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의 망루

부러 2009년을 복기하지 않아도 된다. 용산 남일당 위에 벌어진 참사를 떠올릴 필요도 없다. 우리 사회는 그보다 더 야만적인 사건으로 들끓고 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야만은 반사회적인 통념의 기준에서 본 범법 행위나 이탈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이 경우의 야만은 법의 이름, 상식의 이름, 선진화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야만의 얼굴을 감춘 진짜 야만이다.

이러한 야만적 행위가 생각만 떠올려도 치가 떨리는 참혹의 기억으로 아로새겨진 곳이 용산이다. 최고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그들이 지껄여 대는 엄정한 법 집행이 감행되는 야만이 살아 숨 쉬던 그날, 용산의 기억은 동시에 망루의 기억이었다.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창구가 망루 외에는 보이지 않았던 냉혹한 현실, 그 차가운 현실 한복판에서 그들은 망루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망루는 현실을 인식하는 냉엄한 극적 상징이다. 현실을 인식하고 개선하려는 최소한의 대사회적 소통 기구가 마비될 때, 생존의 극한에 몰린 이들은 망루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모든 소통과 협의 가능성을 막아 버린 권력충들은 높디높은 법의 장벽을 세워 놓고 알량한 법의 이름으로 망루에 오른 이들을 범법자 취급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엄정한 법 집행이란 명목하에 비인간적 진압 행위를 감행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은 충격 여파의 고저만 있을 뿐, 지겨울 만큼 다양하고 빈번하게 발발하고 있다. 망루의 충격이 가라앉았다 싶은 오늘의 시대는 비정규직의 시대이고, 갑을의 악마적 병리 현상들로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다. 소통과 협의의 보루가 되어야 할 법은 마비된 상태로 유기된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는 그것이 유기되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좀비스러운 작태로 유지, 지속된다. 억지로 강요된 현상 유지 속에서 사람들은 본능적인 반발 작용으로 망루를 찾기 시작한다. 이때의 망루는 더 한층 끔찍하다. 해석되지 않고 규명되지 않은 우리 안의 수많은 망루는 망루의 극적 상징조차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 요원해졌다.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는 생존 외침이 만성이 되어 가라앉은 좀비의 집산체 안에서 무방비로 용해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무방비로 용해되는 망루의 강요된 소멸은 비단 세상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오늘의 교회에서도 불확실성의 유령이 되어 버린 망루가 출몰하고 있다. 좀비처럼 소리 소문 없이.

교회에서의 망루

종교는 세상에서 일어난 비극을 치유받기 위한 곳이길 자임한다. 종교와 사회, 두 영역을 동시에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성원은 설령 자신이 무신론자라 말한다 해도 동등한 지속성과 가치를 갖고 살아간다. 사회 구성원이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현실의 비극에 대한 위로와 치유의 가치를 종교를 통해 찾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마태복음 11장 28절)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그런 면에서 긍정적 위무의 동력으로 기능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종교가 위로의 범주를 공격적으로 확장해 세상에서 일어난 비극의 원인에 주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서 벌어진 비극에 더 이상 피상적인 위로나 정서적 동질감을 형성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의 대사회적 영성은 과거 이스라엘 패망 이후 민족 독립을 부르짖었던 선지자들의 외침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겪어 낸 오늘의 한국교회는 사회적으로 생존의 극한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세상의 부당함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은총, 두 가지 논리를 앞세워 맞서거나 위로해 왔다. 맞섬의 방법론에는 하나님의 정의가 존재한다. 생존의 극한, 이념의 프리즘에 비추어 마각을 드러낸 악마적 야만에 대한 마지막 보루인 망루를 바라보는 교회의 시선에는 하나님의 정의가 숨 쉬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망루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은 정의와 함께 뒤섞여 있는 은총이다. 이때, 전면으로 부각된 '은총'이란 용어는 안타깝게도 그 바탕에 계급적 폭력성을 함유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폭력의 바탕에는 하나님의 전능성, 혹은 하나님의 주권이란 명분이 엄존한다. 교회가 생존의 끝에 몰린 세상에서의 망루를 정의, 은총의 이름으로 치유해 줄 수 있을 거란 믿음이 그것이다.

믿음이 틀렸다는 말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 믿음이 계급적 폭력성에 연루된 상황에서 세상의 구성원이기도 한 공통분모를 품은 교회가 서서히 교회 정신의 안팎을 침몰시키는 자기모순과 근본적 질문으로서의 망루를 잉태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함이다. 이렇듯 어느 순간 교회는 분열된 두 자아처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망루에 오르고 있다.

