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수 박사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는 주제로 다섯 차례 글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1. '설교=하나님 말씀'으로 이해하게 된 배경
2. 설교는 선지자, 혹은 사도적인 것인가?
3. '설교=하나님 말씀'이라는 주장의 의미론적 한계
4. '설교=하나님 말씀'이라는 주장의 인간학적 한계
5. 인간의 말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이 되는가

설교가 하나님 말씀으로 경험되려면

필자는 지금까지 '설교=하나님 말씀'으로 이해하는 데 의미론적이고 인간학적이며, 소통과 관계에서 발생하는 한계를 다루었다. 이제는 그 반대 경우를 살펴보려 한다. 곧 예배 안에서 예전으로 행해지는 설교가 하나님 말씀으로 작용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개혁신학은 "Praedicatio verbi Dei est verbum Dei"(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를 결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일에선 종교개혁 이후 예배에서 행해지는 설교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로 여겼다. 예배에 해당하는 독일어 'Gottesdienst'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말은 Gottes+Dienst이다. 소유격에는 목적의 소유와 주격의 소유의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봉사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로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의미로 이해하면, 하나님은 예배에서 설교자가 행하는 성경 본문에 대한 설교를 사용하여 말씀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해 '설교=하나님 말씀'으로 오해·오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신학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필자가 이해하는 한, 근본적인 문제는 이렇다. "인간의 말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이 되는가?"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말할 때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전제가 있다. 설교가 우선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예배이며, 하나님의 말씀(뜻과 계획과 약속)과 행위이고, 성경 안에 있는 증인들과 그 증거인 기록들이다. 그리고 이 기록을 오늘날에도 생동감 있게 들을 수 있게 하는 주체로서 성령과 그분의 역사다. 또 다른 전제는 설교자와 청중이다. 이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성경에 대한 설교는 하나님 말씀이 된다.

먼저 하나님은 세상과 소통하길 원하시고, 이를 위해 계시하시며, 특별히 부름받은 자들이 경험한 내용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하게 하셨다. A.D. 90년에 모인 유대인의 얌니아(Jamnia) 회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서적들에 고무되어 소집되었다고 여겨지는데, 구약 39권은 이때 정경으로 확정되었다.

기독교회는 이원론에 근거하여 누가복음과 바울서신만을 받아들인 마르시온(Marcion) 성경에 자극을 받아 이에 적극 대처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기록들 중에 특히 하나님과 하나님 행위를 전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 신앙에 기여하는 것을 일정한 기준(신약의 경우엔 특히 영감성, 사도성, 그리고 복음의 증거)에 따라 선별하여 하나님 말씀으로 고백하고 그 가운데 27권을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가톨릭은 교회가 해석의 규범으로 성경의 범위를 확정했기 때문에 성경 해석의 권위를 교회에 부과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정경 형성 과정과 성경 해석에는 성령의 조명이 있다고 고백한다. 정경으로서 성경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한 규범으로 기능한다(regula fidei).

설교자와 청중의 기대가 만날 때

둘째, 설교란 성경의 증거를 오늘의 상황에서 반복하면서,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에게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길 기대하며 행하는 공적인 언어 행위이다. 인간의 언어가 하나님 말씀으로 경험되는 신비가 일어나는 시간이다. 설교자 자신이 일으킬 수 없고, 다만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자신의 공적인 언어 행위로 일어나길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바르트는 성령의 오심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설교자는 준비 과정부터 하나님을 경험하리라 기대하고, 설교 현장에서 성령이 임재하길 기대하며, 청중은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경험을 하길 기대한다. 설교 본문에서, 또 설교 행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 임재하시는 중에 설교자와 청중의 기대가 서로 만날 때, 설교의 이상적인 결과가 나타난다. 곧 인간의 말인 설교가 하나님 말씀으로 경험된다.

