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사도 바울의 자기 고백이다. 나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생각하고 공감한다. 성경에 보면 천하에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럼에도 크리스천들은 자기와 타자에 대한 이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서로를 인정하는 열린 마인드가 필요할 것이다. 비동성애자들도 동성애자를, 역으로 동성애자들도 비동성애자들을 서로 이해하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구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자기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지침이 된다. 구원은 헬라어로 '소조(Sozo)', 혹은 '소테리아(Soteria)'인데 이 단어는 '건져내다, 치료하다, 위험으로부터 구출되다, 온전케 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전인적(영·혼·육) 치유, 전인적 회복, 전인적 축복 개념이다.

동성애는 늘 논란이 소지가 많은 이슈이다. 우선 기준은 교회 안에 있는 동성애자와 크리스천이 아닌 동성애자에 대한 관점으로 구분될 것이다. 자기 정체성을 크리스천으로 고백하는 존재라면 모든 진리나 가치 기준이 성경이어야만 하는 당위가 있다. 그런데 이들이 성경 진리와 충돌하면서 겪게 되는 내면적 갈등과 자기 성정체성 혼란에서 오는 고통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참으로 힘들 것이라 추측한다.

다양성의 최적화, 이 말은 다양한 의견 가운데서도 가장 성경에 근접한 근사치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말한다. 먼저 한국 기독교계 동성애자들을 대하는 방법이나 태도는 결코 은혜롭지도 않고,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의 모습이나 성경적 접근과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셨지만 '죄인'은 용서하고, 궁휼히 여기고 사랑하셨다. 성경을 어느 정도 알거나, 신학을 공부했든지, 오랜 신앙생활을 했거나 사회적 지식이 있다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반동성애에 대해 나름대로 견해를 피력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달라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들을 차별하거나 배제·정죄하거나 혐오 세력화하는 것보다 이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선이어야 한다. 차별이 아닌 거룩한 백성으로서 구별과 변화 지향이 필요하다. 차별과 구별은 다르다. 치유, 성경적 권세와 능력에 대한 적용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또한 타인의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정죄하거나 차별, 배제하는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예수님은 죄인이나 병든 자들을 결코 정죄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깨닫도록 했으나 모든 질병을 치유하셨다. 동성애를 정죄하거나, 연구나 세미나보다 더 큰 문제는 역설적으로 교회나 상담 전문가들의 치유와 은사의 한계 영역인지도 모른다.

전국에 수많은 교회가 건물을 세우기 위해 은혜 대출을 받았고, 그 이자로 한 달에 수천만 원, 수억 원을 지출하고 있다는 내용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사회적 소외자나 경제적 약자를 지원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재정 일부라도 지출해 동성애 치유 센터를 설립하거나 동성애자들을 조용히 초대해 따뜻한 식사와 차를 대접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인격적, 인간적, 신앙적 대화라도 시도하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일회적 이벤트가 아닌 지속적인 대안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 목회자들, 심리 상담  전문가라는 분들은 동성애자에 대해 언론이나 매스컴, 동성애 반대 글과 정죄가 전부라 판단한다. 적절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성경은 동성애를 어떻게 보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서로의 관계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며 생명을 출산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다(창 1:27-28). 성경적 세계관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정하신 질서와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인본주의적 세계관은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 세계관이기에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도덕적 상대주의와 문화상대주의, 다원주의를 용인하거나 수용하게 된다.

성경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면 동성애는 창조질서를 어긴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돔과 고모라 멸망에서 얻은 교훈에 바탕해 수간(獸姦), 남색(男色), 동성애 등 이상 성애와 남창(男娼)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엄하게 율법으로 금하였다.

