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자유당, 무엇이 문제인가

기독자유당은 정치와 종교, 정치사회적 태도와 신앙적 태도를 섬세하게 조율하거나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동성애, 이슬람 반대와 같은 어젠다는 이들이 추구해서 얻은 정강이라기보다 던져진 것을 차용한 강령에 불과하다. 동성애 문제를 깊이 있게 분석할 만한 유능함을 구비하지도 못했으며, 이슬람에 대해서는 도무지 모르는 것 같다.

신학적 기반이 부족하다. 그 이상의 정치 이론이나 사회 이론이 섞여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권력욕을 보이고 있다. 기존 정치권에서 넘어온 사람이 한둘 있으며, 뭐라고 말해도 목사들의 치부를 보존해 주는 목적으로 정당을 만들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도대체 이 정당이 어떻게 이번 선거에서 70만 표 가까이 득표했단 말인가.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정당을 이끄는 지도자들의 무모함과 계산적인 태도와는 상관없이 이를 따르는 성도들이 소박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한 실망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동성애가 문제다.
이슬람이 문제다.

원론적인 입장에서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수긍하거나 두려워할 주제다. 자극적이며 위협적인 어젠다다. 노동자에게는 '쉬운 정리 해고법'이 두려운 주제다. 강남 부유층에게는 금융 계좌를 조회 가능하게 하는 테러방지법이 무서운 주제다. 기독교적 가치를 지향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동성애와 이슬람은 도덕적 가치와 공동체적 원리를 위협하는, 무작정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교회는 냉정한 이론과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다. 정서와 감정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교회를 무식하다고 공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는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다양한 과정으로 성장해 가는 공동체다.

스마트하지 못하다는 지적은 공동체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다. 목회를 책임지는 목사나, 교회 운영의 배경이 되는 신학을 비판하는 것과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 교회는 정치 사회적 발언보다 공동체적 가치, 관계의 윤리를 우선하는 공간이다. 이 부분에서, 교회가 기본적으로 구비해야 할 윤리적 수준을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누군가 교회에서 정서적 만족을 누리고, 소속감을 느끼고, 여러 의미 있는 일을 경험하고 있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교회 지도자가 설득력 있는 논변으로 특정 주제를 강조하면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교회 내에 그런 구조가 작용한다.

기독교 정당 운동은 대부분 대형 교회 목사들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대형 교회 목사들 배경에는 교회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장로-권사-안수집사로 이어지는 장년층이 있다. 그러니 이들을 중심으로 상당한 결과가 맺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인 대통령 후보를 뽑아야 한다.
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 정당에 투표해야 한다.

기독자유당은 바로 이 부분을 교묘하게,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자유당 선풍(?)에 대한 진보 진영의 해석에는 잘못된 부분이 많다. 기독자유당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외면받았다고 본다. 카톡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그 역시 제한된 범위다. 이제는 그 범주마저 상당 부분 폭로된 터라 같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적당한 지경이다.

숫자를 아무리 낮추어 잡아도 기독교 인구 중 1/10에서 1/15 정도다. 특정 교회 목사가 편향적인 목소리를 내도, 보수 교회가 정치를 참여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기독교 내에서 의외로 강고하다. 목사의 역할은 상당히 제한적이며, 정치 사회적 의제는 그 자체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목사가 왜 정치에 간섭을 하는가.

'교회가 왜 정치에 관심을 갖는가'. 못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말이다. 기독자유당은 분명히 영향력이 있다. 대형 교회 일각, 보수 교회 일각, 어르신들 일각에서 말이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십수 년 전부터 시작된 극우파 교회 내 공작의 성과이기도 하고, 보수 교회 지도자들이 연로해지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우경화 현상이기도 하다. 사학법이나 나꼼수 막말 파문 같은 결이 다른 문화적 충돌이 빚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뉴라이트 이야기를 하자면 김진홍, 서경석 등은 이전에도 기독교 내에서 제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승만부터 시작된 주류 지향성을 지적하지만 대부분 교회들은 1980년대 이후에 성장하고 발전했다. 고로 그다지 유효한 분석은 아니다. 대단하다고 떠돌아다니는 한국 기독교의 보수적 기원에 대한 그럴싸해 보이는 분석은 학문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다지 의미 있는 분석도 아니라고 본다.

- 개신교인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돌파구가 정치 세력화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선 대형 교회 목사면서 정치 발언을 일삼는 목사들 숫자는 십수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실상 변동이 없다고 본다. 그때도 대형 교회 목사들은 정치 발언을 일삼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발언하는 사람이 똑같다.

보수적 태도를 지니고 있음에도, 정치적 성향보다 교회 운영에 집중하는 목사들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교회 운영은 결코 정치 사회적이지 않다. 교회 내에 그들의 생각이 있고, 나름의 과정이 있다. 그렇기에 신학, 교회사를 비롯한 고도의 교육과정이 있으며, 신학 교수들이 있는 게 아니겠나. 대관절 줄어드는 개신교 숫자를 늘리려고 기독자유당을 창당한 것인가? 기독자유당이 돌파구인가? 부분적이며 파편적인 맥락에 불과하다.

