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필자가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석사과정(Master of Divinity)을 졸업할 때, 그간 구약학 과목을 가르쳤던 세계 정상급 구약학자 브루스 워키(Bruce Waltke) 교수님도 학교를 떠나게 되셨다. 워키 교수님이 졸업 설교를 하셨는데, 그가 졸업생들에게 남긴 마지막 설교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

지금부터 약 25년 전에 들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설교 핵심 메시지는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7족속을 진멸할 것을 명령하셨는데, 이것의 영적 의미를 선명하게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허리가 휜 노인들과 아무것도 분간을 못 하는 젖 먹는 유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설명해 주셨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 명령을 하셨을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나안 7족속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렇게 철저히 죽이라고 명령하셨는가? 여호수아서를 읽을 때마다 필자의 머릿속에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아마 많은 성도가 동일한 의문을 가졌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신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 아닌가 의문을 품기도 한다.

미주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할 때, 한번은 나이 많은 권사님 한 분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시고, 신약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죠?" 그 권사님 질문은 구약성경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솔직한 질문이었다. 아마 적지 않은 사람 이 그 권사님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권사님과 동일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초대교회 시대에도 있었다. 그들이 바로 그 유명한 영지주의 이단들이었다. 이들은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신약성경의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으로 여기고 구약성경 자체를 배격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을 배격했을 뿐만 아니라 신약 저자들이 인용한 구약성경까지 지워 버리기도 했다. 이들은 이들 자신만의 특별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육신을 천하게 여겨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까지 부정하여 초대교회 당시 대표적인 이단이 되었다(요이 1:7).

이들은 또한 구원 얻은 자들은 구약 율법에 메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 "도덕률 폐기론"(antinomianism)의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이들은 오늘날 구원파 이단과 매우 흡사한 이단적 교리를 갖고 있었다. 왜 이 말을 하는가? 구약성경에 계시된 메시지를 잘못 해석하게 되면 초대교회 시대에 나타난 영지주의 이단이나 현시대에 활동하는 구원파 이단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의미와 예표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진 구약 본문들

구약성경에 나타난 사건이나 제도나 인물 등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신약시대에 완성될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 제사 제도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의(祭儀)이다. 하지만 제사드릴 때 드리는 제물의 피에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인들을 용서하실 것을 미리 보여 주시는 예표(豫表)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일 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염소의 피를 뿌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했던 대제사장의 사역은 과거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었던 제도이다. 동시에 대제사장 사역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들고 하늘나라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사역도 예표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나안 7족속을 멸절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죄도 분간하지 못하는 젖 먹는 유아들까지 멸절하라는 명령에 대한 정당성은 무엇인가? 만약 오늘날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지하드의 테러 행위에 못지않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구약학계에서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는 구약 해석의 난제 중에 하나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1)

가나안 7족속 멸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해석학적 원리

이제 졸업식에서 워키 교수가 설교했던 가나안 7족속 멸절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지금까지 서론적인 이야기를 했다. 가나안 7족속의 멸절은 역사적 사건 자체를 뛰어넘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나님의 경륜은 바로 이 점을 새 언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의도하셨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 방식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살게 하셨는가? 왜 이들을 인도해 내셨는가? 왜 이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셨는가? 왜 이들로 하여금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는가? 왜 이들로 하여금 가데스바네아의 반역을 경험하게 하셨는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많은 시험을 경험했는가? 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들에게 약속하셨는가? 왜 '예수'라는 이름과 같은 '여호수아'를 세워서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셨는가? 등의 의문은 구약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무엇보다 가나안 7족속 멸절 명령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깨닫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시고 40년간 광야 생활을 통하여 훈련하신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 새 언약 시대를 사는 우리를 위한 하나의 삶의 모형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과거 애굽 땅과 시나이반도와 요르단 지역과 팔레스타인 땅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 자체를 뛰어넘는 귀중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이들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셨다.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의 귀중한 예표(모형)로 보여 주신 것이다. 특히 유월절이라는 특별한 절기를 주신 것은 출애굽 사건의 중요한 구속사적인 의미를 밝히 드러낸다. 유월절 밤에 애굽의 장자들은 죽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흠 없는 어린양이나 염소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해 살아남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에 대한 귀중한 모형론적 사건이다. 그래서 찬송가 가사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유월절 어린양이시다.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널 넘어서 가리라(265장 1절).

유월절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를 바름으로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의 피가 나의 죄를 씻는다고 믿는 자에게 영적으로 살아나는 은혜가 임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예수 믿는다'는 말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의 피가 나의 죄를 씻는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요 1:29).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넌 사건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하나님의 기적임과 동시에 중요한 영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설명하기를, 홍해를 건넌 사건은 세례의 예표라고 한다(고전 10:2). 갈라진 물속을 들어갔다가 나오는 이미지는 세례의 이미지와 통하는 면이 있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시험들은 우리의 시험을 또한 예표한다. 원망, 불평, 탐욕, 우상숭배, 간음, 지도자에 대한 도전, 불신앙 등은 우리가 날마다 겪고 있는 시험들이다(고전 10:6-10).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후에 구원의 증표로 세례를 받고, 그 이후 성도들은 신앙생활의 여정으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시험을 받으면서 영적으로 성장했던 것처럼, 똑같은 시험의 과정을 거쳐 한 단계씩 성장해 간다.