예수님은 분명히 성적인 죄를 엄격히 경계하셨다. 음란한 욕망을 품게 한 마음의 성향까지 지적하셨다. 성경을 보면 동성애만 죄악으로 보지 않는다. 정상적인 혼인 관계 밖에서 하는 모든 성관계를 전부 죄악된 것이라 일관되게 언급한다. 하위 성 문화 확산은 사회구조나 가치를 무너지게 할 위험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래는 동성애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 구절들이다. 레위기 18장 22-23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가 된 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레위기 20장 13-14절(15-16절)에서도 언급한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이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신명기 23장 17-18절에서도 강조한다.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지니,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동성애자에 대한 극단적인 성경적 근거자들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역리(逆理)이며 성윤리의 타락이라 본다. 더욱이 선택적 취향으로,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불특정 다수에게 확산되어서는 안 되는 죄악으로 규정한다. 동성애자나 이를 옹호한 자들이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 주장해도 결국 죄이며, 타락한 심리적 자기 합리화라 말한다. '제3의 성'이나 '제3의 인간'이라는 말은 논리적 합리화나 자기 정당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문화인류학적으로 해석하고 강변해도 동성애를 변할 수 없는 성적 타락과 죄로 규정한다. 성경 진리로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는, 타협할 수 없는 일관된 반응이다. 열왕기상 14장 24절에는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열왕기상 15장 12절에는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라는 표현이 있다.

동성애는 '악한 자들' 아닌 '약한 자들' 문제

동성애 역사나 그 행위에 대해서는 고대 근동 지역의 오랜 기록들이 있다. 소돔과 기브아 사람들 이야기(창 19:1-25; 삿 19:13-20:48)이며, 이 때문에 동성애자는 영어 표현으로 '소돔 도시의 나쁜 자들', 소도미스트(sodomist)라고 칭해진다. 이것은 특히 우상숭배적인 이교의 매음과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왕상 14:24; 15:12; 22:46).

아낫(Anath) 여신은 '거룩한 자'라는 뜻을 가진 신으로 바알 신의 누이 또는 아내인 아세라, 아스다롯을 포함한 가나안 3대 여신 중 하나다. 성(sex)을 주관하는 여신으로, 젊은 여신의 정열과 흥분을 상징하며 그에게 바쳐지는 남성을 카데쉬(Qadesh)라 불렀는데, 이는 '남색하는 자'라는 뜻이다(왕상 14:24; 15:12, 22:46; 왕하 23:7).

일반적으로 성전의 남창, 또는 남색하는 자를 미동(美童, Male shrine prostitute)이라 부른다. '미동'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데쉬'(qadesh)는 '신성하다, 거룩하다, 구별되다'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 '카다쉬'(qadash)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문자적으로는 '거룩한 자'라는 뜻이나 이들의 행위는 그 이름과 상반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매춘을 엄금하셔서 이스라엘 백성 여자 중에는 창기가, 남자 중에는 미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신 23:17). 성경에는 이런 자들은 반드시 추방하고 우상을 없애라고 강조한다. 요시야 왕은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여호와의 전 가운데 있던 미동의 집을 헐어 버렸다(왕하 23:7).

그곳에서 미동들은 아세라 신에게 제사를 집전하는 여사제와 행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겔 16:16). 율법에서 이러한 행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다(레 18:22; 20:13). 미동이라 번역된 단어를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남창으로, KJV은 'sodomite'로, RSV은 'male cult prostitute'로 번역했다.

반동성애론자들은 동성애가 분명한 죄임에도 이를 희석하거나, 선천적 장애나 유전병 문제로 사실을 왜곡해 '소수 인권'으로 사회적 지지를 받으려는 의도로 여론화를 시도한다고 본다.

정신과 의사들은 동성애를 성적 일탈, 혹은 진단 가능한 장애로 보고 있다.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동성애는 가정환경과 개인의 경험 등, 후천적 영향으로 발생하며 유전적 요인과 관련이 없다는 게 일반적 견해이다.

동성애자는 선천적으로 태어나는 것인가? 아직까지 어떤 과학적 증거도 이 결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동성 매력 장애'(same sex attraction disorder)라고 상담학에서는 부르기도 한다. 같은 동성에 매력을 느끼고 끌리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하나의 행동(behavior)인가, 하나의 경향(orientation)인가? 하위 성 문화 확산은 사회구조나 가치를 무너지게 할 위험성이 존재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크리스천들 시각이다. 그런데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사람들을 크게 보자면, '악한 자'들이 있고 '약한 자'들이 있다. 살인, 강도는 악한 자들이다. 동성애는 '약한 자'들 문제인지도 모른다. 동성애는 문화적, 정신적, 의지적인 한계 등 다양한 원인의 문제이다. 죄인은 악한 자에 가깝다. 병든 자들은 약한 자들이다.

