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서윤 씨, 엄마 박은미 씨, 아빠 허흥환 씨, 다윤이. (사진 제공 허서윤)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세월호 참사 미수습자 허다윤 양의 부모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아직 바다 속에 배가 있다는 것을, 그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다닌다. 엄마 박은미 씨와 아빠 허흥환 씨 모두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몸을 사리지 않는다. 서울 광화문, 청운동, 홍대입구역에서 피케팅을 하고, 전국으로 간담회도 다닌다. 다윤 엄마는 사람들 앞에 서면 눈물부터 흘린다. 사람들 앞에 서서 아직 세월호 속에 내 딸이 있다는 말을 한다는 게 기가 막힌다.

우는 엄마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다윤이와 2년 터울 언니 허서윤 씨(22)다. 서윤 씨는 몸이 좋지 않은 엄마를 돌보려 자주 같이 현장에 나온다. 학교에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매번 나오지는 못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엄마와 함께 있으려 한다. 지난 4월 13일 안산 합동 분향소에서 열린 세월호 2주기 예배에서는 아픈 엄마 대신 단상에 나와 발언도 했다. 그 자리에서 서윤 씨는 엄마처럼 울었다.

5월 6일, 안산의 한 카페에서 서윤 씨를 만났다. 세월호 인양이 완료될 예정인 7월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미수습자들의 마음은 더욱 말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야 가족을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와, 아홉 명 중 한 명이라도 찾지 못하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이 뒤엉켜 있다. 이들은 유가족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특히 서윤 씨는 희생자의 형제자매이자 유가족이 아닌 미수습자의 언니다. 부모님, 그리고 유가족 형제자매와는 다른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었다. 서윤 씨와의 대화를 그의 입장에서 정리해 봤다.

▲ 4월 13일 안산 합동 분향소 2주기 예배에서, 엄마를 대신해 서윤 씨가 단상에 올랐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같이 여행도 가자고 했는데

2주기 때는 팽목항에 가지 않았어요. 편의점에서 주말 알바를 하고 있을 때여서 그냥 알바했어요. 2주기 행사도 했다고 하는데, 뭐 제가 가도 딱히 되는 건 없으니까요. 부모님은 지난주에 내려가셔서 계속 계세요. 저는 7월 말에 인양 완료된다고 하니까 한 달 전쯤 가 있으려고요.

지금 상태는… 글쎄요. 해탈했다고 해야 하나. 정신적으로는 그런데, 마음은 조마조마해요. 두 가지예요. 다윤이 찾아서 장례식을 하든가, 아니면 안 끝날 수도 있다는…. 당연히 잘 끝나길 바라죠. 그래도 (다윤이를 못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으니까. 안 하려고 해도 들어요. 어쩔 수 없이. 그게 견디기 제일 힘들어요.

배가 올라와도 안을 수색해서 사람을 찾으려면 3개월 더 걸린대요. 그러면 지금부터 5개월을 더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일단 믿어야죠. 있겠지, 나올 거야 그러고 있어요.

사고 당일에 진도 내려가서 지현이(마지막 수습자) 나올 때까지 있었던 것 같아요. 다른 가족들이 시신 찾아서 떠날 때, 내 동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휴학을 할까 했는데, 나중에 혼자 학교 다녀야 하는 게 싫어서 2학기부터 나갔어요. 진도에 계속 있는 것도 힘들었고, 어차피 제가 거기 있어도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자리만 지키는 거지. 이후로 학교 다니면서 팽목항에 왔다 갔다 했어요.

다른 유가족 형제자매들 보면 친구에게 상처받은 일도 많던데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냥 애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오히려 그래서 학교 다니기가 더 나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친구 만나는 거 되게 좋아했어요.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가서 부모님께 혼나는 경우도 많았어요. 저 놀기 바빠서 동생이랑 많이 못 놀아 줬죠. 항상 엄마가 너만 놀지 말고 동생 데려가서 놀라고 했어요. 다윤이랑은 크면 같이 기차 타고 놀러 가자, 여행도 같이 가자 했는데…. 그렇게 못한 게 미안해요.

사고 뒤에는 예전보다 친구들 덜 만나고, 나가서 노는 것도 그렇게 재밌지도 않고 그래요. 그냥 부질없다는 생각? 사고 전과는 많이 달라진 거 같아요. 친구들이 좋고 함께 놀고 싶어서 만나는데, 그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아요. 예전에는 이런 생각 안 했는데. 그때는 만나서 마냥 신나게 놀았는데. 지금은 집에 혼자 있는 게 마음이 편해요. 아무 생각 안 할 수 있고.

저는 성격이 털털해서인지 계속 우울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다만, 아무렇지 않은 것 같다가도 가끔씩 정말 팍 (감정이) 올라올 때가 있어요. 그게 심한 거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한결같이 힘들다면 저는 갑자기 확. 어떻게 보면 그동안 회피한 거겠죠. 그럴 때는 방에 틀어박혀 있든가 다윤이 학교 다녀오든가 그래요. 근데 이제 교실도 옮긴다고 하네요. 미수습자 가족들은 그동안 교실 문제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 단원고 기억 교실 다윤이 책상. 이제 교실은 단원고에서 철거될 예정이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교회 사람은 더 마주치기 싫었어요

