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은 강간 미수범이었다. 조용하던 집안에서 울려 퍼진 보디발의 아내의 비명 소리에 집안 사람들은 놀라서 모여들었다. 요셉의 옷가지를 미친 듯이 흔들어 대면서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며 분노하는 보디발의 아내를 보면서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럼 그렇지." 보디발 장군이 노예 신분의 천한 요셉을 신뢰할 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었다고 어떤 사람이 말했을 것이다. 요셉을 믿었는데 알고 보니 속물이었다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미디안 상인들 손에 팔려 온 히브리 노예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으려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는 데는 한 마디 비명이면 충분하지만, 그런 비난에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백 마디 천 마디 말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그들은 범죄자 낙인을 찍어 놓고 요셉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요셉은 나름대로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주인 보디발 가정을 위해 헌신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에 요셉은 보디발 집안에 복덩어리였다. 사람을 볼 줄 아는 CEO형 장군이었던 보디발은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노예에게 자기 집안의 모든 일을 맡긴 것이다.

자신을 인정하고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어놓고 충성하는 게 남자가 아니던가. 요셉은 보디발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맡은 바 모든 일에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았다. 아무리 보디발이 자신을 신임한다고 하더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보디발에게 쫓겨날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살았기 때문에 그는 바른 길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며 살았을 것이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엡 6:5-7)

이러한 권고의 말씀을 요셉은 이미 실천하였을 것이다. 그런 요셉이 강간 미수범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 속에 던져지게 되었을 때 얼마나 원통했을까?

하나님, 어찌하여 나의 억울함을 돌아보지 아니하십니까? 요셉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지도 모른다. 배은망덕한 놈이라는 비난이나 파렴치범이라는 비난을 들을 때마다 요셉은 말도 못하고 눈물만 삼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요셉이 결국 이집트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감옥 속에서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났고, 그가 꾼 꿈을 요셉이 해석해 주었고, 결국 그 일이 인연이 되어 바로 왕 앞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만일 요셉이 보디발 집에만 있었더라면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만일 요셉에게 강간 미수범이라는 억울한 누명이 씌워지지 않았더라면, 그냥 보디발 집에서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었더라면, 요셉은 그냥 아주 뛰어난 노예로 그의 인생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셉의 삶에는 억울한 일이 많이 있었다.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고, 노예로 팔렸고, 이젠 강간 미수범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앞에는 아무런 미래도 눈앞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그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했던 것들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세워 나가시는 미래는 좋은 일들의 씨줄만으로 짜여지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들의 날줄과 함께 짜여지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천을 만들어 가신다.

요셉은 나중에 이 모든 일이 하나님 계획 가운데 있음을 발견했다. 형들이 자신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것도,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한 누명을 받게 된 것도, 감옥에 처박혀 관원들을 만나고 그들의 꿈을 해석하였던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만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감사할 것뿐이다. 그 어떠한 억울한 일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능하시기 때문에 그런 나쁜 일이 우리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잠깐 한눈을 파신 까닭에 우리들에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철저하고 온전한 계획 가운데서 우리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비록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후에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cf. 히 12:11).

때로는 나봇처럼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세벨 왕비는 불량배 두 사람을 동원해서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거짓 증언을 하게 하였다(왕상21:7-10). 결국 나봇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고 그의 포도원은 아합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정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 결국 우리 모두가 벌거벗은 것과 같은 상태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히 4:13).

우리 주님께서도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억울한 죄목으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셨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십자가 능력을 선물로 받은 우리들은 요셉처럼 고난가운서도 웃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강간 미수범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고난마저도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요셉이나 예수님의 고난을 교훈으로 삼아, 내 삶 속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고통과 괴로움도 모두 주님의 주권 속에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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