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연재 글이다. 다소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우선 민주주의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를 어찌 봐야 할지 생각해 보자. 민주주의(dēmokratía)라는 말은 기원전 6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등장했다. 그 가운데 아테네라고 하는 가장 큰 폴리스의 정치형태로 대표되어 왔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200년 정도 지속된 뒤 몰락했는데, 그러면서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오랫동안 역사에서 잊혀졌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재발견된 것은 13세기 중엽이고, 영어(democracy)로 표현된 것은 16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고 그와 함께 고대 그리스에서 있었던 민주주의의 경험이 알려진 뒤에도 거의 대부분의 정치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민주주의를 '다수의 전제'나 빈자들의 선동 정치로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아니 그 전에, 오래전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이 정치형태를, 대규모의 근대 영토 국가 내지 국민국가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었다.

현대 민주주의의 제도적 디자인을 이끈 정치철학자로 여겨지는 몽테스키외나 루소, 제임스 매디슨도 고대 아테네와 같은 민주정을 실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염두에 두고나 내건 것은 공화정(republic)이었으며 민주주의는 분명 아니었다. 

그런데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을 거치고 난 뒤, 유럽 여러 나라에서 대중의 정치 참여 요구가 강해지고 19세기 들어와 보통선거권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이상하게도 공화주의라는 말과 민주주의라는 말이 병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민주주의라는 말이 더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전환의 계기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면 이렇다.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확고한 시민권을 갖게 된 데는 투표할 권리를 갖지 못했던 노동자와 여성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보통선거권 획득 운동의 성과와 함께, 진보적인 세력들이 대중정당이라는 조직 형태를 발명해 기존 체제에 도전했던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민주주의 운동은 19세기에 본격화되었지만, 유럽 대륙을 기준으로 볼 때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가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는 이때까지도 민주주의 내지 그 용어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지배적이었다. 그들 스스로 공화파로 불리길 원한 반면 민주주의자 내지 민주파로 불리는 것을 꺼렸다. 아마 지금도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가장 기피하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프랑스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1차 대전 직후 유럽 대륙의 민주화는 독일에 의해 대표되었다. 이 시기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은 대표적인 민주주의 실험 국가로 여겨졌다. 그러나 바이마르공화국에서 민주주의는 잘 작동하지 않았다. 군국주의자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하게 표출했고, 혁명파들은 민주주의가 개량에 대한 환상을 만들고 대중을 혁명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며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그 결과는 나치즘 내지 파시즘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이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해 유럽 전역에서도 민주주의에 반하는 전체주의적 열망은 강렬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사회적 합의에 가까운 지지를 받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르러서다. 

다시 말해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뒤이은 세계대전의 비극적 경험을 거치고 나서야 민주주의는 다수 지식인과 시민들에서 받아들여졌고, 그때서야 비로소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 이후 수많은 신생국가의 독립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도입한 나라가 많았다. 하지만 이들 국가 대부분에서 민주주의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군부독재 등 다양한 형태의 권위주의 체제가 민주주의를 대체했다. 이들 국가 가운데 남부 유럽에서 민주주의가 회복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이었다. 남미의 경우는 1980년대 중반이었고 우리 역시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민주주의로 전환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여전히 민주주의를 하는 국가들 숫자나 인구 규모는 전 세계적으로 다수가 아니었다. 1990년대 동유럽이 민주화 대열에 들어서고 나서야 나라의 숫자로 민주주의 국가와 비민주주의 국가가 비슷해졌다. 하지만 인구 규모로는 민주주의가 아닌 나라에 사는 지구인이 여전히 다수다. 

이상 간략하게 살펴본 상황에서 알 수 있듯, 현대 민주주의의 역사는 아직도 짧다. 민주주의를 중단 없이 30년 이상 실천해 오고 있는 나라는 아직도 소수에 불과하다. 이론적으로도 해결해야 할 수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내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입헌주의 그리고 국가 관료제와 같이 민주주의와는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수많은 거대 조직의 도전이 있다. 외적으로는, 일국 단위의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경제의 세계화와 지역 통합의 진전이 일국 단위의 민주주의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과거사 청산 문제처럼 민주주의 이전 역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문제 또한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최근에는 테러를 통제하는 문제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무기력함이 이슈가 되고 있다. 인터넷과 같이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기술적 급변이 여론과 민주정치를 양극화하는 문제도 여전히 논란 중이다. 