- 성소수자가 희생양이다? 차별과 배제를 신의 이름으로 동력화했다?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기독교는 동성애를 반대한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동성애 자체만 콕 집어서 그것에 저항한다고 생각하는가? 누구의 말마따나 항문 섹스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성을 규제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종교다. 가톨릭은 신부와 수녀를 중심으로 독신에 기초하여 '성스러운 영역'을 구축했으며, 이를 토대로 '속인의 세계'를 통제하려 했다. 개신교의 경우는 종교개혁 이후 '남과 여'를 기초로 한 '가족'이야말로 성서가 제시하는 보편적 성애라고 확신하며, 이로써 '성과 속의 일치'를 꾀하려 했다.

'혼전 순결'이라는 엉성한 단어가 교회 내외를 떠돈다. 혼전 순결 서약서를 쓰기도 하고, 여학생들에게만 서약서를 쓰게 한다는 말이 안 되는 유언비어가 떠돌기도 한다. 차라리 기독교가 집착하는 것은 '혼전 순결'이지 '동성애'가 아니다.

기독교는 정신적 사랑을 강조하고, 이상적 사랑을 추구한다. 육체적 성을 부부 안에서 통제하며, 행복한 가족을 가꾸어 가는 것을 지향한다. 그래서 그 밖의 것들에 금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동성애뿐 아니라 사디즘, 마조히즘, 그룹 섹스, 스와핑, 네토라레, 수간, 이혼, 바람 등을 극히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기독교 전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히 엉성하고 혐오감을 조장하는 기독자유당식의 거친 행태가 일견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며, 기독자유당의 태도에 반발하면서도 진보 진영이 내세우는 "동성애는 사랑이며 인간의 권리다. 이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혐오다"라는 단순한 정치적 어젠다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하고 과격한 주장이다.

교회를 비판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에도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다. 한국교회 여러 문제, 특히 이번 기독자유당 사태에 대해 신랄하게 공격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없다. 상당수 기독교인이 작금의 한국교회, 기독자유당이 판치는 모습을 보며 부끄러워하고 개탄하고 있다.

'세련된 혐오'는 혐오 아닌가?

소위 진보 진영의 그럴싸한 분석, 진보 언론에서 흘러나오는 이런 분석들은 기독교 맥락과 맞지 않은 부분이 있다. 진보 진영 보도 행태는 상당히 '기독교 혐오'적이다.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신을 "상부구조의 순수 정신"이라 말했기 때문인가. 포이에르 바하의 '유물론'이 여전히 그들의 교조적인 이론인 것처럼 '비판을 가장한 혐오', '기독교=개독'식의 인식이 사전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떤 부분에서 진보 진영, 진보 언론에서는 참 일관되게 기독교를 뭉그러뜨린다. 이렇게 하면 이에 수긍하며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에 대한 반발로 진보를 혐오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진보는 예의가 없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은 이런 식으로도 이야기한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아닌가.
기독교는 낮은 자, 고통받는 자를 돕는 종교 아닌가.

그러면서 문익환 등을 거론한다. 결국 그들의 프레임으로 기독교를 재단한다. '종교는 이렇다', '이것이 종교인이다'. 한편으로는 이 또한 권력의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고상하게 이론을 가져오지만, 보수 진영에서 진보 진영을 '종북', '빨갱이'라 부르는 것과 뭐가 다른가.

기독교인들에게 현대사회는 두려운 곳이다. 기독교의 몰락하고, 가족의 가치가 파괴되고, 도덕과 공공선이 극도로 취약해진 사회. 동거와 이혼이 일반화되며 성의 향유가 극단화되고, 모든 것이 불안해지고 모호해지는 사회. 현대사회의 모습이다. 유럽이 겪었던 일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재현되고 있다.

이에 대해 다르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중세보다 현대 프랑스를 훨씬 훌륭한 사회라 할 수 있다. 동성 결혼은 이성 결혼을 파괴하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은 작금의 담론이 소통, 혹은 대화로 이어지는가 하는 점이다. 날카로운 펜을 들고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세련되게 무엇인가를 혐오하며, 무엇인가를 재단하려 하는 모습이 어찌 없다고 하겠는가.

대안 외치는 진보도 다르지 않다

기독자유당에 반대한다. 하지만 기독교 안티 활동에도 문제가 있다. 안티 기독교 활동은 1980년대 이후 교회의 성장과 함께 나타난, 개혁과 갱신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내부자들의 지위를 극도로 위축시켰다. 목사의 전횡에 반기를 들거나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수많은 진지한 노력들을 이단이나 개독 정도로 몰아 버리는 명분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진지하게 싸우기보다 편하게 욕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남을 탓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냉정히 말해서, 오늘날 수많은 신학교 신학자들과 각 분야의 크리스천 전문가들은 서구 신학계를 답습하거나 착한 전문인 성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이 현실이다. 대안적인 기독 운동이나 창의적인 기독교 사상가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대안이라고 하지만, 진보 진영 아류로 활동하는 게 대부분이다. 급진적이거나 참신한 신학자처럼 굴지만 현대 철학에 성경의 몇 구절을 이리저리 엮어서 그럴싸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들과 극도로 보수적이면서 부실한 신학 이론으로 개혁 신학을 운운하는 사람들처럼 정통의 자리에 위치하려 안간힘 쓰는 자들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모든 문제에 대해 오른쪽과 왼쪽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 정서는 보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보에서도 넘쳐 난다. 서로를 답습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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