그들의 삶의 모습은 마치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시험을 열거한 후에 우리에게 이런 경고로 결론을 맺는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이스라엘 역사는 현시대를 사는 우리를 위한 본보기이다. 

40년 광야 생활 후에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것은 성도가 생을 마감하는 시점에 천국에 입성하는 것을 예표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하는 예표적인 장소로서 의미가 크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느낀 점은 이스라엘 땅이 정말 젖과 꿀이 흐를 정도로 비옥한 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시나이반도에 비하면 좋은 땅이지만 대한민국 땅에 비하면 여러 가지로 열악한 땅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가나안 땅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을까? 그 답은 가나안 땅이 천국을 상징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듯이 새로운 여호수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 준다. 히브리식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헬라식 이름이 예수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음을 보이는 예표적인 인물이다.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단 한 번의 실수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모세는 율법을 예표하는 인물로서 율법의 준수를 통하여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예표적으로 보인 것이다. 모세라는 인물 자신을 생각할 때, 그렇게 40년간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겼는데 어떻게 단 한 번의 실수로 가나안 땅을 놓치게 되었을까? 많은 의문이 든다.

그의 인물이 가진 예표적 의미 때문이다. 만약 문자적으로 이를 받게 된다면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용서의 기회를 주시지 않는 잔인한 하나님으로 묘사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구약의 사건, 제도, 인물 등은 모형론적인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다. 그 의미를 바로 파악해야 구약성경의 의미를 우리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다.

가나안 7족속 멸절이 갖는 모형론적 의미는?

이제 가나안 7족속 멸절 명령은 어떤 영적인 의미를 지닐까?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한다고 앞에서 말했다. 천국, 즉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다. 불신 영혼에게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미치게 될 때, 그 영혼에 천국이 임한 것이다. 전도는 천국이 임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이 들어갈 때 그 영혼에 천국이 임했다고 말씀하셨다(마 12:28).

또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통치하심이 미칠 때, 천국은 더욱 깊은 차원으로 임하게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마음속에 천국이 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하신 통치하심은 믿는 순간에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서서히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더욱 온전하신 통치하심이 임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임한 우리의 마음을 상징한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는 수많은 정복되지 않은 옛 사람의 성품들이 남아 있다. 미움, 시기, 질투, 욕심, 정욕, 교만, 이기심, 등등 수많은 적들이 우리 속에 남아 있다. 가나안 7족속들이 바로 우리 속에 정복되지 않은 육신적인 옛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워키 교수가 졸업식 설교에서 한 말의 핵심이다.

우리 마음속에 진정한 안식은 언제 찾아오느냐?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적들이 정복될 때, 마음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나라가 임했지만,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힘써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적들을 정복해야 했다. 그래야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평화가 우리 마음속에 찾아온다. 워키 교수는 졸업식에서 바로 이 점을 강조했다.

왜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는가?

예수님을 믿지만 우리 마음속에 왜 평안이 없고 각가지 불신자들이 겪는 동일한 괴로움을 경험하고 있는가? 많은 경우에 그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적들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쓴 뿌리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자주 괴로움을 당하는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탐욕 때문에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쓰러지는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교만 때문에 사람들의 멸시거리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움 때문에 얼마나 자주 주위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가? 마음속에 남아 있는 헛된 명예욕 때문에 얼마나 자주 허황되고 방황하는 삶을 경험하는가? 모두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족속들이 아직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남아 있는 한 우리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 눈에 연기처럼 되어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왜 수많은 한국교회의 영적인 거장들이 치욕과 멸시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가? 그 원인은 바로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정복되지 않은 적들 때문이다. 자리에 대한 탐심 때문에 교회 세습으로 사회의 지탄 대상이 된 적이 얼마나 많은가?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헌금을 유용하고 치욕을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육신의 정욕을 통제하지 못해서 유례없는 영적인 업적을 쌓고도 세상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헛된 명예욕 때문에 남의 글을 도둑질하고 자신의 것으로 사칭하여 세상의 비난거리가 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 모든 문제의 뿌리에는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7족속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각주

1)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답은 명확하다. 만약 가나안 7족속을 살려 두게 되면 이들의 잘못된 행위를 본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멸망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모두 멸절하라고 명령하셨다.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민 33:55). 가나안 7족속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요인은 이들의 우상숭배의 악습들이었다. 신명기 7장에는 이들을 진멸해야 할 이유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주된 이유가 우상숭배임을 알 수 있다(4-5절). 이스라엘 역사를 되돌아보면 가나안 7족속 멸절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우상에 물들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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