죄인은 회개와 용서나 징계, 병든 자들은 치료와 돌보아야 할 대상들이다. 물론 이를 명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다. 정죄와 비판에 머물 것인지, 말씀과 사랑의 치유와 회복의 대상으로 보고 궁휼한 마음을 품고 대할지의 차이다.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치유자로 언급하셨다.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동성애라는 문제보다는 치료의 하나님(Healing God, '여호와 라파')을 강조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치료하시는"(출 15:16) 분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26)

동성애자들에 대한 성경 진리의 폭력적 적용으로 동성애 혐오를 부각보다 개인적 돌봄, 공동체적 배려를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삼위 하나님이 보이시는 치유의 관점이다. 최근 기독교계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관심이 높다. 동성애 합법화 문제로 논란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한 성경적 대안은 쉽게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방송인 A 씨는 커밍아웃으로 방송가는 물론이고, 이미 다수 국민들이 그의 성 정체성을 알고 있다. 현재 그는 사회적으로 사회적 소수자를 대변하며 나름대로 자기 존재감과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 고충도, 안타까운 사정도 직, 간접적으로 들었기에 조금은 이해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고향에 방문해 부모님을 뵌 적도 있고, A 씨 어머니가 차려 주신 식사도 대접받은 적이 있다. 직, 간접적인 인연이 있다. 그의 부모님이 장로, 권사 직분을 맡고 있다. A 씨도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고백한다.

이런 내용을 언급하는 게 조심스럽다. 하지만 함께 고민하자는 취지이다. 이 시대에 '동성애'가 중요한 사회적 문제이기에 치유 사역 차원에서 언급하는 것이다. 사실 그를 위해서 기도도 많이 했다. 아직까지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가 언젠가는 반드시 주님께 돌아와서 영적으로 치유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안다. 그가 한번은 대전에 연극을 하러 온 적이 있다. 그의 친척 분들과 함께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이 끝나자 준비해 간 자료를 건네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탈의실로 향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A 씨 매니저에게 전해 주라고 해서 건네주었다.

아래 성경 구절과 주석을 확대 복사해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 건네준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성경 말씀을 통한 인격적 침해나 신앙적 폭력이 아니었나?'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때만 해도 동성애는 극히 일부만 노출된 시기였다. 그러나 나의 선한 의도를 이해했으리라고 추측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한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한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9-10).

성경은 동성애뿐 아니라 이성애자들 범죄도 용인 않는다

우리가 이들을 정죄하거나 배척하고, 외면하고, 비판하고, 사회적으로 차갑게 대하는 것은 쉬운 방법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상담학적, 의학적, 문화적, 영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A 씨에 대해 들은 몇 가지 내용 중 하나는 그가 어렸을 적에 좋아하는 친누나가 청소년 시절에 질병으로 일찍 숨졌다는 것이다. 아주 예쁜 여학생이었다고 한다. 그 집안이 대체적으로 재주도 많고 인물이 좋다. 어린 시절 누나의 사망, 이때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영적인 차원에서 큰 충격이나 사건이 있을 때 이를 틈타서 악한 영들이 역사하기도 한다.

우연히 그의 고모와 친누나와 함께 자동차로 서울에 가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A 씨 고모는 사실 내가 개척한 교회 전도사였고, 내가 신학대학원을 추천했던 인연이 있다. 대화 중 놀라운 내용이 드러났다. 내가 기도하면서 느낀 내용을 말하자 그 누나도 공감을 했다.

어느 용한 무속인도 그 말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여성 성향의 악한 영'의 역사에 관한 내용이다. 물론 교회 사역자나 크리스천들도 영적인 공격을 받는다. 모든 원인을 영적인 문제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단서임이 분명하다. 나는 사역자로서 필요하면 치유 사역을 한다. 성령의 감동과 은사로 하는 사역을 인정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A 씨의 영적인 면을 분석한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이 모델이다.

"그러나 내가 성령을 힙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라." (마 12:28)

A 씨는 언론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에 강제적으로 성적인 피해를 본 사실을 언급했다. 이러한 면에서 개인적 문제이면서도 사회적 문제이다. 그래서 선택적 성 취향이라고 쉽게 재단해서도 안 된다. 안타깝지만, A 씨 주위에 기도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에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이 직접 개입하셨다. 그리고 변화되었다. 하나님께 치유받고, 바울과 같이 쓰임받기를 기도한다.

