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남 집사 글(바로 가기)을 읽고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아쉬운 마음이 들어 글을 쓰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예배주의'란 예배를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과 예배를 통해 복을 받는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사실 '예배주의'란 말은 신학에서 처음 접하는 말이라 그 개념 형성과 사용에서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그의 글이 말하고 있는 바를 따라가 보겠다.

그가 비판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예배는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공적인 예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예배, 이 예배에 참석하는 일을 신앙의 모범으로 삼는 일은 모든 교회의 목회자에게 볼 수 있는 일이다. '개독교'라 불릴 정도로 사회적인 신뢰도에서 최하위 수준에 있는 교회가 삶을 통한 예배를 중시하기보다 오히려 교회에서의 예배만을 중시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예배주의'란 예배 자체를 비판하기보단 교회의 공적인 예배만을 중시하는 태도와 예배를 잘 드려야 복을 얻는다는 주장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거기에 일상의 예배를 강조하지 않는 태도도 포함한다.

이것을 비판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정기적인 예배 행위가 있지 않았다는 점과 올바른 삶을 배제한 예배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렇게 되면 제사를 대하는 사람들 태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유는 공감할 수 있지만, 첫 번째 이유는 신학적인 성찰이 아쉬운 부분이다.

예수님 당시 상황은 오늘날과 달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신 집사는 오늘날의 교회 예배를 당시의 상황에 투영해서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데, 이는 예배 상황이 오늘날과 결코 동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다.

'교회'의 신학적인 의미는 비록 구약에서도 찾을 순 있다 해도 교회는 오순절 이후에 발생한 현상이다. 비교해야 한다면 오순절 이후 초대교회 모습과 비교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실제로 종교개혁 전통의 교회들도 대부분 초대교회에서 그 원형을 찾고 있다. 예배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교회의 정기적인 예배를 강조하는 일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신 집사의 비판은 대체로 일상의 예배를 무시하고, 의식적인 예배만을 강조하는 태도를 겨냥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 점은 필자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동의하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없는 게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과연 신 집사가 의식적인 예배가 왜 필요한지, 그리고 의식적인 예배와 일상의 예배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숙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짧은 지면 관계 때문에 충분히 서술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의 책에서도 그 부분은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 본다.

의식적인 예배 형성 배경

의식적인 예배는 일상의 예배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일상에서의 예배가 온전하면 교회의 예배는 불필요해질까? 물론 신집사의 주장이 교회의 예배를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은 잘 안다. 오직 교회의 예배만을 중시하는 태도를 '예배주의'라 규정하고 이것을 비판하며 경고하려는 의도임을 또한 잘 알고 있다.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 비춰 생각해 보아도, 제사 자체가 아니라 일상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사무엘도 사울 왕에게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말한 바 있다. 예수님 말씀이나 사도 바울의 권고 역시 동일한 것을 증거한다.

그럼에도 종교개혁 전통에 서 있는 오늘날 교회의 예배는 포기할 수 없고 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을 말하고 싶다. 먼저 오늘날 교회의 예배는 앞서 말한 대로 초대교회 전통에 기초하고 있지만, 사실 교회에 대한 종교개혁적인 이해가 더 큰 작용을 한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 전통의 교회는 제사라는 의미에서 벗어나 무엇보다 복음을 소통하고 또 성도들의 성숙한 신앙을 돌보는 역할을 숙지하였다. 따라서 복음을 숙지하고 또 신앙의 성숙을 위해 교회 예배 참여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교회는 당시 광장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예배에 참여함으로 복음을 들을 수 있었고, 교제할 수 있었으며, 지역 상황과 관련 소식을 접함으로써 봉사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가정에서 기도하고 또 말씀을 읽을 수도 있었고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었지만,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권장할 만한 일이었다. 여기에는 십계명 중에 네 번째 계명이 크게 작용했다. 네 번째 계명을 교회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대가 바뀌고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성도가 다양한 정보를 더 이상 교회에만 의존하는 태도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발생하였다. 성도들은 스스로 원하는 책을 찾아서 독서하고, 또 다양한 미디어로 설교와 신앙 강연을 들을 수 있다. 과거 교회가 했던 역할을 미디어가 대체한 것이다. 신앙 관련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아지고, 또 다양해졌음에도 굳이 교회와 교회 예배를 삶의 중심에 놓으려는 시도는 시대 흐름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 예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마땅하다.

예배당 중심 예배의 의미

그렇다면 교회의 예배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일단 교회의 예배가 의식 행위임을 명심하자. 각종 상징과 상징 행위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 교회의 예배이다. 다시 말해 교회의 예배는 반드시 어떤 의식적인 절차에 따라 이뤄진다. 과거 의식과 절차를 생략한 예배를 '열린 예배'라 하면서 실천하는 교회가 많았지만, 최근 예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다시 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도대체 의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상의 예배를 중시하면서도 의식적인 예배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일상의 예배만을 예배로 보고 그것을 중시한다면, 예배는 지극히 합리적인 삶에 기초하게 된다. 누구도 합리적인 사회에서 일상의 삶을 비합리적으로 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일상의 삶으로서 예배가 중요하긴 해도, 교회에서의 예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예배 자체가 갖는 신비에 있다.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신비를 의식으로 재현한다. 모든 예배 순서는 신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을 모르고 예배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교회의 예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은 아닐까?

교회의 예배에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지를 '의식'으로 배운다. 하나님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인간은 하나님을 어떻게 또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배우고 또 실천한다. 그뿐 아니라 일상에서 경험한 내용이 하나님 뜻과 관련해 무엇이며, 또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배운다.

교회 예배에서 경험한 것은 일상의 예배를 가능하게 한다. 비록 합리적인 세계에서 합리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해도 결코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숙지한다. 합리적인 삶에 작용하는 비합리적인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교회의 예배와 일상의 예배는 마치 형식과 내용과 같아서 칸트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교회의 예배가 없는 일상의 예배는 무의미하고, 일상의 예배가 없는 교회의 예배는 공허하다. 비록 신집사가 말하는 '예배주의'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나, 그럼에도 교회의 예배는 결코 포기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예배의 무의미함을 주장하고 비판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할 일은 성도들에게 예배 의식의 신학적인 의미를 숙지하게 하는 일이다.

사실 구약시대 사람들도 매주 제사하지는 않았다.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 의무적인 참석을 해야 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필요에 따라서 제사를 드렸다.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린 사람은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제사장 직분을 맡은 사람뿐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정기적인 예배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주일 성수' 운운하면서 매 주일 예배 참석을 의무로 여기는 것을 비판한다. 구약 전통에서 볼 때 매 주일 모여 예배하는 것을 의무로 간주하는 일은 분명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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