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해나 표현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의 교회는 놀랍도록 매춘적이다. 교회는 스스로 순결하기를 자처하며, 순결성에 의한 강박을 판매하는 데 익숙하다. 여기서 판매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불순하다. 성스러운 관점, 또는 구원의 고백은 교환이란 행위를 통해 취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판매되는 성스러움은 충분히 매춘적이다.

이런 식의 매춘적 현상이 오늘의 교회에 속출하게 된 이유는 뭘까.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나 군사독재 시절에 나라를 팔아먹거나, 민족의 중요한 향방을 결정하는 시점에 매국적인 행위를 자행한 이들을 오적(五賊)이란 상징성을 이용해 폭로해 왔다.

오적은 특정한 매국노나 분명한 망국 세력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총체적 비극에 대한 해석과 성찰의 도구로 기능한다. 우리 민족이 나라를 빼앗기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이념의 왜곡과 쇠락의 근거가 무엇인지 오적의 은유를 통해 깨우쳐 온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매춘적이란 정의 내림의 배경엔 오적의 은유가 엄연한 유사 세력, 혹은 의의 훼손 세력으로 엄존해 있음이 반증된다. 그렇다면 기억과 복기로서의 역사의 한복판에 선 실존을 기념해야 할 오늘의 교회는 교회 안의 오적을 고발하고 준엄한 고백의 광장에 세워야 할 최소한의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필자는 그러한 부채 의식의 연장으로 교회 안의 오적, 그 지독한 병리 현상을 살피고자 한다.

규모의 괴물

문제가 생길 때마다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교회 안의 오적, 그 첫 번째는 규모의 괴물이다. 거창한 이념의 문제, 사상 문제에 앞서서 교회의 양적 성장이 교회를 망치는 괴물 노릇을 해 왔다. 규모의 괴물이 품고 있는 교회 본질을 향한 적의는 그것이 상투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 것만큼이나 집요하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앞다투어 메가 처치(Mega Church)로 대표되는 교회의 양적 성장을 교회 개혁의 장애물이라고 성토해 왔다. 그러면서 규모의 괴물을 지탱하는 목회자 위주의 독재 시스템 개혁과 더 나아가 교회의 계급화, 서열화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 개혁에 대한 상식선의 호소와 문제 진단은 그 진단 횟수의 빈번함에 비해 형편없을 정도로 미미한 개선 효과를 보이고 있다. 몇몇 교회가 대안적 작은 교회의 모델로 등장했을 뿐이고, 그마저도 시범적으로 운영되면서 실험의 한 사례로만 평가받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교회는 그 근본적 체질상 규모를 포기하지 못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규모의 논리를 일종의 대세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다. 괴물은 공격받으면 공격받을수록 한층 단단해지고 끔찍해지면서 점점 더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늪으로 기능하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교회 공동체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념적 방향과 구호를 가진 공동체가 대사회적 관계에서 나름의 존재 가치를 증명받는 길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무시할 수 없는 피플 파워(People Power)를 갖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체제 정비를 강화하는 길이다. 현대사회의 조직화는 두 가지 특성을 조탁하는 데 탁월한 기능적 경지에 도달했다.

현대인은 오늘의 경쟁 사회를 살아 내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흩어지지 않고 효율적으로 붙어먹기 위해 그에 부합하는 세련된 체제 개발에 본능적으로 몰두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규모의 괴물은 교회 개혁을 논하는 데 있어 더 이상의 비판 대상이기를 포기하는 추세다. 이러한 규모의 괴물이란 토대 위에 표절의 왕국이 춤을 춘다. 

표절의 왕국

교회 안의 두 번째 적은 표절의 왕국이다. 

개신교만큼 경전의 명료성을 확보한 종교도 없다. 개신교는 신, 구약 성경을 canon, 정경으로 선포하고 이에 대한 진리 선포에 모든 전례적 감흥을 농축한다. 그래서일까. 선포의 방식으로 개신교가 선택한 효과적인 방식인 설교는 선포되는 내용에서 대동소이한 경향을 보인다. 구원과 해방의 선포라는 주제가 너무 또렷해 설교 내용이 비슷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이 비슷하다 해서 설교 표절, 심지어 설교 대필 문화의 만연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 슬그머니, 지독히 뻔뻔스럽게 자리 잡은 두 번째 적은 설교자의 양심이 철저히 마비된 상태에서 복음의 진정성과는 상관없는 표절 행위를 예배 일상으로 생각하는 태도다.