셋째, 설교자와 청중의 기대가 말씀을 계기로 서로 만날 수 있기 위해 설교자에게 필요한 일은 성경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일에서 성실한 태도를 갖는 것이다. 해석 과정에서 만난 의미 앞에 자신을 세우고, 하나님 말씀이 자신에게 먼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과 설교자는 구속사의 맥락에서 서로 연합하고, 인간 설교자와 인간의 말은 성령 세례를 받는다.

또 필요한 일은 청중의 실존과 상황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본문을 설교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일과 구분된다. 다시 말해, 신학적 해석에서 얻은 의미와 관련해 그 구체적인 적용을 고려한다. 일상에서 청중이 고민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왜 말씀을 따르는 삶을 실천하기 어려운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인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충분히 살핀다. 이 과정에서 설교자는 청중과 공감하며, 그들과 함께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 준비에는 설교자의 경건과 영성이 크게 작용하여도, 설교 언어와 내용 그리고 구체적인 설교 방식과 관련해서는 청중이 공감적으로 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실존과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공감적인 설교에는 설교 내용과 청중의 관계에 관한 연구가 선행한다.

'설교'는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시간

넷째, 설교는 예배 행위의 하나다. 예배 시간 중에 수행되기 때문에 '설교'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상징한다. 예배한다 함은 이런 상징을 받아들이고 '설교'에서 하나님 말씀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예전 행위의 하나인 설교에서 인간의 말은 하나님 말씀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시간에 강단에 오르는 설교자는 오직 강단에서만 설교자로서 실존한다. 전통적으로 교회가 설교 강단과 예배 인도자 강단을 구분하는 까닭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강단을 내려와서는 더 이상 설교자가 아니다. 설교자에서 목회자로, 말하는 자에서 듣고 돌보는 자 위치로 옮겨진다. 강단을 내려와서도 설교자의 정체성을 갖고 살면서 자기 생각을 권위적으로 말하길 좋아하는 목회자들이 있는데, 가정에서나 교인과의 관계에서 갈등 요인으로 작용한다. 강단 아래에서는 더 이상 설교자가 아닌 목회자일 뿐이며, 성도와 소통하면서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설교 행위와 관련한 상호 기대는 비껴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설교라도 청중의 마음을 울리지 못하면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아무리 주의 깊은 청중이라도 설교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다만 자기 자신만 발견할 뿐이다. 자기 내면의 음성을 들을 뿐인데도 하나님을 듣고, 만났다고 말하는 청중이 많다. 메시지가 인간의 것인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현실을 염두에 두고 설교자는 더욱 순전한 마음으로 설교하고, 청중은 자기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더욱 간절한 마음과 분별력을 갖고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섯째, 예배나 집회에서 접하는 '설교'는 순서상 청중들이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다. 청중이 설교에 집중하는 까닭은 대개 예배 중에 행해지기 때문이다. 청중은 예전으로서 설교에 믿음으로 참여한다. 곧 인간의 말인 설교는 청중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 설교는 하나의 예배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또한 하나님의 섬김을 받는 시간이다.

인간은 침묵하고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달리 말해서 설교자인 인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중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설교는 예배 중에 유일하게 나 아닌 타자에 집중하면서 내 안에 들어온 말씀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고, 그 결과 깨달음과 변화의 사건이 일어나도록 허락하는 시간이다. 내 생각과 의지와 주장을 앞세우지 않는 시간이다.

참고로 좋은 설교를 자주 들으면 인성과 품성이 개발되는 까닭은 나 아닌 타자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습성으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고 자랑하길 좋아할 뿐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지극히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설교자와 청중이 소통하는 시간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과 내가 소통하는 시간이다. 내가 머물러 있길 좋아하는 세상, 나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는 세상, 내 삶의 터전인 세상을 떠나 나를 하나님 앞에 세워 놓는 시간이다. 세상에 대한 감각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에 대한 감각 능력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소욕에 나를 맡기는 시간이다.

