 표현하였다고 생각한다. 금요 기도회는 지금은 퇴색되어 흔적만 남아 있는데, 이마저도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

'주일'의 의미

금요일과 주일의 반복이 갖는 신앙적인 의미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 2장 19-22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와 성전을 동일시하셨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는 그의 몸"(1:23)이라고 보고,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는 성도의 몸을 "성령의 전"이라고 말한다.

구약 성전과 현대의 교회가 비록 동일한 의미는 아니라도 유비적인 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성전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이 거하시는 전, 곧 성전이다.

이것을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오늘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어떤 일상을 살아야 하는지, 주일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고난 중에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사흘 후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단지 역사적인 일회적 사건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은 그를 구세주로 믿고 제자로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규범으로 작용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가운데 나타내기를 결단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은 그분의 몸으로서 성전, 곧 성도와 교회 역시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는 일상을 살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우리 일상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어야 하나, 그것은 세상이 인정해 주는 게 아닐 뿐 아니라 오해와 편견, 심하면 박해까지 받는 삶이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일상에서 신앙 때문에 받는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되 결코 고난을 피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금요일까지 절정을 이루면 그 후 주일까지는 침묵의 시간이 이어진다. 낮아지고 고난받은 상태에서 주일의 영광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이 죽음의 권세에서 예수를 일으켜 주셨듯이, 우리를 다시금 일으켜 세워 주신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수난의 금요일을 지나 온 성도들은 주일예배에서 새로운 창조를 경험한다. 곧 성도들은 예배 의식을 통해 금요일을 지나 주일예배에 참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고 또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경험한다.

교회는 예배 중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환기하는 일을 반복한다. 예배는 구속사적인 스토리텔링을 의식을 통해 재현한다. 그럼으로써 예배자로 하여금 일주일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게 한다. 은혜와 고난이 없는 삶이었다면, 예배를 계기로 다시금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 후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면서 기쁨과 감사로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다.

초대교회는 성찬을 거행함으로써 주의 죽으심과 부활, 다시 오심을 증거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간헐적으로 행하는 상황에서는 예배로 부름 혹은 설교 혹은 찬양을 통해 예배 참여자들이 분명하게 상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일상에 고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도가 응답되고 은혜를 경험함으로써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나누며 살며, 혼자 차지하기보다는 내어놓고 공유하는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혼자 행복한 경험을 했다고 감사와 기쁨에 빠지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주일예배에는 성도의 기쁨과 감사와 은혜를 함께 공유하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유독 한국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주일 저녁(오후) 찬양 예배는 선교사들이 제정했다는 사실 외에 그 유래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말한다면, 경건주의 전통에 속해 있었던 선교사들이 안식일의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일정한 의식을 거행하는 유대교 전통에 착안해서 만든 것은 아닌지 싶다. 곧, 안식일 처음과 마지막에 일정한 의식을 거행했던 유대교 전통을 본받아 주일 아침과 저녁에 예배하는 시간을 만든 것 같다는 말이다.

주일예배 전통, 지켜야만 할까?

주일 오전 예배에 강조점을 두는 이유는 안식일 전통에서 유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이것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지와 관련해 논란이 없지는 않다.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뿐 아니라 의미적으로나 태도에 있어서 더 이상 유대교의 안식일과 비교할 수 없는 개신교 주일예배 전통을 고수해야만 할까?

주 5일 근무제에 맞게 토요일 예배를 만들어 성도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교회가 있는 현실에서 주일예배를 고수하는 게 시대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개신교 예배 전통을 고려 범위에서 배제하면, 반드시 일요일에 예배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워졌다. 오히려 현대인의 삶과 생활 리듬에 맞게 정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럼에도 일요일은 한국 사회에서 다수 성도가 쉬는 날로 정해져 있다. 주 5일 근무제라 해도 토요일에 쉬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일요일에 모인 까닭은 부활을 기념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날이 공식적으로 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리상으로는 '주일' 예배 필연성을 주장하긴 쉽지 않아도 전통에 맞고, 또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쉬는 날로 여기는 날이니만큼 일요일에 예배 시간을 정하는 관행을 크게 문제 삼을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문제는 주일예배 참석을 신앙을 평가하는 잣대로 여기는 관행이다. 필자는 과거 한 달에 두 번 일주일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정직한 신앙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라는 목회자의 충고를 듣고 용기 있게 퇴사한 한 여성을 알고 있다. 퇴직 후 그녀는 원하는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다 결국 이런저런 직장을 옮겨 다녔고, 결국 교회를 떠났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충고했던 목사는 오히려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난 성도가 문제라고 말했다.

