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들꽃향린교회 5월 22일 주일예배 설교 내용입니다(제목: '우리에게 여성은 누구인가?' 본문: 창세기 2장 18-25절). 허락을 받아 전문을 싣습니다. - 편집자 주

이번 주간에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여성이 번화가 화장실에서 한 남성에 의해 칼에 찔려 죽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화가 났고" 그래서 죽였다는 말을 했다. 그 남자는 정신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일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혐오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얼마 전에도 16세 남성이 '화난다'는 이유로 엘리베이터에 동승한 20대 초반 여성을 벽돌로 수차례 가격해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그 여자는 죽지는 않았지만 그 일 이후에 혼자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겠는가 의심된다.

반면 어떤 이들은 "한 미치광이가 행한 사건을 침소봉대하지 말라", "개인의 일로 모든 남성을 범죄자 취급하지 말라"고 분개한다. 그 행위가 모두 정신병 때문인 것은 아니다. 정신병이 있는 사람의 범죄율은 정신병이 없는 사람보다 낮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인 서천석 씨는 "이 사건이 큰 이슈가 된 이유는 한 범죄자의 말 때문이 아니다. 그 범죄가 일어난 우리 사회의 위험한 현실 때문이다. 강력 사건의 희생자 비율이 남성에 비해 여성이 8배가 넘는 통계로 알 수 있듯 우리 사회는 여성들이 안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왜 여성들이 엘레베이터를 타고, 화장실에 가는 일상적 행위에 목숨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결국 이런 사건들은 여자들의 손발을 스스로 꽁꽁 묶게 만든다. 이런 어이없는 일들이 마치 생존 게임 같이 일어나는 상황에 "조심하라"는 말은 유효하지도 않고 아무 쓸모도 없다. 그럼 죽은 사람은 '조심하지 못해서'라는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된다.

가해자의 정신병적 증상을 잘 알 수는 없지만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여자가 자기를 무시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감히 여자 따위가 나를 무시해? 여자인 주제에…"라는 여성 혐오가 그 배경에 있다. 교회 카톡방에 한 교우가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여성 혐오는 즉시 와 닿는 용어가 아니다. 사실 더 적절한 용어가 있는데 '여성 멸시'를 쓰면 된다. 남자가 여자에게 지면 조롱거리가 되고 여자에게 무시받으면 화가 난다는 것 그 배경에 여성이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 문화가 있다.

한국 사회 여성은 아무리 잘나가 봐야 남성에게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선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저걸 갖고 싶다'는 섹스 어필이 되어야 남성에게 찬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여성 멸시 문화이다. 어떤 사람이 '내가 못생긴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지만 섹시한 여자를 엄청 좋아하는 걸로 봐서 여성 혐오는 아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여성 혐오에 수반되는 흔한 증상이다."

절대로 공감되는 글이다. 여성을 한 인격으로 보고 존귀하게 대하지 못한다면 그가 아무리 발정난 강아지처럼 여성을 쫒아다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성 혐오이고 폭력이다.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은 '불쌍하고 재수 없는 한 여자'와 '정신이상자 사이코패스 남자'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여성들이 일상처럼 느끼는 위협이고 공포이다.

신촌에서는 여성들이 필리버스터를 진행하고 있다. 오랫동안 억울하게 눌려 있던 여성들이 각자가 당한 '성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고발하고 있다. 아마 여성들은 저마다 한두 건씩은 남성에게 느닷없이 성적 희롱을 당해 본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붐비는 지하철에서 성적 접촉, 여학교 앞에 나타나는 바바리 맨, 느닷없이 술 마시다 몸 접촉을 하는 사람, 대체 그들은 '왜' 그러는 걸까? 그 답은 이렇다. 우리 사회에 그런 일이 통용되고 용납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되니까', '그렇게 행동해도 되니까' 가능한 것이다.

사회가 그런 일을 대충 용납하는 분위기이기에 그것을 고발하는 일도 항상 피해자 자신이 해야 한다. 그것도 엄청난 두려움을 이겨 내지 못하면 불가능하다. 목숨 내놓고 고발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아픈 상처를 자신이 드러내고 그것을 반복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온전히 들을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남녀 구도의 폭력 사건이 있을 때면 대다수 사람들은 "개인적인 일을 일반화하지 마라"고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증언하는 피해자들은 제3자에 의해 2차 피해를 입는다. 억울해 호소했지만 주변에서 오는 반응은 피해자의 상처를 감싸기는커녕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린다. "여자가 그럴 만했겠지", "왜 원인을 제공해", "그러게 왜 그런 놈을 만나서, 남자 보는 눈이 그러니…", "여자가 처신을 잘했어야" 등의 시선을 보내는 게 다반사이다.