저는 아빠를 닮아서 좀 무뚝뚝해요. 저에 비해서 다윤이는 부모님한테 애교가 많았어요. 다윤이랑 사이도 좋고 했는데 자주 나가서 놀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저도 시간이 없었고, 다윤이는 사람을 잘 안 만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집 밖에서 다윤이는 쑥스러움도 많이 타고 굉장히 내성적인 아이였어요. 친구도 두루두루 사귀는 성격이 아니었어요. 언니로서 엄청 답답했죠. 저는 사교성이 좀 있었거든요. 엄마가 동생 좀 가르치라고 했어요. 근데 이걸 어떻게 가르쳐요. 그냥 친구들 하고 얘기도 좀 하고 그러라고 했죠. 근데 그게 안 됐나 봐요. 그때 "네가 알아서 해"라고 말한 게 너무 미안해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교회를 7년 정도 다니긴 했는데, 다윤이 성격 자체가 그래서인지 교회 아이들과도 많이 못 친해졌어요. 저희는 모태 신앙인데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저희 집이 서울에서 안산으로 이사 왔어요. 서울에서 다녔던 교회에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교회는 그때밖에 좋았던 기억이 없네요. 다윤이도 안산에 와서는 잘 적응 못 하고, 교회 안 간다고 하고 그랬어요.

저도 사고 이후로 교회에 안 나가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안 나가게 됐어요. 진도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못 갔고, 올라와서도 집에만 있다 보니까 안 가게 됐어요. 교회 가는 걸 잊어버린 느낌이에요.

그냥 가고 싶은 마음이 잘 생기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사람들 많아서 안 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 마주치면 계속 저한테 물어볼 거잖아요. 특히 교회 사람은 더 마주치기 싫은 거 같아요, 일반 사람들보다. 교회 사람들은 세월호도 신앙적으로 볼 수밖에 없잖아요. '하나님이 어떻게 했기 때문에'라는 말 듣기도 싫고, '기도를 해야 한다', '예배는 잘 나와야 한다', '네가 엄마 잘 챙겨야 한다'는 말도 듣기 싫었어요.

엄마는 교회 사람들한테 상처 많이 받았을 거예요. 지금은 섭섭한 거 얘기 못 할 수밖에 없으니까 답답하죠.

그래도 엄마가 저한테 교회는 가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집 앞에 있는 작은 교회 한두 번 가곤 했어요. 근데 예배를 드리는 거 자체가 꺼려지더라고요. 별로 안 가고 싶어요. 나중에, 일 다 끝나면 그때 가고 싶어요.

▲ 다윤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서툴렀다. 서윤 씨는 좀 더 신경 써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사진 제공 허서윤)

왜 우리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엄마는 아시다시피 머리에 종양이 있고요. 아빠는 허리 디스크가 있어요. 예전부터 허리가 안 좋았다고 하는데 저는 몰랐어요. 사고가 터지고 확 안 좋아진 거 같아요.

부모님 걱정 많이 되죠. 워낙 쉬지를 않으시니까…. 사람들이 건강 생각해야 한다고, 몸 좀 사리시라고 해요. 근데 저는 그런 얘기 안 했어요. 원래 성격이 좀 무뚝뚝해서 그런 말을 못하기도 하고. 다윤이가 아직 못 나왔으니까요. 그런 말해도 안 사리실 거 아니까. 엄마, 아빠가 항상 하는 말이,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고. 그러면 제가 뭐라고 하겠어요.

엄마가 집회 같은 데 가서 얘기하는 거 보면 화가 나요. '대체 왜 우리가 이러고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우리가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이 될 줄 알았나요. 힘들다기보다는 짜증? 분노가 맞는 것 같아요. 힘들지는 않아요.

안산 분향소에서 2주기 예배 할 때, 엄마가 아파서 제가 대신 올라갔어요. 그런 자리도 처음이었고, 그런 건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저도 제가 올라가서 준비한 거 딱 읽고 내려올 줄 알았어요. 아니더라고요. 올라가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예요. 참고 얘기하려고 했는데도 입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머릿속이 하얘지고. 왠지 모르게, 서러워서 운 건지, 짜증나서 운 건지 모르겠어요. 여러 가지 감정이 겹쳤겠죠.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제일 컸어요.

'네가 부모님 잘 챙겨야 한다'는 말, 당연한 건 줄 아는데 너무 싫어요. 알죠. 우리 엄마, 아빠 당연히 내가 잘 챙겨야 하는 거 알고, 챙기려고 하는데. 저도 아직 22살밖에 안 됐잖아요. 이런 사건을 겪은 것도 당연히 처음이고요. 다윤이는 엄마, 아빠에게는 딸이지만, 저한테는 친동생이에요. 저도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엄마, 아빠 힘든 거 알고 있는데, 사람들이 자꾸 저한테 '엄마, 아빠 힘드니까 네가 해야 한다'고 하니까. 그런 말도 당연한 거 알아요. 근데 저는 받아들이기 힘든 거죠. 이런 일 겪어 본 거 나도 처음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 그게 싫었어요. 그래서 어른들이 싫었어요.

세월호와 관련한 거라면 그냥 화부터 나요. 분노, 불안, 초조, 다 섞인 복잡한 감정. 대상도 없어요. 저는 정치, 사회 이런 거에 전혀 관심 없었어요. 사고 터지고 나서 조금?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정말 우리나라 정치, 사회가 이런 줄 몰랐어요. 알 일도 없었죠. 어휴. 정부에 대해서도 할 말 못 한다는 게 답답하죠.

저는 원래 경찰이 되고 싶었어요. 전공도 경찰 관련된 거였어요. 세월호 터지고 나서 접었어요. 주변에서 경찰 되지 말라고 해서. 아빠도 경찰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안 한다고 하긴 했는데, 그래도 아직 미련이 있어요. 꿈이었거든요. 근데 경찰이 된다고 해도 좋은 경찰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 나라에서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가족들은 어서 다윤이를 찾기 바라고 있다. (사진 제공 허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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