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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는 교회와 무관한가?
제도로 여성 차별 정당화한 한국교회…이제라도 교회 여성이 이야기해야 할 때
  • 오수경 (manseosk@gmail.com)
  • 승인 2016.05.21 21:50

요즘 '여성 혐오'와 교회의 연결 고리에 관해 자주 고민하게 된다. 특히 지난 5월 17일 서울 도심 공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 살인 사건'을 접하고서는 그 고민이 더 깊어졌다. 우리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인들은 OOO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논의에 익숙한 사람들이니 본능적으로 그런 질문을 떠올리지만 마땅한 대답이 따라오지 않는다. 우선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동시대를 사는 여성과 남성으로서 이 사안을 찬찬히 바라보며 애도와 공감의 과정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함께 고민할 주제가 떠오르지 않을까.

'강남 살인남'은 왜?

먼저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교회는 '여성 혐오'와 무관한가,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을까. 조심스레 고개를 저어 본다. 일단 '여성 혐오증'으로서의 뚜렷한 증상은 쉽게 찾기 어렵다. 친절하고 신실한 '교회 오빠'들이 그럴 리 없다. 불의한 여성 억압과 차별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려 했던 근대 기독교 역사의 흔적도 기억하고, 제한적이지만 성 평등을 추구하려는 각성과 노력도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꼰대나 폭력적인 남성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특별히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제도의 한계나 구조적 차별도 존재하지만, 그것을 '혐오'라 명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교회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 곳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뭔가 찜찜하다. 그동안 교회에서나 남성 그리스도인에게 받았던 그 깊은 '빡침'의 근원은 뭐였을까.

이번 사건을 겪으며 조금 선명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 살인남은 "여자가 무시해서" 범행 장소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다 그 화장실에 들어오는 첫 번째 여성을 칼로 찔러 죽였다. 조현증을 앓았다느니, 어쩌니 따질 것도 없이 명백하게 여성 혐오에 의한 표적 살인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교회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 살인남은 목회를 꿈꾸던 신학생이었고, 자퇴 후에는 교회에서 일했다고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주로 영향을 받은 곳은 교회였다는 뜻이다. 그는 누군가의 교회 오빠나 동생이었을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그동안 교회에서 경험한 '불편한' 오빠들이 기억 저편에서 소환되었다. 가까이하기 싫은데 어쩐지 무서워서, 괜히 유난 떤다 여길까 봐 싫은 티는 안 내지만 같이 있고 싶지 않은 '형제님들'이 있었다. 우리는 무서워 피했지만 그는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했을 수 있다. 어떤 자매는 용기 내 괴로움을 호소했을 수도 있다. 그때 교회는, 다른 남성들은 뭘 했을까.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은 불편하거나 위협적이지 않았을 테니까.

한 가지 상상을 해보자. 그 살인남이 그날, 그 화장실에서 범행에 실패했다고 치자. 그는 주일에 다시 교회를 갔을 것이다. 혹시 다시 신학을 하여 목회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목회자가 될까. 지나친 상상이라고? 그는 '우리'와 다르지 않으냐고? 여신도를 폭행한 목회자나 전병욱 목사와 같은 인물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숙성되는 것이다.

너무 극단적인 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떤가. 그는 왜 유독 여성의 무시를 못 견뎌 여성을 살해하기로 작정했던 것일까. 그가 직접 밝힌 범행 동기가 사후 정당화를 시키는 발언이었다 치더라도 여성을 표적으로 정하고 살해한 정황으로 봐서 여성을 혐오해 벌인 범행이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혐오는 도대체 어떤 경로로 그를 지배하게 되었을까? 복합적으로 따져 봐야겠지만, 나는 교회에서 보고 자란 영향이 꽤 컸을 것으로 생각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는 드러내 놓고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 다만 여성 차별을 구조화시켜 왔다. 제도로, 성경 말씀을 들이대며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도록, 헌신과 순종은 하되 권위는 감히 갖지 못하도록 가르치고 실천했다. 그 결과, 다른 남성의 무시는 참아도 여성의 무시에는 분노하여 여성을 살해해도 되는(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여성 혐오의 모판, 범죄의 방조자