그런 시선을 느끼는 여성이 직장인이고, 그런 일이 사내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면 피해자 여성은 결국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 반면 가해자는 직장을 활보하고 다니며 제거된 피해자를 도덕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어 수장시켜 버릴 기회까지도 얻게 된다. 게다가 피해 여성은 사회적으로 무능한 사람이 되고 경제적으로도 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약자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여성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러 차례의 연쇄적인 사회적 박피를 당하게 된다.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 벌어지고 있는데 이게 어찌 개인적인 일인가? 우리 사회가 크게 병들어 있기 때문에 생긴 문제 아닌가? 최근까지도 언론과 SNS에서 '○○녀'로 호명되는 것은 보았어도 '○○남'이 화제가 되는 것은 못 보았다. 매일 반복되는 젠더 폭력을 사적인 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아담, 창조에 대한 왜곡

기독인 중에 여성은 남성을 돕는 존재에 불과하고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으며 범죄할 때 여자가 먼저 남자를 유혹했기에 여자는 열등한 존재라고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 말씀을 오해하거나 왜곡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동시에 창조되었다. 먼저 지음받은 '아담'(adam)은 '남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인류'라는 뜻이다. 남자는 이쉬(ish)이고, 여자는 이샤(isha)이다. 이러한 남녀의 구분이 성서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세기 2:23)라는 대목이다. 여기서 처음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나타난다.

하긴, 여자가 없는데 어찌 남자가 있겠는가? 아담은 남녀 구분 이전의 사람 혹은 인류를 말할 뿐이다. 여자가 생기면서 동시에 남자도 생긴 것이다.

또 영어의 man을 사람 또는 남자로 보듯이(물론 이것은 서양의 가부장적 문명에서 남자만을 사람으로 여긴 언어의 흔적이다) 아담을 남자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좋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는 금지명령(창세기 2:17)은 여자가 생겨나기도 전에 남자에게 주신 명령이 된다. 그때 여자는 아직 창조되기 이전이다.

그렇게 된다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지 말라고 한 명령은 하나님과 남자의 약속이다. 여자는 약속의 당사자가 아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여자에게, 약속 당사자도 아닌 여자에게 온갖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정당한가? 만약 아담을 남자라고 하여, 남성의 우선순위를 고집한다면 적어도 죄의 기원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든가, 혹은 그 책임을 물으려면 아담을 남녀 구분 이전의 단순한 '사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죄는 여자가 먼저 지었다고 하는데 성서를 보면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라고 한다. 함께 있던 두 사람이 같이 먹었는데 그 차이가 얼마나 날까? 몇 초 차이가 날까? 그렇게 같이 먹고서 "네가 먼저 죄를 지었고 나를 유혹했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겁하다 못해 추접하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존재

창세기 2장 18절에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개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돕는 존재'로 지음받았으니 남자의 시중이나 드는 것이 여성 창조의 목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돕는다'(ēzer, azar)는 말은 주로 주어가 하나님일 때 많이 쓰인다. 따라서 이 말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직접 도우시는 존재'라는 데 있다. 여자를 '남자를 돕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남자)를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도우시는 귀한 존재의 짝을 주셨다는 말이다.

배필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크네그도'(kenegdo)는 대등한 위치의 상대자(counterpart)를 말한다. 창세기의 남녀 관계는 사랑과 존경으로 이루어지는 결합을 말한다.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창세기 2:23, 개역)는 아담의 고백문은 인류 최초, 최고의 사랑 고백이다. 남녀는 구원의 동반자로서 서로 보완해 주는 가운데 성숙하며, 서로의 완성을 향해 돕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평등한 성(젠더)

역사적으로 볼 때 남성은 여러 분야에서 여성들을 차별해 왔다. 기본적으로 역사를 history(his+story, 남성의 이야기)라고 부를 만큼 남성 중심이다. 역사는 남자들 이야기지 거기에 여성의 역사는 없다. 그래서 앞으로는 역사를 history만이 아니고 herstory와 함께 쓰여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차별은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성(sex)'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이라 타고나는 것이며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내가 이래야지", "계집이 이래야지" 하는 말 속에는 오랫동안 이루어진 성차별 의식이 누적되어 있다.