전 세계적 차원의 불평등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데, 사람들을 더 비관적이게 만드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별로 개선의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떤 기준으로 보든 현대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있어서 언제나 어려움과 도전에 직면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 민주주의는 늘 논쟁의 상태에 놓여 있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발전해 왔다.

민주주의에 미래는 있는가? 미래에도 민주주의는 지속될 수 있을까? 다행스러운 것은 1차 대전 이후 유럽을 휩쓸었던 공산주의나 전체주의처럼, 민주주의와 경쟁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체제에 대한 기대나 인기가 낮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민주주의가 아닌 강력한 대안은 아직 없긴 하다. 그러다 보니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은 있어도 민주주의의 시대를 끝장내자는 주장은 많지 않다. 

물론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니, 새로운 사회운동이니, 쌍방향 기술을 통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도래니 하면서 '낡은 민주주의론 종식' 혹은 '새로운 민주주의론 도래'를 말하는 사례는 많다. 하지만 그 전에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구조와 특징, 정당성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노력은 많지 않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 좋은 민주주의를 말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좀 더 튼튼한 이해가 선행되었으면 한다.  

고대 민주주의든 현대 민주주의든 민주주의라는 말이 등장한 이후 단 한 번도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은 적이 없다. 사실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부터가, 비난을 위해 귀족정주의자들이 만들어 부른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늘 논란이 있고 한계가 있다고 해서, 버리고 대체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만 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런 한계와 문제점을 이해하고 개선하려는 노력과 함께 지속되었다는 생각을 했으면 한다. 

일단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부터 민주화하고, 그 바탕 위에서 더 나은 미래의 민주주의를 상상해 보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다. 현대 민주주의는 아직 충분히 실천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여러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수많은 오해로 뒤덮여 있다. 고대 민주주의와의 비교를 통해 우리 시야를 가리고 있는 안개를 조금이라도 걷어내 보자. 현대 민주주의는 '시민의 직접 지배' 체제가 아니라 '시민의 동의에 의한 지배' 체제다. 혹은 '일반 시민의 지지에 정당성의 기초를 둔 정당과 정치가들의 경쟁 체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는 '대중과 정치 엘리트가 협력하는 체제'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좋은 정당이라면 지지자와 정치가 사이에서 좋은 협력 체계를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 

진보 정당 또한 나름의 좋은 협력 체계를 발전시켜서 성과를 내야 할 것이다. 시민들 역시 단순히 유권자이기만 해서는 안 되며, 다양한 결사체에 참여하고 당원 내지 특정 정당의 적극적 지지자로도 활동해야 민주주의가 좋아진다. 

시민이 번갈아 통치에 참여했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정치는, (내적으로) "노예와 여성에게 생산과 재생산을 전담시킨 남성 시민 집단의 여가"에 기초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작고 동질적인 통치 단위에서 실천될 수 있는 것이었다. 

시민의 규모는 전체 사회 구성원의 약 9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아테네의 경우 인구는 30만 정도에 시민은 3만에서 3만 5천명 안팎이었다. 정당도 관료체제도 법관도 없었다. 

(외적으로는) 도시 공동체 외부에 강력한 적들이 존재하고, 전쟁이 일상화되다시피 했는데, 고대민주주의는 이런 환경에서 실천되었다. 아테네의 경우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전쟁을 했다. 그야말로 매우 특별한 조건 위에서 실천되었던 민주주의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대규모의 영토 국가, 대규모의 시민, 사회적 기능의 분화와 전문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의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고대 민주주의로 돌아가자 하거나, 시민의 직접 통치 내지 집회 민주주의, 광장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동시에 위험한 일이다. 실천될 수 없는 민주주의를 말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제와 보통선거, 대중정당을 중심으로 한 여러 제도를 통해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정치체제보다도 대규모의 사회 구성원에게 정치적 평등의 권리를 부여할 수 있었다. 우리의 경우 투표권을 기준으로 보아도, 5,000만 국민 가운데 시민은 4,000만 명에 이른다. 계급・성・출생・신분의 차이와 상관없이 시민권을 부여한 체제는 현대 민주주의밖에 없다. 