이번 사건을 그저 정신 병력을 가진 '미친놈’이라고, 다른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개별화시키며 타자화하여 '우리와 상관없는 일'로 만드는 것은 아무것에도 도움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타자화해서 교회의 은혜와 평강은 유지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강남 살해남'의 탄생을 방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교회 목사가 '딸' 을 죽이고 '아내'를 살해하고 심지어 '여자 교인들을 강간하고, 신학생이 위조지폐를 만들어 성매매하는 사건을 목도하고 있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더라도 교회에서 여성은 식당 봉사와 꽃꽃이 봉사에 동원되는 기능적 존재가 되거나 'OOO 목사(전도사)의 사모'로 호명될 뿐 남성과 동등하고 주체적인 존재로 인식되지 못 하거나 무시와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일상'을 살아 내고 있다. 이런 사건과 일상이 정말 나와 우리 교회와 무관한 일일까? 그저 개인의 일탈로 생겨나는 '근본 없는 미친놈'이 저지른 일이거나 '일부'의 문제일까? 일부의 문제라면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우리는 여성을 향한 교회의 구조적인 불평등, 일상적 차별을 진지하게 직시해야 한다. 적어도 교회는 여성 혐오의 모판이요, 범죄의 방조자 역할을 해왔다.

그렇기에 이 사건은 특수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고민하기에 합당한 보편성을 가진다. 그러나 그렇게 연결 짓기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우리의 무관심과 무지 때문이다. 교회와 많은 그리스도인은 복음 전도가 시급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하고, 이슬람과 동성애를 반대하여 교회를 지켜야 할 절대적 사명 앞에 고독하게 분투를 해야 하기에 젠더, 성 평등, 페미니즘 따위의 문제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역을 한다는 영역에서도 그 사회적 약자 카테고리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많은 그리스도인은 '교회는 여성을 차별하거나 혐오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신이 관심을 가질 분야라 생각하는 남성들은 거의 없으며 그런 것은 '기가 쎈' 여성이나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관심이 없으니 문제가 뭔지도 모르고, 그러는 사이 차별과 혐오는 단단하게 형성되고 '강남 살인남' 같은 이들이 교회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다.

그가 만약 교회에서 성 평등 교육이나 설교,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접했다면 어땠을까? 이번 사건은 결코 교회와 무관하지 않다. 교회에서 그동안 외면했던 위와 같은 주제들을 '우리와 무관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러면서 뻔뻔한 차별, 은근한 혐오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강남 살인남'은 교회 형제로, 전도사나 목사로 우리 곁에 존재할 것이다.

살기 위해서라도 말하고, 살리기 위해서라도 들어라!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이것이 꼭 교회 남성 그리스도인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남성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기운이 빠지기도 하지만 여성들의 기이한 무관심이 안타깝다. 여성 그리스도인들은 그동안 너무 교회라는 남성·가부장 중심의 체제와 공간에 길들여 왔다. 차별과 불평등을 내면화하느라 인내하며 순종했고, 지혜롭고 현숙한 여인으로 살기 위해 잠잠하도록 단속당하거나, 스스로를 단속했다. 그 결과 당사자 문제마저 너무 쉽게 교회 구조에 위탁하고, 남성 목회자나 리더의 권위에 기대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여성들이 침묵의 방과 순종의 울타리로 들어간 사이, 남성은 더더욱 무지의 탑을 쌓는 것이다. 여성이 이런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 한다면 교회와 남성에게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배워야 한다.

배움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SNS에서 그동안 숨죽여 견뎌 왔던 공포스런 일상, 불편과 부당한 현실에 관한 여성들의 고백이 봇물 터지듯 터지고 있다. 나는 그 고백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지혜의 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고백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교회 버전으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당연의 세계'가 당연하지 않음을 자각하며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아진 환경에서 안도하며 살 수 있다. 살기 위해서라도 말하고, 살리기 위해서라도 들어라.

※ 위 기사는 청어람 매거진에 발행된 글입니다. 청어람ARMC의 허락을 받아 전문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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