여성은 이미 가정에서 '여성다워야 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남성들은 '여성답지' 못한 여성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늘 비난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이렇게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이데올로기 틀로 차별적인 성 역할을 주조해 왔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을 차이에 근거해서 보지 않고, 평등한 개념으로 볼 때 부르는 성을 '젠더'(gender)라고 한다. 여성과 남성에게 차별적으로 부여된 성 역할은 본래 타고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사회 속에서 길들여져 오거나 사회적인 기대와 관습이 빚어 온 것으로 본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본래 타고난 차이점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교육되고 길들여진 차이라고 보고, '젠더'(gender:사회적 성)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새로운 용어인 젠더는 생물학적으로는 다르지만 근본에 있어서 평등한 성, 똑같은 가치를 가진 존재로서의 성을 말한다. 이것은 사회적으로도 동등함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의미와 의지를 함축하기도 한다.

남성이 어떤 실수를 했을 때, "남자니까 그렇지", "남자들은 별 수 없다"며 집단으로 남성을 매도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각자 개인 책임으로 여긴다. 그러나 여성이 실수를 했을 때는 다르다. 개개인의 개성이나 다양성은 사라진다. 여성 모두가 동질 집단인 양 간주한다.

"여자들은 별수 없다", "여자니까 그렇다", "여자가 돼 가지고", "여자가 솥뚜껑이나 운전하지 차는 왜 가지고 나와서…" 등 여성을 집단화, 일반화한다. 여자라는 통칭이 사용될 때, 상당수 부정적 의미, 집단으로 매도하는 경우에 사용한다. 

여성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들

첫째, 여성은 남성의 보조자라고 생각한다. 가사 책임은 남성이 맡고 여성은 단지 보조자이거나 부수입 정도를 챙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성은 당연히 여성보다 나은 직장과 보수, 빠른 승진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구조조정 1순위 희생양은 능력을 떠나서 언제나 여성이다.

둘째, 여성은 남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사회에서 하는 일이 남성에게 잘 어울린다고 보고, 여성은 밖에 나가 일하는 남성을 돌보고 보살피고 남성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존재로 여긴다. 따라서 여성을 평가할 때, 외모나 성적 매력, 남성에 대한 순종심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셋째, 여성의 신분을 기본적으로 남성과의 예속적인 관계에서 본다. 여성을 독립적 인격으로 보지 않는다. 남편이 먼저 돌아간 여성을 '미망인'(未亡人)이라고 하거나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미혼자'(未婚者)라 부른다. 여성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누구의 부인' 혹은 '누구의 엄마'라고 부를 뿐이다. 그렇지 않은 여성은 '무엇인가 부족하거나 불쌍한 여자'라 여긴다.

넷째, 여성이 피해자라도 비난은 여성이 받는다. 여성을 비난한다. 이혼의 경우도 남편 잘못으로 이혼했음에도 여성에게 이혼 책임이 있는 양 낙인찍는다. 성폭력, 스토킹 모두 여성이 피해를 당했지만 가해자는 당당하게 활보하고 다니고, 여성은 피해자이면서도 직장조차도 나갈 수 없게 된다.

다섯째, 성차별은 쉽게 인식되지 않는 이데올로기이다. 성차별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행해져 왔기에 이미 자연스러워져서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쉽게 의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별다른 거부감 없이 성차별적인 삶을 살고 미래 세대에게도 성차별적인 삶을 살도록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성 차별의 현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드러나는 여성 차별의 구체적인 현실은 어떠한가?

1. 복합적인 사회적 요인에 따라 여성의 경제활동 욕구는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으나 여전히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낮고 임시적이다.

2. 여성의 경우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규모 사업장에 집중되어 있고, 73% 이상이 비정규직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확대와 함께 실업의 확산, 비정규직 확대, 고용 불안정 등의 현상은 여성에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여성의 빈곤은 심화되고 있다.

IMF 통제 이래 한국 사회에 구조조정, 정리 해고로 인한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해졌지만 이를 성에 따라 구분해 보면 해고 이후 비정규직으로 전락한 노동자 대부분이 여성이다. 이는 단순한 비정규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여성 학살', '여성 제거'임을 알 수 있다. '카트'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가뜩이나 저임금 노동을 하는 여성들을 대규모 비정규직으로 내모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연령대로 남녀 비정규직 비율을 보면 어느 연령대에서 여성 비정규직 비율이 남성의 7배가 넘는다. 성을 생각지 않고 보면 단순한 비정규직 문제이지만 성을 따져서 보면 이것은 '여성을 축출하는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여성학적 용어 중에 이렇게 모든 면에서 예민한 의식으로 성의 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을 성 인지(性認知 gender sensitive/gender cognitive/gender perspective)라고 한다.