진정 그녀가 문제일까, 아니면 그만두라고 말하면서도 아무런 사후 대책도 마련할 생각을 하지 않은 목회자가 문제일까? 주일예배를 위해 직장도 그만두어야 하고, 주일예배를 위해 사람들과의 관계도 포기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상황은 대부분의 성도들이 겪는 고통 중에 하나다. 요즘 같이 직장을 구하기 힘든 시기엔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고민하는 성도들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결정할 수밖에 없는 갈등 상황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할까? 목회자들은 성도들 상황을 공감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어떤 현실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살펴보고 돌보아야 할 것이다.

신앙은 공동체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해야 하는 몫은 철저히 개인에게 있다. 교회는 성도들의 갈등 상황에서 바람직한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어야 할 뿐 아니라, 개인의 결정을 존중해 주고 또 공동체로서 짐을 나눠 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참석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기 전에 그들이 예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게 바람직하다.

성수주일이 신앙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수주일을 신앙의 잣대로 삼는 것은 율법적인 사고에서 비롯한다. 소위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일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대 사회에서 더 이상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주일예배 참석을 의무 규정으로 정하고 개인의 신앙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하면, 이 때문에 겪는 성도들의 불만은 머지않아 교회 비판으로 변할 뿐이다.

예배 참석이 중요하긴 하나 오직 주일예배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나 또 예배 참석만을 바탕으로 신앙을 평가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일요일에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해결되지 않음에도 교회로부터 계속 판단을 받게 되면 성도들은 부담스럽게 여겨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이것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선택이 되도록 하면 주일예배의 의미는 퇴색할까? 성도들이 예배를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 기쁨으로 참여할 결심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몫은 목회자에게 있다. 강요가 먹히는 때는 이제 지난 것 같다.

주일 오전 예배만을 중시하는 경향을 좀 더 생각해 보자. 이미 한국교회에는 오후 예배나 저녁 예배가 있고, 수요 예배 혹은 수요 기도회나 금요 기도회, 그리고 구역 예배도 있기 때문에 예배자의 진정성을 주일예배에서만 찾으려는 태도는 오히려 교회에 대한 불만을 야기하는 요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이것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오직 주일예배 설교만 중시하고 다른 예배 설교는 경시하는 풍조를 낳는다. 예컨대, 모든 예배가 동일하게 중요한 만큼 설교 역시 동일한 비중으로 준비되어야 하지 않을까?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면 예배 횟수를 줄이든가, 아니면 잘못된 관행이라고 지적을 받고 있는 '설교 중심 예배'를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만일 모든 예배에 같은 비중을 두고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성도들을 위한 예배를 마련한다면 그 예배의 설교는 주일예배 설교를 반복해도 무관하다. 또한 만일 모든 예배에 같은 비중을 둔다면, 목회자는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를 준비하며 성도들을 돌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교회 정치에 참여할 시간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담임목사가 설교를 독차지하기보다 다른 교역자들과 설교 시간을 나누는 일이 자연스레 일어나지 않을까?

준비 없는 설교는 불필요한 말을 낳을 뿐이며,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설교, 더 나아가서는 예배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성도들이 어떤 힘겨운 상황에서 시간을 내어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아무 준비 없이, 혹은 남의 것을 베껴서 설교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주일예배는 더 이상 성도들의 신앙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 가나안 성도들 사이에선 주일예배가 목회자의 영성과 자질을 폭로하는 시간으로 인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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