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수 박사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는 주제로 다섯 차례 글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1. '설교=하나님 말씀'으로 이해하게 된 배경
2. 설교는 선지자, 혹은 사도적인 것인가?
3. '설교=하나님 말씀'이라는 주장의 의미론적 한계
4. '설교=하나님 말씀'이라는 주장의 인간학적 한계

설교자나 청중 가운데 누가 정의를 내리든 나는 '설교=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의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 이유로 두 번째는 인간학적인 한계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설교자와 청중 모두가 인간으로서 죄의 본성을 갖고 있음을 고려하지 않은 정의다. 앞서 간단하게 언급했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설교자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먼저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는 점에서 첫 번째 청중이다. 설교 본문을 읽고, 또 묵상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기대하는 설교자가 가져야 할 태도는 성령이 성경 본문에서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 준비 과정에서 가장 기본에 해당하지만, 자주 생략된다.

설교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목회자와 강단 위에서 설교하는 설교자는 구분돼야 한다.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모두가 설교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오직 강단 위에서 설교하는 사람을 말한다. 설교자는 부름을 받고 설교를 행하는 사람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온 후에는 더 이상 '설교자'가 아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 있을 때도 아직 '설교자'는 아니다. 강단에서 내려온 후에도 설교자로서 행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의 부름을 받고 설교자로 서기 위한 준비 과정이나 설교 후의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듣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또 자신이 설교하기 이전에 먼저 청중에게 귀를 기울이는 태도는 설교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설교자는 대체로 본문 주석과 해석으로 얻은 결과를 설교 메시지로 전한다. 이런 경우 설교는 성경의 의미를 전하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성경을 해석하고, 거기서 얻은 의미를 알려 주는 일이 설교일까?

설교는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가

초대교회 설교는 신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로 새롭게 읽고 또한 이해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단순히 구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난 하나님 뜻을 청중들 삶과 연관해 선포하였다.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성령 하나님 역사임을 증거하였다. 특히 서신서에서 볼 수 있지만, 이단과의 논쟁이 설교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신·구약성경이 확립된 후 고대와 중세의 설교는 신·구약성경을 읽고 간단하게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성경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배에서 설교란 당시 일반인이 성경, 곧 하나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같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양피지는 비쌌고, 언어는 서민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설교는 성경을 읽어 주고, 그 뜻을 밝혀 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기에 성경이 번역되고 또 인쇄술 발달에 힘입어 성경은 널리 보급되었고, 청중들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설교의 관건은 성경을 읽는 것보다 그 의미를 밝히는 일이었다. 설교는 청중들이 일상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어야 했다.

근대와 현대를 거치면서 설교는 내용과 형식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교회는 과학기술 혁명 시대의 문제와 도전에 적합한 대답을 주어야 했다. 이런 필요성에 따라 설교는 단순한 성경 해석이 아니라 공적인 강론 성격을 띠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에서 경험하는 삶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강론이었다. 곧 성경을 매개로 얻은 주제에 관한 강론이 많았다.

오늘날 성경 주석과 해석으로 설교를 이해하고 실행하는 일은 성경 본문과 전혀 무관한 말을 늘어놓는 설교에 비하면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리고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디다케(가르침) 전통이나 지혜 문서의 성격을 갖는 것도 설교라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성경 해석으로 얻은 의미를 그대로 전하는 일과 그것을 설교로 선포하는 것은 구별돼야 한다. 무엇보다 성경 주석(해석)은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을 설교에서 전하는 것은 현대 기독교인들의 경건한 삶을 돕기 위해서는 부족하다.

설교=성경 해석?

한편, 성경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 자신이다. 따라서 만일 성경 공부가 성경 내용과 그 의미, 곧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숙지하는 데 목적을 둔다면, 설교는 성경 본문의 의미 앞에, 곧 하나님 앞에 청중을 세워 놓는 작업이다. 성경 해석은 설교 준비 과정에 속하며, 설교는 성경 해석으로 만난 의미를 청중과 소통하는 행위다.

설교 준비 과정에서 얻은 내용을 설교의 실제에서 반복하는 일은 불필요하다. 설교는 설교자의 성경 해석을 전제하고 행하는 신앙 행위이다. 성경 해석을 하지 않은 설교가 잘못된 신앙으로 이끄는 경우가 있어서 설교를 성경 해석으로 보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설교의 본질은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소통하는 것에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 해석은 설교에서 매우 중요하다. 보기에 따라서 성경 해석 자체가 설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교를 성경 해석만으로 볼 수는 없다.