교회 사람들 대부분은 동성애가 잘못되었다고 규정한다. 일반 사람들도 상식적으로 이를 인정한다. 그런데 성경은 동성애자들만이 아니라 이성애자들의 어떤 성적인 범죄도 결코 관용하지 않으며, 악행을 저지르거나 거짓 교리를 믿는 사람들처럼 분명히 죄악시한다. 동성애 행위가 횡행했던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지은 죄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악한 행위였기에 때문이다(레 18:22; 20:13).

욥기 36장 14절에서는 엘리후가 "남창에 드나든 사람들은 일찍 죽었다"고 말한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6장 9절,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죄 목록에 '남색하는 자'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1장 9-10절에서 율법이 지적하는 죄악에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하는 자'가 포함되었다.

기독교계가 동성애를 보는 몇 가지 관점이 있다. 종말적 현상이요, 인간 본성의 타락상을 여실히 증거해 주는 현상으로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배치되는 죄악이라는 관점과, 동성애가 창조주의 뜻이나 의도와 맞지 않다고 보지만 이를 죄라고 명시하지도 않았다는 관점, 이성애가 그렇듯 동성애도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이라는 정당성을 주장하는 관점 등이 있다.

예수님이 동성애를 언급하지 않아서 정당하다는 논리에 대한 반박은, 만약 동성애를 용납하려 했다면 예수님은 수간(獸姦)이나 근친상간도 용납하신다고 분명하게 언급하셨어야 한다는 점이다.

동성애, 정죄나 비판보다 치유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신구약 성경은 우상숭배, 형식 종교, 종교적 위선, 정치적 불의, 경제적 불평등, 타락과 방종, 이교 숭배 등은 그 시대 일반적 죄악이었기에 경고와 교훈을 준다. 선지자들이 동성애를 준엄하게 지적하지 않은 것은 언약 사회에서 흔하게 저지르는 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성적인 죄를 포괄하는 광역적 의미에서 음란을 뜻하는 '포르네이아'(막 7:21). 이 단어에서 '포르노'가 나왔다고 한다. 사전적 의미는 불법 성행위, 성매매, 비정절, 바람기, 간음, 이 모두를 의미한다. '음란죄' 자체가 하나님보다도 자신의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자기애'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끊어야만 한다고 한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을 정죄하고 비판하기보다는 '근원적인 치유'라는 관점에서 보자는 것이다. 이들을 오히려 궁휼히 여기고 치유와 배려 대상, 케어해 주어야 할 영혼들로 본다면, 이 영혼들도 사랑하고 감싸 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히 4:12)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 건강한 국민들 정서에 유익하지 않을 '퀴어 축제'는 경계한다.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이성애자들, 인기 연예인들이라도 이러한 대중적인 기존 사회 상식을 파괴하는 퍼포먼스나 축제에는 반대한다.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한 조항의 동성애 차별금지법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다만 종교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는 다르며, 교회와 불신자들 관점도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교회의 가치 기준은 성경이기 때문이다.

동성애자의 정당한 인권은 보호되어야 하며, 어떠한 부당한 차별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치가 성경의 가치를 초월할 수는 없다. 동성애가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 영역이라면 성경 진리에 근거한 문제 제기, 회개나 선포는 정당한 근거가 된다. 교회의 기준과 역할이 있다.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여건이나 환경을 만드는 것이 창조적 대안이다. 각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가적 차원의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관점을 옮겨 보면, 동성애도 문제이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회적 범죄들은 이보다 더 심각하다. 인명 경시 풍토, 살인, 강도, 교회 내 목회자들 재정 문제, 불의와 성적 일탈과 탈선 문제, 한국 사회의 알코올중독과 술 소비문화, 타락한 성 문화, 불의한 권력과 경제문제, 반사회적 사이코패스, 청소년 문제 등 동성애도 총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잘못된 행위를 책망하거나 징계하는 메시지도 있지만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유기다. '내버려 두는' 것이다. 로마서 1장에서는 이렇게 언급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세를 부여해 주셨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따르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은사와 권세를 주신다. 문제만 바라보거나 지적하지 말고 사건이나 문제보다 더 크신 삼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눅 9:1-2)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 이야기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인 이야기가 적혀 있다. 유대교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이 기세당당하게 이 여인을 잡아 예수님 앞에 두고 질문을 던졌다.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이 여자는 돌로 쳐 죽여야 된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주장은 무엇인지 물은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 한마디도 예의 주시한다. 그 말을 걸고넘어지려는 궤계였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요 8:6)