이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는 이전의 그 어떤 민주주의, 그 어떤 정치체제보다도 진보적이다. 정치권력의 교체가, 폭력을 동반한 정변 형태를 띠지 않고 정당 간 평화적 정권 교체를 통해 실현된 것 역시 현대 민주주의가 유일하다. 

인간이 진공상태에서 살 수 없듯이, 민주주의 역시 모든 차이와 갈등이 사라진 광장의 집회장에서 순수한 열정만으로 실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문제의 핵심은 대의제를 제대로 하고 투표를 중요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있으며, 이 사실을 부정하고 이룰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운동' 내지 '직접성'의 가치는 대의 민주주의를 튼튼하게 발전시키면서 그 기초 위에서 다양한 시민 참여의 실험과 제도를 창조적으로 모색하고 보완해 가자는 관점에서 접근해야지, "대의제와 선거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고 직접민주주의와 추첨제가 진짜 민주주의"라고 보는 것은 현실이 아닌 신화를 붙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보도 민주주의 체제의 책임 있는 역할을 하려면 좋은 정당이 되어야 하고 집권해서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권력을 선용할 수 있는 정치 이론도 발전시켜야 하고 정부를 운영할 조직적 실력을 갖춰 가야 한다. 유능한 정치 엘리트를 배출해야 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지지자를 대규모로 결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 정당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과제를 개척하고 실현하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고대 민주주의가 집단적 사회 갈등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반면, 현대 민주주의는 사회 갈등을 인정함과 동시에 집단에 시민권을 주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요청되는 과제라 할 수 있다. 갈등과 결사, 집단이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 문제라는 사실은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민주주의와 정치를 이론으로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기도 하거니와 효과적이지 않을 때도 많다. 민주주의이든 아니면 그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는 정치이든, 애초부터 그것은 이론으로 먼저 기획된 것이 아니라 인간 현실의 필요 때문에 도입되었고, 그 뒤 구체적으로 실천되면서 문제가 제기되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론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험을 되돌아봐도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운동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른바 군부독재가 물러나고 민주화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솔직히 필자는,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를 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야당이 분열하고 그에 따라 운동권도 분열한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민주화 이후 최초 선거에서 군부 권위주의를 주도했던 세력이 우리가 주장했던 직선제로 재집권에 성공했을 때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간 우리가 경험하면서 알게 되고, 다른 나라의 앞선 경험을 참조하면서 더 넓게 이해하게 된 것들이 있다면, 함께 논의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서로 이해하는 방법이 다르다면, 유익한 토론을 통해 각자가 나눠 갖고 있는 판단을 공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관련된 쟁점을 다 해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이해의 범위는 넓힐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이 만든 정치체제 가운데 민주주의만 유일하게 '목적을 전제하지 않은 체제'로 불린다. 민주주의에서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목적을 시민이 참여하는 공적 논의를 거쳐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민주주의란 시민 모두가 의견을 가질 권리를 향유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고 나선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그는 시민 대중의 불안정한 의견에 의존한다는 이유에서 민주주의를 나쁜 체제로 보았다.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빗대, 아테네 민주주의는 "철학자를 살해하는 죄"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불안정한 의견이 아니라 확고한 진리 위에 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그가 주창한 것은, 참된 진리를 파악 할 수 있는 '철학자 왕' 내지 교육받은 소수 엘리트에 의한 지배였다. 

민주주의자라면 플라톤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제기한 문제, 즉 '시민의 자유로운 의견에 기초를 둔 공적 결정 체계가 과연 잘 작동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적절한 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 

20세기 최고의 민주주의 이론가라고 불리는 정치학자 1)로버트 달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실질적 내용에 있지 않음을 다시 강조했다. 민주주의냐 아니냐를 구분짓는 것은 공적 논의와 결정의 과정에 평등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절차적 조건이 어떠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조건에서 의견의 자유가 공익적 결정과 양립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려 한 것인데, 그는 그 핵심을 ‘사회적 힘의 균형’에서 찾았다. 