성경을 해석해도 설교는 성경의 의미, 곧 하나님 앞에 청중을 세워 놓는 일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 섰듯이, 그렇게 청중 역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돕는다. 결과적으로 설교는 청중이 설교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직접 서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한다.

설교를 위해 성경 본문을 묵상하고 해석하는 자는 성경 속 하나님을 본문의 의미로 발견한 후에, 곧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음의 네 가지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 성경 본문에서 증거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 나는 성경 본문에서 어떤 모습으로 발견되는가?
-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 내게 말씀하시고, 나를 설교자로 세우신 하나님은 나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청중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시는가?

위의 네 질문에서 설교자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또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이 변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는다. 그 변화가 먼저 나 자신에게 일어나도록 할 때,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심지어 불가능한 일인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먼저 나에게 일어나도록 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공유하고 있는 자로서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설교자는 심각한 내적 고통을 겪고 심지어 고난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런 갈등 상황을 겪어 본 설교자라면 청중들에게 성경 의미만을 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무작정 "~해라" 혹은 "~하지 마라"고 말할 수 없다. 설교 중에서 가장 쉬운 설교는 윤리적인 당위성으로 포장된 것이다.

설교할 때 주의할 점

먼저 하나님 앞에 직접 서 본 설교자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거나 혹은 당위적인/윤리적인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대해선 단호하지만, 대체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돌보고 그들을 도우려 노력한다.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함께 고민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으려 노력한다. 공감하고 위로하며, 청중들이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도록 돕는다. 이럴 때 설교자나 청중 모두 설교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설교자 자신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인지 과정을 거쳐 의미를 아는 데 그치고, 청중의 변화를 기대하면서 그것을 전하려는 데 열심일 뿐이다. 스스로 그 의미 앞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자신에게 너무 지나친 요구라고 생각할 경우, 설교자는 성경 의미를 자신이 보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설교자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자신에게 더욱 집중하려는 경향을 본성적으로 갖는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보다 인간의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인간의 생각과 뜻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관철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려 하고, 심지어 판단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상 위에 두고 결국 하나님처럼 되려 한다.

성경 의미를 알고 전하는 일에서 크게 부각되는 존재는 하나님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설교자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말씀을 적용하지 않으려는 설교자는 그만큼 인정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폭로하는 셈이다. 이들은 현대판 영지주의자(심오한 지식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것을 중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와 다르지 않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 물으셨다. "내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그때 솔로몬이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것은 강한 왕권이었지만,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부귀와 영화도 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운 마음, 듣는 마음을 구했다. 왕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또 왕으로서 백성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왕이 되길 원한 것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부귀영화나 강한 왕권은 물론이고 전무후무한 지혜의 능력을 주셨다. 다만 듣기를 원했을 뿐인데도 하나님은 더 많은 복을 주셨다. 그런데 말년에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죄인으로서 설교자는 전하려 할 뿐 들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성도들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자신이 말할 것을 찾기 바쁘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고민과 문제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열망이 없다.

청중에 앞서 먼저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기보다는 자기 생각과 말, 지식을 전할 가능성이 크다. 해석에는 언제나 해석자의 선지식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문제는 설교자 자신이 그 앞에서 서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청중을 하나님 앞에 이끌고 갈 수 없는 것이다.

'설교=하나님 말씀'이라는 주장은 위험한 모험

한편, 설교를 준비할 때 필요로 하는 아이디어는 대체로 청중이 마땅히 들어야 할 것들로 선택된다. 절기에 따라, 혹은 행사에 맞는 메시지, 혹은 교회 문제와 관련해서, 혹은 말하고 싶은 주제에 맞는 아이디어가 설교자가 먼저 들어야 할 말씀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오히려 설교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나 시대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메시지를 찾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다면, 기껏해야 설교자를 감동시킨 메시지다. 사정이 이러니 설교자 개인 관심 범위에만 머물러 있는 설교를, 듣는 자 역시 하나님 말씀으로 들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설교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는 기대도 없고, 설교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 아닐까?