3. 채용, 승진, 임금, 보직, 훈련 등에서 성차별적 관행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지금도 남성들은 여성에게는 단순직, 서비스직이 적합하다고 여기며 여성의 노동은 사회경제의 보조적, 부차적 역할로밖에 취급하지 않는다.

4. 모성보호와 직장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지원이 미비하고 현실적인 조치가 부족하다.

5. 유엔에서는 매년 여성 권한 척도를 발표하여 각국에서 권력과 의사 결정에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할당제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참여 정부 때 공무원 여성 할당제 등을 도입해 개선되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여성의 대표성이 낮고, 정치 참여율 또한 낮은 편이다.

1995년 베이징 세계 여성 대회에서 성 주류화(性 主流化, gender mainstreaming) 개념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여성과 관련된 이슈를 별도 이슈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여성 이슈를 모든 정책의 주류에 통합시켜 다루어 나갈 것을 말한다.

즉, 정책이나 행사가 남성 위주로 진행되고 단지 한두 명의 여성을 구색 맞추기 식이나 보조적 역할, 또는 약자를 보호하는 자선적인 차원으로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책과 행사에서 근본적으로 양성평등한 가치가 구현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기존 남성 중심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기구, 조직 및 주류 영역이 성 인지적으로 재편되는 주류의 변환을 포함한다.

6. 여성 할당제(젠더 쿼터 시스템 gender quota system)가 각 분야에서 의무화되고 있다.

할당제는 여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분야에 여성이 일정 비율 진입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한시적 조치이다. 이것은 거꾸로 남성을 역차별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유엔 여성 차별 철폐 협약에서 "오랫동안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여 남녀 간에 현격한 격차가 야기되었기 때문에 남녀평등을 효과적으로 촉진하기 위해서는 잠정적이나마 여성을 우대하는 방법을 채택할 수 있으며 그것은 남녀 차별로 간주되지 않는다"(제4조 제2항)고 규정하고 있다.

스웨덴의 경우 모든 부문에서 한 성이 40% 이하가 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는 사항을 두고 있다. 어느 직업이건 양성평등하게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취지이다. 타이완과 필리핀에서는 정치 부문에서 40~50% 할당제를 두어 여성 국회의원 수를 대폭 늘이는 효과를 거두었다. 우리나라는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 연합 여성 회의가 권고한 안을 채택하여 2010년까지 사회 각 부문에서 여성 참여를 30%에 이르도록 정한 바 있으나 현재까지 이에 미치지 못한다.

한 만화가의 '지금이 괜찮지 않다고 말해 줘'라는 만화가 가슴을 울린다. 그 이야기를 새기며 글을 맺는다.

여자라서 죽었다.
많은 여자들이 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한 달 전 길 가다가 어느 미친 놈에게 맞기도 했는데
그놈이 휘두른 것이 주먹이 아니라 칼이었다면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매장에서 옷 입을 때 어디 몰카가 없는지 살펴야 하는 마음을 아는가? 
집 앞에 이상한 사람이 쫒아왔다고 공포에 떨어야 하는 마음을 아는가?
한쪽은 맞고 있거나 떨고 있는데
다른 한쪽의 침묵을 바라보는 마음
"저건 미친 놈이고 나는 아니잖아!"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수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쪽의 마음을 헤아려 줘
왜 내가 스토킹을 당하고도 직장을 내가 그만두어야 돼?
왜 탈의실에서 긴장을 해야 돼?
왜 나만 조심을 해야 돼?
나는 왜 이렇게 불안에 떨어야 돼?
우리가 같은 시민이라면 이런 일에 같이 화내고 분노해야지 
왜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니 내게 뭐라 하지 말라고 만 해?
같이 말해야지
모든 시민이 안전하도록
재발 방지하라고
여성 혐오는 사라지라고
항상 나만을 따라다니며 보호할 수는 없잖아
그럼 나만을 보호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안전할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지금이 괜찮지 않다"고 말해 줘,
정말 "나였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너무 많은 여자들이 하고 살잖아
이런 일이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일들에 대해 함께 말해 주길
여자한테 말고
여자가 겪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해서

김경호 / 들꽃향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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