설교 시간에 청중은 순종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지, 단순히 시청각적인 감각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입장에 있지만은 않다. 내적으로 묻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하며 감동을 받고, 때로는 충격을 받고, 때로는 저항도 한다.

이상 다섯 가지를 바탕으로 설교는 예배 현장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들린다고 말할 수 있다. 끝으로 설교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말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설교란 무엇인가

1) 인간의 말이 하나님 말씀이 되는 신비

설교의 전통은 그리스도인의 소명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심과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된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나타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경이 진리임을 증거하는 삶이며,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말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혹은 선한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소망의 이유를 물어올 수 있도록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는 자로 산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 수 있도록 한다. 삶을 예배로 보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 12장 말씀에 따라 모든 성도들은 삶에서 이것을 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설교는 예전으로서 예배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이 일을 실천하는 언어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자에게 주어진 일일 뿐이다. 설교자를 포함해 모든 성도가 삶 속에서 행하는 일을 설교자는 특별히 예배의 자리에서 말로 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설교는 설교자로 부름받은 자가 행하는 일이며, 하나님과 그분의 행위가 청중들 삶 속에서 드러나도록 격려하고 또 돕지만, 청중들 삶 속에서 경험되는 하나님과 그분의 행위를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세상의 거센 도전 앞에 살면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신앙생활에서 설교가 중요한 까닭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청중의 경험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아는 일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청중이 자기 생각과 삶, 그리고 경험을 성경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성경에서 의미를 발견하도록 한다. 곧 하나님을 만나도록 한다. 설교가 아니면 청중이 자기 삶과 관련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집중해 들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설교를 들으면서 청중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깨닫고, 하나님 뜻과 자기 뜻을 분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무엇을 알아야 소망할 수 있는지, 시험과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배운다.

하나님과 공동체의 관계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는다. 이웃과 더불어 화평 가운데 살려면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알아야 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된다. 설교자는 설교로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무엇을 행하셨는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었음을 증거하고,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야 할 당위성을 선포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말하고 그분의 행위를 증거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설교는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 공동체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하는 신앙적 언어 행위다. 설교자는 공동체의 권한 위임으로 비로소 설교할 권한을 받는다.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설교자로 부름받은 것은 아니다. 다만 자격을 갖추었을 뿐이다.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설교자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설교자는 공동체 위임에 따라 부름을 받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설교자의 진정성 있는 설교를 사용하여 말씀하신다.

한편, 설교에서 인간의 말이 하나님 말씀이 되는 신비의 과정을 설명할 방법은 있을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행위는 과거에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도 계속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록 인간 자신에 의해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성령의 임재에 따른 결과이지만, 성경을 설교하는 행위를 매개로 하나님은 설교자와 연합하여 일하신다.

연합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체화되며, 설교자와의 연합은 특별한 은총이다. 비록 죄인이라도 설교자로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하나님의 입으로서 사용된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연합은 설교자뿐 아니라 청중에게도 일어난다. 성령은 믿음으로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청중과 연합하여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에서 중간적인 실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이미 현실에 나타났지만, 세상에서 그것은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또 언제나 다가오는 형태로 현존한다. 온전한 형태는 마지막 날에 이뤄진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그 무엇에도 의존되어 있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른다. 뜻하신 바가 있으면 나타났다가도 뜻하신 바가 있으면 사라진다.

인간의 욕망이 작용함과 동시에 사라지다가도 성령이 임하면서 나타난다. 그러니 하나님나라는 이곳에 있거나 저곳에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이 현실이 되는 곳에서 경험될 뿐이다. 이처럼 하나님나라와 세상은 서로 겹쳐 있어서, 그 사이에서 실존하는 그리스도인은 만일 하나님나라가(곧 성령이) 임하면 인간의 말을 들으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반대로 하나님나라가 더 이상 현존하지 않으면(곧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자기가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임에도 인간의 말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설교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이 설교자와 연합할 뿐 아니라 청중과도 연합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인이 비록 세상에 있으나 믿음으로 하나님나라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2) 설교는 신학함(doing-theology)의 한 방식

신학함이란 하나님 경험에서 출발해 신학적인 성찰을 거쳐 일정한 신학적 진술을 형성하기까지 진행되는 전 과정이며 이것을 비평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신학한다' 함은 단순히 신학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일이 아니다. 가르치거나 배우면서 신학함이 이뤄지기도 하고 이뤄지지 않기도 한다.

