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자신을 비워 내고 비워 냄으로써 자신이라는 '질그릇' 속에 '보화'를 채우는 것에 전념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이 사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역사의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초조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61쪽)

▲ <김교신, 한국 사회의 길을 묻다> / 김교신기념사업회 지음 / 홍성사 펴냄 / 196쪽 / 1만 5,000원

이른바 <성서 조선>으로 '조선산 기독교', '실천하는 신앙관'을 표방한 '김교신 선생'을 두고 한 말입니다.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김교신, 한국 사회의 길을 묻다>(홍성사)에 나오는 내용이죠.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산 기독교'를 내세운 김교신 선생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엮은 '김교신 알아 가기' 첫 번째 책이죠.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그 시절 신앙관은 다채로웠죠. 그중 '영적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친일 부역'으로 교회 몸뚱이를 불린 이들도 있었고, 신앙을 이념화하여 민족운동 수단으로 삼고자 한 이들, 사회 계몽을 주창하며 외형적인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혈안인 신앙인들도 있었죠. 그들 유형과 오늘날 신앙 유형이 다르다 해도 그 속내가 오십보백보인 경우가 많겠죠.

그런 시대적인 상황과 신앙 유형 속에서 김교신 선생은 '조선산 기독교'를 내세우며 차별화된 신앙 행보를 보여 줬습니다. 교회의 물량주의나 세속화를 경계한 채 순전한 기독교를 표방했고, 그만큼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는 실천적인 신앙관을 강조했죠. 한마디로 신앙과 삶과 역사가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적인 신앙관이었습니다.

늘날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길을 찾는 걸까요? 오늘날 한국교회에 예배는 있지만 실제적인 삶이 없기 때문이죠. 믿음을 추상적인 용어로만 생각할 뿐 구체적인 삶과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죠. 개인 구원과 개인 영달에만 치중할 뿐 사회적인 구원은 등한시하며 살고 있는 까닭이죠.

에스더와 김교신

요즘 새벽 기도회 시간에 에스더서를 읽고 있습니다. 에스더서는 역사적으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중간에 끼어 있는 책이죠. 페르시아 대왕 고레스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유다 민족 1차 포로 귀환을 명령하죠. 그때가 B.C. 538년이었습니다.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가 1차 포로 귀환자들, 곧 여자와 아이들까지 20만여 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죠.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린 뒤 곧장 무너진 성전을 재건했죠. 물론 방해 세력이 등장해 23년에 걸쳐 그 공사가 진행됐죠.

그 무렵, 페르시아 제국의 권력은 얽히고설키죠. 고레스 대왕이 죽고, 그 아들이자 폭군인 캄비세스(Cambyses)가 통치하고, 그 뒤 잠시 스메르디스(Smerdis)가 정권을 잡는가 싶더니, 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다리오(Darius I)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죠. 그리고 그의 재임 중에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죠. 그때가 B.C. 515년이었죠.

다리오 왕 사후 권력은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에게 넘어가는데, 그가 바로 에스더서에 나오는 아하수에로(Ahasuerus) 왕이죠. 그의 아내 와스디(Vashti)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 곧 아닥사스다 어머니이고,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이 느헤미야였죠.

아닥사스다 왕 집권 초기 에스라는 2차 포로 귀환자들 곧 8천여 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돌아가 백성들의 심령을 재건코자 했죠. 하지만 홀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 허락을 받아 3차 포로 귀환자들, 곧 18만여 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와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함과 동시에 백성들 심령까지 에스라와 함께 굳게 세웠죠.

바로 그 아하수에로 왕 통치 시절에 있던 사건 기록이 에스더서 내용이죠. 에스더서를 읽어 나가면서 놀라운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말살당할 유다 민족이 기사회생하는 '부림절' 역사는 보여 주고 있는데 그를 주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 없었죠. 물론 그것 때문에 정경 논란이 일기도 했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주관하신 분이시죠. 아하수에로 왕이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127개 지방1)을 다스렸고, 미색과 도도함을 갖춘 와스디를 왕후로 삼았어도, 그 나라 총리요 2인자인 하만에게 유다 민족을 도말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 할지라도, 권력자들 뜻대로만 진행되는 게 아니었죠.

아하수에로 왕은 통치 3년의 시점에 6개월간 잔치를 벌였고, 또 7일간 잔치를 배설했죠. 그때 왕후 와스디로 하여금 문무백관들 앞에 자태를 드러내도록 하는데, 왕후 와스디는 끝내 그 명령을 거절하죠. 그때가 B.C. 483년 겨울철이고, 아들 아닥사스다를 임신한 기간이라2) 술 취한 사람들 앞에 자신을 보여 주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겠죠. 그런 그녀의 오만함이 그와 같은 무례함을 드러낸 것이었죠.

그러나 그녀가 폐위된 것은 에스더를 왕후로 삼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유대 민족의 딸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고아처럼 자라야 했던 에스더,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포로로 끌려간 속국민의 아녀자로 살아야 했던 에스더, 페르시아 지배 제체에서 소수민족의 비애를 안고 살아야 했던 여리디 여린 에스더, 그런 에스더가 수많은 궁녀를 제치고 왕후로 간택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었죠.

그때가 왕후 와스디가 폐위된 지 4년 뒤의 일로, 아하수에로 왕이 그리스와 전투를 벌인 그 유명한 살라미스(Salamis)해전 직후로3), B.C. 480년 일이었죠.

그뿐이 아니었죠. 아말렉 족속 후예요, 페르시아 총리인 하만이 기스의 후손 모르드개와 그가 속한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 했지만, 그 모든 상황이 역전되었죠.

몰살 위기에 처한 유다 민족을 위해 에스더가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선 것도, 잠 못 이룬 왕이 궁중 일기를 읽으며 모르드개의 공적을 알고 그를 치하한 것도, 모르드개를 매달고자 세운 50규빗 장대에 하만이 매달린 것도, 하찮은 소수민족을 멸절시킬 날로 하만이 '부르'(פּוּר) 곧 '제비뽑기식'으로 뽑은 아달월 13일이 오히려 유다 민족이 기사회생하고 민족적인 자존감까지 드러내는 부림절(the Feast of Purim)의 새 역사가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런데 그같이 하나님 섭리에 신실하게 응답한 사람이 있었죠. 바로 에스더를 두고 하는 말이죠. 그녀는 추상적인 신앙관을 벗어나 삶의 구체성을 지닌 믿음의 자세를 드러냈죠. 그녀의 구원관은 개인 영적 구원과 개인 부귀영화, 곧 개인 영달에만 매몰된 게 아니었죠. 그는 사회 구원에도 한 몸을 바친 셈이죠.

그녀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 준 예수님의 기도와 흡사했죠. 그만큼 그녀는 신앙과 삶과 역사가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적인 신앙관으로, '김교신의 신앙관'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무쪼록 김교신 선생의 발자취와 에스더의 신앙관을 좇아, 오늘날 한국교회가 바른 길을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영적인 구원과 육적인 구원,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하나로 통합하는 한국교회, 교회의 물량화와 세속화를 경계한 채 순전한 기독교를 표방하는 한국교회,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실천적인 삶으로 보여 주는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해요. 더디 가더라도 신앙과 삶과 역사가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적인 교회를 이루어 갔으면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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