바로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율법 파괴자가 되어 종교적 심판 대상이 되는 것이고, 용서하라고 말하면 로마 식민지 국가였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로마의 국법과 사법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반란자가 되는 상황이다. 이중의 교묘한 덫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피하셨다. 그리고 엎드려서 땅에 무어라고 글을 쓰셨다. 잠시 후에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시 땅에다 무언가를 쓰셨다.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한 사람씩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 8:8-9)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0-12)

예수님은 이 여인을 용서하셨다. 그러나 분명하게, 확고하게 선포하셨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바로 이 여인에게, 죄에 대해 엄하게 경고하신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죄'라는 말은 '과녁에서 벗어나다'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뜻', '말씀'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성경은 동성애를 분명하게 죄로 규정하면서 금기시한다. 문제는 성경적 대처 방안이다. 교회가 이들에게 성경 진리와 언어폭력으로 지나친 수치심과 심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켜서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할 우려도 있다.

개인적으로 동성애자들 인권과 차별을 금지하는 법적 제도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대부분의 외국에서는 동성애자 인권이나 차별 금지를 살해나 폭행 행위, 고문이나 가혹 행위, 처벌이나 구금, 사형 등의 사안에 적용한다. 한국은 2013년에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에는, 이를 위반할 경우 2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강제이행금 3,000만 원 추가) 이하 벌금에 처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논란이 될 소지가 있는 법안이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 종교, 전과,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 국가 사회에서 이 항목들이 객관적으로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윤리, 인간 행위의 가치판단 기준과 규범이 되는 차별 사유라 한다. 헌법, 실정법, 자연법에서는 명백한 윤리적 차별과 차별 사유를 구분한다. 이것이 헌법의 기본 정신이다. 차별금지법안은 소수 동성애자들의 자유로운 삶과 인권, 차별 금지를 보장한다는 명목하에 헌법적 가치를 초월한 위헌 가능성도 있다.

'성적 지향', '성 정체성' 등 차별금지법 금지 사유, 대상, 상황 적용의 한계가 광범위해 기본적으로 교회 성경 공부, 설교에서 동성애나 죄악에 회개나 윤리적 메시지를 전하는 데 제약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럼 근친상간이나 수간이나 타락한 성적 취향까지도 허용해야 하는 모순이 존재한다. 잘못하면 소수자 인권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대다수 국민의 표현과 양심의 자유가 심각하게 억압된다. 이는 역차별이다.

모든 국민에게 보장돼 있는 윤리적, 가치판단 사항까지 법으로 규정돼 국가 구성원들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고 강제하고 있다는 합목적적 가치나 정당성 구비의 충족 요건이라는 점은 다양한 이해와 해석이 요구된다.

인간에 대한 최고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그런데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다. 성경에서 말한 의인이란 '회개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동성애자들이 죄인이고 약한 자들이라면 교회가 오히려 동성애자들을 인격적으로 배려하고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감싸 주고 보듬어 주고, 신앙으로 일으켜 세워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수께서 그 열두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 10:1)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최고의 사랑과 배려였다. 당시 사회적으로 기피 인물이었던 세리와 창기도 사랑하셨다. 그리고 각색 질병을 치유하셨다. 복음은 사랑과 용서와 치유의 능력이다.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행 19:11,12).

베드로는 성전 입구에서 구걸하던 지체장애인을 고쳤다. "금와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선포하고,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걷고 뛰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미했다.

오늘날 교회는 이와 반대로 금과 은은 많지만, 예수 이름의 권세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사도들에게 따르는 기사와 표적, 이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했다. 사람들이 칭송하며 믿게 되었고 주를 따르게 되었다.

성도는 '거룩한 사람'이란 뜻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2)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 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5-16)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니라." (딤전 4:5)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6)

거룩하지 못하면 주님을 볼 수 없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사역을 감당해야 할 가장 큰 기도원과 관련 교회들은 부도가 났다. 단적인 예로 수많은 사역자들을 가르쳤던 수원 큰 기도원 사역자인 모 목사는 기독당에 개입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성경적 치유는 고사하고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기도응답이 무엇인지, 자기모순으로 자기 정체성도 제대로 못 찾고 있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기도 하다.

오히려 교회가 이러한 사랑과 치유의 능력이 없음을 회개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황준배 / 목사, <기도와 크리스천 리더십>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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