오직 내용을 전달하는 데 치중한 가르침과 학습은 결코 신학함이 아니다. 어떤 이론이나 사상가를 가르치고 배운다 해도 그 이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고려하면서 그 정당성과 적합성을 성찰할 때, 비로소 '신학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신학함은 경험을 성찰하는 일이고, 세상에서 제기하는 질문에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대답을 주는 과정이며, 신학 이론 형성 과정을 그 정당성과 적합성에 비춰 비평하는 작업이다.

크게 보면 하나님 경험을 하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제기하는 일과 질문에 대답을 하려는 일, 이런 일들의 신학적인 정당성이나 적합성을 성찰하는 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두 개는 신학 이론 형성 과정에서 볼 수 있고, 마지막 하나는 다분히 2차적인 작업으로 신학에 대한 비평을 말한다.

설교는 성경을 출발점으로 삼지만,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이 청중의 삶에서 현실로 나타나도록 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현실이 되고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 기독교 창조 신앙에서 핵심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혹은 하나님의 뜻이 현실로 나타날 때 세상이 선하고 아름답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고 있지만, 창조 신앙의 핵심은 세상이 하나님 말씀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처음 상태에서 얼마나 벗어났고,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신화적인 언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이든 아니면 국가적이든 다분히 종말론적인 경험을 전제한 신앙고백이다. 

과 마음이 황폐해진 상태에서 더 이상 소망할 것이 없다고 여겨질 때, 그래도 소망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될 때, 다시금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또 그 말씀대로 살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심리적인 좌절과 국가의 멸망 그리고 세상의 혼돈을 경험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면 세상은 다시금 평화롭고, 하나님나라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창조 신앙은 이것을 고백하고 또 기대한다.

설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그 말씀대로 세상을 살도록 해서, 결과적으로 세상이 하나님 말씀대로 되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변화되도록 한다. 생각하는 방식과 세상을 보는 관점, 삶과 태도, 그리고 세상이 바뀌길 기대한다. 설교는 말씀에 따른 창조가 오늘날 상황에서 재현되길 기대하며 행해진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추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고, 하나님나라의 현실을 제시한다. 설교는 하나님을 말하는 성경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교회의 하나님 경험을 성찰하면서, 청중이 성경 속 하나님을 고백하도록, 또 성경 속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대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신학함의 한 방식이다.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 경험, 혹은 하나님 부재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돕는 목회는 신학과의 관계에서 볼 때 다분히 전방 상황이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고, 그동안 배운 신학으로 잘 설명이 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목회자에게 위임되는 설교 역시 마찬가지다. 설교는 현장성을 매우 중시한다. 예배에 참석하는 대부분의 성도는 기존 신학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경험을 갖고 오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은 경험을 갖고 예배에 참석한다. 설교는 가능한 한 공동체가 수용하는 신학에 근거해야 하지만, 청중들이 식상하게 느끼는 설명인 경우엔 교회 밖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한다.

예컨대, 법륜 스님의 '즉문즉답'에 기독교인들이 참가하여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는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는 전방 상황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신학자는 설교자들이 겪는 곤고함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문제를 해결할 신학적 설명을 제시해야 한다.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서 제기된 '인간의 고통과 하나님의 침묵'의 문제에 대한 고민들을 신학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설교는 성도들의 하나님 경험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나, 새로운 하나님 경험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설교는 기존의 신학적인 성찰에 기반을 두지만, 새로운 신학함을 촉구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신학함의 한 방식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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