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까지 말한 민주주의론을 우리 청소년들에게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담임 선생님이 '사회 나가서 뭘 해도 좋은데, 정치는 절대 하지 마라!'는 당부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차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이끌고 나갈 아이들을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오래전에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청소년 정치교육 교재를 둘러보다가 얇은 자료집 하나를 발견했다. 1장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했다. 

"우리가 커피 한 잔을 마시면 브라질 커피 농장 노동자에게 얼마가 돌아갈까?" 

커피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의 취향을 위해서도 수많은 국적의 노동 협력을 필요로 한다며 아이들에게 글로벌화된 노동시장 문제를 생각해 보라는 취지로 던진 질문이었다. 나아가 일국 단위의 사회민주주의 체제의 한계와 이주노동자들도 통합할 수 있는 복지국가의 전망을 개척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강조했다. 

3장은 '정당을 만들어 보자'였다. 한 예시로 나온 것은 '숙제하기 싫은 당'이었다. 아이들에게 그런 무책임한 상상을 하게 해도 되나 생각했는데, 내용은 달랐다. 교사들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학생들에게 방과 후 학습을 일률화해 숙제를 내는 것이 옳은지 문제를 제기하고 다양성과 자율성이 커지는 방식의 숙제를 요구하는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강령도 써 보고 당 대표 선거도 하고 연설문도 작성해 보라고 했다. 

사회에 나가서도 가사 노동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낮다고 생각하면 주부당 만들고, 퇴직 이후의 사회적 안전망이 낮다면 노인당 만들어 보라고도 말하고 있었다. 정당을 만들면 단순히 항의로 끝날 수 없고 자신들의 존재가 공익에 기여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단순히 남편을 닦달하는 게 아니라 기업 운영과 공공 정책의 차원에서 가사 노동의 제도적 가치 평가 기준을 수정하는 것이 공익에 기여함을 말해야 하고, 단순히 노인들이 돈을 더 받냐 마냐가 아니라 연금 정책의 변화로 전체 사회복지 정책이 좋아질 수 있음을 말해야 정당이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극적으로 주장하고 요구하는 행위에만 그치지 말고, 적극적 문제 해결자가 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에서 최고의 시민권은 정치조직을 만들어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데 있다. 너무나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어떤가? 아이들에게 노동이 인간 공동체의 기본 문제라는 점을 가르치는가? 정당의 존재가 시민이면 누구든 가깝게 다가가고 필요하면 새로 만들 수도 있는 민주주의의 중심 조직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는가? 오히려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나쁜 일에 물들지 않을까 괴로워하는 건 아닌가? 

아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 속된 말로 더 정치적이고 더 권력적이 될까?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더 투쟁적이 되고 저항적이게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삶, 나아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 스스로 그런 문제의 해결자가 되어 보고자 하는 열정을 가져 보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 더 가치 있는 삶을 살 상상력을 갖게 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공익과 사회정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시민 책임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접근을 경원시하다 보니, 우리 미래 시민들은 몸이 커지고 성장하는 것에 비례해 공익적 열정을 갖고 성장할 가능성을 억압당하고 있다. 체격은 이미 어른인데 그에 맞는 사회적 인식을 갖게 해 주지 못하는 우리의 교육 구조 탓에 학생들의 열정이 다른 아이를 때리고 소외시키는 삐뚤어진 심성을 키우는 데 사용되도록 무한 방치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미래 시민, 미래 노동자들이라 할 수 있는 아이들에게 노동의 존엄성과 함께 민주주의와 정치의 중요성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함께 일하고 땀 흘려 협동하는 것의 가치와 보람을 갖지 못하는 교육이라면 사회를 해체할 무기를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봉사가 자율적 선택이어야 한다. 점수가 되고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시민교육 내지 민주주의 교육 시간이 배정되었으면 한다. 그것이 사회를 위해서도 아이들의 좋은 심성을 위해서도 훨씬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시민됨의 보람을 갖게 하는 정치, 그런 정치가 지닌 가치, 그런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공적 열망, 합리적인 토론을 통한 조정과 타협의 성취, 견해를 달리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의 원리 위에서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다퉈 갈 수 있다는 믿음, 이 모든 게 함양되고 교육되는 사회를 향해 나날이 전진했으면 좋겠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좋은 정당, 좋은 대통령, 좋은 교육감, 좋은 국회의원, 좋은 지방의회 의원, 좋은 자치단체장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간의 한국 민주주의는 그런 정당과 정치인이 적어서 문제였지, 시민은 과거나 지금이나 늘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좋아지고, 사회가 좋아지고, 그래서 개인 삶의 도덕적 기반이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1. 기독교와 정치학의 대화

2. 불완전한 인간의 정치

3. 인간의 자유의지와 민주적 자치

4. 민주정치를 위한 참여의 열정

5. 누가 정치를 이끌어야 할까

6. 신은 민주적 과업을 좋아하신다

7. 민주주의자는 정치주의자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8. 인간은 왜 정치적 동물인가

9. '진정성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을까

10. 철학적 인간 vs. 정치적 인간

11.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통치론

12.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3. 소명으로서의 정치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 친화적인 시민 문화가 필요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 체계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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