스스로 오르는 교회 안의 망루

세상에 마각을 드러낸 참 야만의 얼굴이 야만의 진의를 감춘 채 법과 권력, 상식이란 명분의 힘을 빌려 야만의 반대 지점에 선 이들을 망루 위로 내몬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야만의 얼굴을 감춘 종교적 야만이 자신과 반대 입장에 서는 모든 주장과 경향을 망루 위로 내몰고 있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교회 안의 야만은 대체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 작동되는 야만의 장치 역시 세상에 나타난 법, 권력, 상식의 포장지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오늘의 교회는 믿음의 법이란 이름, 다시 말해 구원의 절대 항수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세운다. 십자가 자체의 의미 숙고나 다양한 의미 울림엔 관심 갖지 않는 채 오늘의 교회가 앞세우는 십자가는 일종의 정죄 수단으로써의 절대적 선의지의 항수가 되어 버렸다.

"십자가 앞에선 누구도 교만해선 안 된다", "십자가 은혜를 떠올리며 인간의 더없이 무력한 자아를 고백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운동성을 가진 욕망의 집산체인 군상들의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절대 항수로 기능하는 십자가의 유령을 그들의 왕으로 추대한다. 소통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십자가가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이렇듯 십자가의 유령을 추대한 교회는 다음처럼 외치기를 즐겨한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해석되지 않는 십자가를 절대 항수로 설정하고 욕망의 집산체로서의 세상과 교회는 엄연히 다르다고 말하는 건 자기최면에 불과하다. 교회 안에도 세상에서 마각을 드러낸 야만이 오히려 더 지독하게 스며들어 있기에 그렇다.

야만이 흡수해 낸 가공할 만한 징후들로 인해 교회는 신음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소통되지 않는 십자가 우상을 전능자의 은총이 허락해 준 유일한 기준, 곧 믿음의 법으로 설정하고 그 믿음의 법이 자행하는 권력 행위를 인간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으로 실천하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교회가 들먹거리는 권력 행사의 당위성이 바로 종교적 상식이다. 하나님의 이름,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행한다는 상식에의 호소가 그렇다.

교회에서는 이러한 상식을 예수의 가르침과 결부시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한 활동 근거로 삼고 독려하기 바쁘다. 이런 식의 세상을 향한 정의와 은총의 실천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척박한 현실에서 생존의 끝으로 내몰린 이들의 망루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엄정한 법 집행이란 미명하에 자행하는 야만을 야만이라고 폭로하고 분석할 여지를 갖고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오히려 오늘의 교회는 교회 안에서 스스로 해명되지 않는 해석 불가의 난처함에 떠밀려 영적 생존의 극한인 망루로 그 누군가들을 내몰고 있다. 교회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교인들, 그럼에도 교회라는 신성의 자장은 벗어나지 못하는 가나안 성도들이 고통을 호소할 곳은 이제 망루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고통스런 비극은 교회 안의 망루가 석연치 않은 공멸의 몸짓으로 꿈틀거린다는 점이다.

망루의 교회

교회가 교회에 의해 해석되지 않지만, 스스로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다는 병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메스를 들이미는 교회의 방법론이 두렵기만 하다. 단언컨대 그 방법론은 또다시 이해되지 않는 십자가 우상이 안팎으로 강요하는 법, 권력, 상식이다.

교회는 스스로 해명되기 어려운 병리 현상을 극복하는 해결책으로 정의와 은총을 내어 놓는다. 그런데, 이미 야만의 카르텔에 포섭되어 버린 정의와 은총이 쏟아 내는 행동 강령은 끔찍하기만 하다. 전혀 해석되지 않은 법, 정신적 학살을 당하고도 이건 인간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는 거라고 자위하는 신적 권력에 대한 향수, 그 권력이 쏟아 낸 배설물의 하구를 서성이며 뭐라도 해 보려고 징징대는 아편으로서의 종교적 상식이 전부다.

이러한 악순환의 공멸 징후는 끔찍하기만 하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망루에 올랐던 자기 자신을 또 다른 그 자신이 법의 이름, 신의 이름, 상식의 이름으로 불태워 없애려하기 때문이다. 2009년 용산 남일당 위의 망루가 그처럼 가혹했던 불길에 사로잡혔듯이 말이다.

교회 참상에 대한 가감 없는 현실 인식은 이렇듯 교회를 중심으로 출몰한 해석되지 않는, 유령일 수밖에 없는 망루의 교회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교회 안의 망루에 스스로 오를 수밖에 없는 절박한 영적 생존을 위한 호소는 교회 자체가 당면한 근본적 부조리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오열과 같다. 교회는 바로 그 내적 통곡의 지점에서 그동안 유령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던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하나님 정의의 진실이 무엇인지, 은총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야만의 질서가 교회를 망루 위로 올라서게 했는지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급박한 속도로 해체와 붕괴의 내리막길을 치닫고 있다. 교회 체제와 구성원의 붕괴를 안타까워하는 충정과 진정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충정과 진정성의 호소가 제대로 된 방향 정립으로 발전되려면 교회 안에 엄존하는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는 비극적 병리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 오른팔에 완장처럼 채워진 법, 권력, 상식의 이름으로 자행한 야만의 민낯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자기 자신을 마녀사냥 하듯 화형(火刑)시키는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부질없어 보이지만 조금은, 이 또한 절박하게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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