시민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하며, 이들 시민집단 사이의 힘의 균형 위에서 민주정치가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건축물의 단단한 기반처럼 시민 개개인이 다양한 집단으로 결속되어 있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듯 몇 개의 공적 의견이 정당으로 조직되어 경합할 때 민주주의는 그 이상에 가깝게 실천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이론적 기초 위에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경제적 불평등 효과를 제어하고 노사를 포함한 주요 생산자 집단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다루는 경제 민주주의론도 조망할 수 있었다. 요컨대 현대 민주주의를 집단과 조직, 결사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시민 참여와 의견 형성 과정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보면 국가와 개인 사이가 텅 빈 공간처럼 다가온다. 누가 그 공간을 채우는가? 주류 언론과 국가관료제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와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에서도, 국가와 개인 사이의 공허한 공간을 주도했던 권력은 이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사회적 의견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시민 개개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은 늘 반복되었다. 언론과 중앙정부의 행정이 유능하고 책임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무능하고 무책임함에도 위기 때마다 이들의 존재가 더욱더 크게 부각될 수밖에 없는 것은, 시민 개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달리 의존할 수 있는 대안적 판단의 원천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대안적 정보와 의견을 공유할 다양한 중간집단에 결속되어 있는 시민의 규모가 형편없이 작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민은 행정권력과 언론권력에 욕하면서도 매달릴 수밖에 없다.

사실이 더 많이 알려지고 투명하게 공개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옳고 정확한 사실은 어딘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은 특정의 인식 틀을 통해 사실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 해석되고 판단되는 사회적 과정이 어떠냐 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도 일종의 정보처리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정보가 선별되고 교환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집단과 조직, 결사체들이 역할을 해야 하고, 시민 개개인 역시 이 과정에 결속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민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견을 통해,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정보를 얻고 좀 더 신뢰할 수 있는 공적 판단을 가질 수 있다.

또 그래야 언론과 행정의 기능에 수동적인 소비자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중대한 사안일수록 더욱 그렇다. 사회적 힘의 균형을 말하기 이전에 국가와 개인 사이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지금의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한, 달라질 것은 없다. 이런 민주주의에서 시민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욕할 자유뿐이다. 그러면 시민은 더 사나워지고 사회는 더 분열되는 일만 많아지게 된다.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해서 민주주의를 택했다면, 민주주의를 잘 다룰 방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고 살 일이 아니라, 좀 더 좋은 사회 속에서 개개인의 삶을 좀 더 보람 있게 영위가기 위해 민주적 가치와 제도를 어떻게 더 잘 활용할지를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보다 먼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나라들의 사례를 둘러보면 금방 얻게 되는 판단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사회적 실력만큼 민주주의도 발전한다. 

민주주의는 그 기본 가치와 이념을 동일할지 몰라도, 그 실현 형태는 나라마다 다르다. 같은 대통령제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 민주주의 다르고 프랑스 민주주의 다르다. 마찬가지로 같은 의회중심제라 할지라도 영국 민주주의 다르고 독일 민주주의 다르다. 어떤 기준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민주주의를 같은 유형으로 묶을 수 있지만, 기준이 달라지면 유형도 달라진다. 대통령중심제냐 의회중심제냐와 같은 기준이 아니더라도, 다수제 민주주의냐 합의제 민주주의냐, 연방제냐 단방제냐 등등 여러 기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유형 안에서도 나라별 차이는 적지 않으며, 같은 나라 안에서도 민주주의는 늘 논쟁 중이다.

미국 공화당이 생각하는 민주주의 다르고 민주당이 생각하는 민주주의 다르다고 할 만큼, 민주주의는 그 이해 방식에서부터가 파당적이다. 따라서 누군가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모두에게 동의되는 민주주의론을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빈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법을 둘러싼 좋은 공적 논쟁이 있어야 민주주의의 내용은 심화될 수 있다. 

지금껏 살펴본 필자의 민주주의관 역시 근본적으로는 파당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해와 이해의 경계선을 좀 더 뚜렷하게 구분해 주장의 보편성을 최대한 튼튼히 해야 한다. 설령 나와 생각을 달리하더라도 이를 통해 각자의 정치관과 민주주의관이 더 튼튼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거면 충분하고, 그게 민주주의다.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1. 기독교와 정치학의 대화

2. 불완전한 인간의 정치

3. 인간의 자유의지와 민주적 자치

4. 민주정치를 위한 참여의 열정

5. 누가 정치를 이끌어야 할까

6. 신은 민주적 과업을 좋아하신다

7. 민주주의자는 정치주의자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8. 인간은 왜 정치적 동물인가

9. '진정성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을까

10. 철학적 인간 vs. 정치적 인간

11.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통치론

12.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3. 소명으로서의 정치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 친화적인 시민 문화가 필요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 체계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