인터넷상에 암암리에 떠도는 설교 뱅크를 이용해 교회력에 대충 맞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Ctrl-V 하는 작태를 이제는 문제로 여기지도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목회자는 교회 규모를 확장해 가는 방법론으로 체제 결속이나 교인 관리,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세속적 유행과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교회 구조의 한계로 인해 새로운 프로그램은 유행에 한 발자국 뒤처지는 퇴행적 모습을 일관한다. 그로 인해 공동체 구성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소속 교회에 깊은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해석의 부재

표절의 혐의, 혹은 열정의 부재란 비난에서 어느 정도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설교자가 포진한 교회에서도 생명을 좀먹는 뼈아픈 독소, 적은 존재한다. 열정이란 이름으로 둔갑해 버린 해석의 부재란 교회 현실이 그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해석학적 공동체다. 흔히 초대교회로 일컬어지는 사도행전적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영성에 뿌리를 내렸다기보다 소아시아 교회로 대표되는 바울의 영성에 더 깊이 뿌리내렸다고 평가받는다. 바울의 영성이 가진 특성은 무엇인가. 바로 텍스트(text)에 대한 열정이다. 

성서 텍스트에 대한 열정은 해석의 치열함을 구태의연한 교리 속에 처박아 두지 않는다. 텍스트를 현재진행형의 도상 위에 과감히 올려놓는다. 그러한 해석학적 흐름이 지속되는 건 교회 체제의 결속과 동어반복, 프로파간다의 반복 재생산을 통한 세뇌에는 별다른 유익을 주지 못한다.

교회의 양적 성장과 견고한 소속감 강화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의 교회는 기꺼이 교회가 가야 할 길이 해석학적 공동체의 길임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이때의 해석학은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내·외적인 확증을 변증법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입증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말한다.

이러한 해석의 역사가 참된 교회 역사를 정립한다. 진지한 해석학적 공동체 위에 세워지는 교회가 시대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다져 나갈수록 교회는 비로소 교회를 붕괴하는 모든 적을 해체하고 생명의 선포 기관으로 기능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단언컨대 거의 아무것도 해석하지 않는다. 성서 텍스트에 드러난 실존의 문제를 전혀 해석하지 않는다. 예수의 말씀과 그의 행동이 갖는 대사회적 콘텍스트(context)에 대해서도 해석하지 않는다. 남은 건 해석하지 않는, 무조건 믿기만 하라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에 근거한 열정 훈련뿐이다.

표절의 왕국에서 허우적거리는 목회자가 교회의 가치 유지를 위해 몰두하는 건 체제 결속으로서의 열정 훈련이 전부다. 그런 교회가 무슨 수로 해석학적 공동체 기능을 논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교회 안의 적은 성서가 말하는 정신의 본질에 대해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무뇌아들의 공동체를 생산하는 해석의 부재다.

선민의식의 창궐

그럼에도 교회는 자신들의 형해(形骸)뿐인 정체성을 타자화(他者化)한다. 교회의 네 번째 적은 억지의 타자화를 곧바로 선민화로 연결하는 데 익숙한 선민의식이다. 교회는 이미 무지와 오만, 독선과 아집의 집약체가 되었음에도 단 하나 포기할 수 없는 무기를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란 명제 확보의 자부심이 그것이다.

성서는 예수가 과거 유대인들의 오만과 독선, 해석의 부재와 오해로 점철된 선민의식에서의 해방을 선포했다고 증언한다. 이렇듯 성서는 선민의식을 가장 참담한 적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성서가 말하는 적을 향한 고발, 그 예언자 정신을 정반대의 미덕으로 숭배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유대인들의 메시아에서 이방인들의 예수 그리스도로 선민의식을 대표하는 구호가 대치되었다 해서 선민의식이란 적의 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의 교회는 우리는 세상과 다르다는 근거 없는 명분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란 구호의 그늘 아래 선민의식으로 무장하는 데 익숙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회는 어느 순간부터 전능한 조직이 되어 버렸다.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규모의 괴물이 포악한 굿판을 벌이고, 양심 마비의 표절 의식이 예배 일상으로 자리 잡고, 예수 가르침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믿기만 하라고 말하며, 해석학적 공동체이기를 스스로 포기해도, 그래도 교회는 최소한 구원은 보장받는다는 근거 없는 선민의식으로 유지된다. 그와 함께 교회는 선민의식을 자기네 조직의 합리화, 폭력적 행위의 정당화를 위해 사용하는 일에 익숙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런 식의 조직, 이런 식의 공동체가 교회일까. 아니다. 그건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교회답지 못하게 하는 교회를 좀먹는 최악의 적, 적 중의 적이다.

그러므로, 상실의 시대

그러므로 마지막, 교회를 죽이는 다섯 번째 적은 상실의 상태를 꾸역꾸역 살아가는 우리네 교회의 초라한 자화상, 그 자체다. 교회가 교회로서 최소한의 역할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무엇을 어떻게 돌이켜야 할지 좌표조차 설정하지 못한 채 표류하는 비극을 슬퍼하지 않는 현실, 오늘의 교회는 상실의 시대를 직시하지 않는다.

이렇듯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상실의 시대를 방관하는 교회의 자화상은 매춘적인 세속화의 늪 을 헤맬 수밖에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허무의 길 위에서 신음하는 오늘의 교회, 그 앞에 선 우리가 내뱉는 오적(五賊)의 고발은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임을 통렬히 고백하는 것과 같다. 교회 안의 오적을 인식하는 솔직한 용기, 진실의 민낯과 마주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담력이 요구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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