이처럼 설교자 역시 인간으로서 죄인이기 때문에 '설교=하나님 말씀'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모험이며, 인간학적인 한계를 넘어선다. 성경 의미 앞에 서서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본 경험이 있는 설교자라면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바르트는 말한 설교자의 곤고함을 염두에 둔다면 말이다. 다시 말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니 설교자는 얼마나 곤고하겠는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바르트는 그럼에도 목사로서 해야 하는 일이 설교라고 보았다. 그러니 목회자에게 얼마나 겸손하고 또 성실한 태도가 요구되겠는가. 또 설교 행위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길 얼마나 간절히 기대하겠는가. 또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행할 것인가.

바르트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설교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겸손과 감사와 성실이다. 그리고 설교를 준비하는 설교자가, 설교 후 교회를 떠나는 청중들이 성령의 임재를 설교 시간 가운데 경험하길 간절히 기대하는 마음이다.

설교자는 먼저 듣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먼저 듣는 자다. 자신이 먼저 들은 것을 전한다. 들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운 후에 자신이 경험한 변화를 증거한다.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성도들 말에 귀를 기울인다.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자신에게 이뤄지도록 하고, 하나님의 행위가 먼저 자신에게 나타나도록 하고, 하나님의 뜻이 먼저 자신에게서 세상에 나타나도록 한다. 그 후 증거와 경험과 확신을 갖고 청중에게 전한다.

곧, 설교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경험하고 또 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적어도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면, 그것을 위한 증거들을 탐색하여 전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비록 설교라 해도 단지 인간의 말에 불과하다.

성도들이 설교자를 경건하게 보는 이유는 설교 내용 때문이다. 곧 내용과 관련해서 설교자가 먼저 그것을 경험했음을 전제하고 듣는 데 익숙해져 있다. 설교자가 이미 선한 사람이 되었느냐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살고 있느냐 문제다.

청중은 어떨까? 앞서 죄의 본질은 하나님 은혜보다 자기 뜻과 의지를 더 앞세우고 세상을 판단하며 살려는 데 있다고 했다. 청중 역시 죄인으로서 예외는 아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올바른 말씀을 전한다 해도, 청중은 온전히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들으려 한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성도는 대개 교회에서 순종하는 자로 보인다. 그런데 단지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과 일치해서 귀를 기울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만일 좋다는 느낌을 넘어 자신의 철저한 변화를 요구하는 말씀을 듣는다면, 자신을 내려놓고 오히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라는 말씀을 듣는다면, 자신을 내려놓으라는 설교를 듣는다면, 그래도 과연 그 말씀에 순종하려 할까? 성경에 보면 그렇지 않다는 몇 개 사례가 나온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부를 포기하지 못했고, 종교 지도자들 역시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쉽게 버릴 수 없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서길 주저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는 변화를 위한 의지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들 현실에서 청중은 어떨까?

청중의 반응, '하나님 말씀' 증명하는 기준 될 수 없어

인간의 본성을 공유하는 청중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필요를 따라간다. 대형 교회로 사람들이 몰리는 모습을 보라. 좋은 교회라며, 자신을 성장시켜 줄 교회라며, 자녀의 신앙 교육을 위해 적합한 교회라며 몰린다. 말씀에 대한 열정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 자신의 갈증을 풀어 주는 설교를 기대하고 또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간다.

그런데 만약 그들에게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말씀을 한다면, 그래도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순종할 수 있을까? 그런 성도들이 있지만, 만약 그 수가 많다면, 한국교회가 이렇게 비난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청중은 자신이 듣기에 좋은 설교를 바라지만, 변화를 요구하는 좋은 설교에 항상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니다. 순종보다는 예배 행위를 더 좋아한다. 나쁜 설교라도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듣는다면, 그 설교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고 순종한다. 참다운 설교를 듣지 못해도, 또 자기 삶을 나누는 교제가 없어도 예배에 참여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반복하여 말한다면,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라느니,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느니 하는 주장의 정당성을 청중의 반응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들이 아무리 좋은 설교라고 말해도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 아무리 좋지 않은 설교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는 것 역시 입증하지 못한다.

만일 청중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옳다면, 예수님의 설교는 하나님 말씀이 아닐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 역시 마찬가지다. 바울 사도는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또한 많은 사람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신실한 설교자가 다만 교회가 작다는 이유로, 시골에서 목회한다는 이유로 무관심에 묻혀 사라졌는지 모른다. 이런 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청중은 물론이고 설교자 역시 죄인으로서 인간학적인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의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단언할 수 없고, 청중이 듣기에 좋고 또 심지어 변화가 일어난다 해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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