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4월 20일 저녁, 사람들이 서울 충무로역 남산스퀘어빌딩 처마 밑으로 모여들었다. '부당 해고 철폐, 원직 복직 쟁취, 비정규직 철폐'라고 쓰인 노란 걸개를 몸에 두른 중년 여성 두 명과 20대 청년 네 명이었다.

한 명이 익숙한 손길로 준비해 온 현수막을 꺼낸 후 바닥에 폈다. 현수막에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 혁명기도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위에 초도 하나 밝혔다.

빌딩 안 경비가 와서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냥 갔다. 잠시 후 기도회가 시작됐다. 기타를 메고 있던 청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찬양을 시작했다. 함께 찬양을 부른 후 시편 49, 53편을 번갈아 가며 읽었다. 조용한 가운데 함께 읽는 주기도문이 새롭게 다가왔다.

▲ 서울 충무로역 근처 남산스퀘어빌딩에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이곳에 모여 기도회를 여는 혁명기도원 회원들과 사회보장정보원 해고 노동자들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설교는 없었다. 대신 참석자가 돌아가며 기도 제목을 나누고, 기도하는 것으로 기도회를 마쳤다. 사회보장정보원 해고 노동자인 중년 여성 두 명은 한 주간 힘들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담담히 얘기했다. 평소 투쟁 현장에서 듣는 '현장 증언'과는 조금 달랐다. 청년들은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혁명기도원은 현재 매주 수요일 저녁 사회보장정보원 부당 해고 노동자들과 예배한다. 사회보장정보원은 복지부 산하 준정부 기관이다. 2012년 12월 28일 정규직 전환을 앞둔 노동자 42명을 일괄 해고한 뒤 3개월 초단기 계약을 제시하며 재입사를 권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해고 노동자 20여 명은 노동조합을 결성해 투쟁을 시작했다.

의욕 넘치게 시작할 때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지쳐 갔다. 회사가 1년 비정규직 계약을 제안하자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고 재입사한 사람들도 있다. 현재는 두 명만 남아 지루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다. 싸움 초기에는 노동 활동가도 많이 모였다. 하지만 길어지는 싸움에 관심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혁명기도원이 이들과 함께 예배한 지 벌써 일곱 달이 지났다. 비가 많이 올 때나 총선 같은 큰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기도회를 거스른 적이 없다. 사회보장정보원 봉혜영 분회장은 이들의 기도가 큰 위로가 된다고 했다.

"벌써 투쟁 시작한 지 1,200일이 넘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나약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버텨야 한다는 걸 알지만 쉽지 않아요. 하지만 혁명기도원과 함께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평안해져요. 이분들에게는 힘들다고 말할 수 있거든요. 힘들 때 돌아보면 혁명기도원이 늘 옆에 있었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를 주시는 분들이에요."

▲ 사회보장정보원에서 무기 계약직 전환을 앞두고 해고된 봉혜영 씨(왼쪽 두 번째)는 "혁명기도원의 존재가 큰 힘이 된다. 힘들 때 돌아보면 늘 곁을 지키고 있는 분들"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혁명과 기도가 무슨 상관이람?

혁명기도원은 2011년 4월 30일 밤 시작됐다. 트위터에서 시작된 책 읽기 모임이 발단이었다. 안병무 선생이 쓴 <갈릴래아의 예수>(한국신학연구소)를 다 읽은 이들은 책 내용을 삶의 현장에 접목하길 원했다. 가장 기독교적인 방법으로 싸울 수 없을까 고민하다 생각해 낸 것이 기도원이었다. 다만 건물 안에 갇혀 있는 기도원이 아닌 삶의 현장인 길거리로 기도원을 옮겨 오기로 했다.

"기도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아니었다. 성경에 나오는 첫 예배 장소가 길거리인 점에도 주목했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신 곳도 전부 길 위였다. 그가 다니신 곳은 건물 안이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었다. 예수님과 성경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리고 싶었다. 꾸준하게 길에서 기도회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고 싶었다.

회원들은 무작정 길거리로 나섰다. 마침 서울대 학생들이 대학 법인화에 반대하며 본관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촛불 문화제를 열며 즐겁게 시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혁명기도원도 여기 참여했다. 서울대 농성장, 홍대 두리반 현장, 명동 카페마리 현장을 돌았다. 방법은 한결같았다. 매주 수요일 7시에 모여 찬양을 한 곡 부르고 성공회 전례대로 기도회를 진행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투쟁 현장이나 쫓아다니는 '좌빨(좌익 빨갱이) 청년들'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들은 가장 보수적인 방식으로 연대하는 길을 택했다. 찬양과 기도가 어우러진 기도회였다. 개인 해석이 들어간 설교나 강해도 없다. 투쟁 현장에 늘상 들리던 구호 외치는 소리도 없다. 그날의 말씀을 함께 읽고 마음을 나누면 그걸로 끝이다. 대신 꾸준하게 했다. 일 년 52주, 매주 한 시간씩 투쟁 현장에 할애했다.

▲ 혁명기도원은 북아현동 철거민 투쟁을 1년 반 동안 함께했다. 매주 수요일 저녁이 되면 길가 한쪽에서 함께 모여 찬양하고 예배했다. 이들이 투쟁하는 방법은 '찬양과 기도'였다.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나눴다. (사진 제공 혁명기도원)
 

명동 카페마리 투쟁이 끝난 후 북아현동 철거민 투쟁 현장으로 옮겼다. 그사이 연희동 분더바, 종로 신신원 등에서도 기도회를 진행했다. 사람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사순절에는 북아현동 현장 주위를 돌며 '노방 전도'를 감행했다. 성인 키만 한 나무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전단을 만들어, 만나는 사람에게 나눠 줬다.

혁명기도원 회원들에게 북아현동 철거민 투쟁 현장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장소다. 1년 반 동안 함께하기도 했고 철거민 부부가 납득할 수 있는 성과를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이 부부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혁명기도원과 함께 예배하고 난 이후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했다. 현장에서 세례도 받았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혁명기도원'

'혁명'을 말한다고 해서 모두가 진보적인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각자 신앙을 고민하다 혁명기도원을 만난 후 새로운 신앙에 눈을 뜬 이들도 있다. 장로교 집안에서 자란 쌔미(활동명)는 현재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자신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혁명기도원 기도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한번 들렀다가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장로교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성공회 예전을 처음 보면 어색할 법도 하다. 쌔미도 처음에는 살짝 이질감이 들었으나 부르는 찬양이 익숙한 것들이라 괜찮았다. 길거리 기도회에 참석하는 아들을 보며 부모님은 왜 꼭 길에서 기도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매주 읽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다. 천안에 살면서 매주 서울에 올라왔다. 쌔미에게 혁명기도원은 교회와 같은 곳이었다.

▲ 알버트(왼쪽)는 북아현동에서 활동하고 있는 혁명기도원의 소식을 기사로 접하고 함께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닐 때도 상사에게 혼나가며 매주 수요일 기도회를 찾았다. 혁명기도원을 만든 여원장(가운데)은 "성경과 기도원을 원래 있던 거리로 돌려보내기 위해 혁명기도원을 시작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알버트(활동명)도 스스로 기도원 모임에 왔다. 군대에 갔을 때를 제외하고 시간이 될 때 꾸준하게 참석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선교 단체에 열심을 다했지만 단체의 구조가 군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고 그만뒀다. 신앙이 무엇인가 고민하다 우연한 기회에 북아현동에서 기도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현장에 갔다. 길에서 하는 기도에는 예상치 못한 힘이 있었다.

꼭 개신교인이 아니어도 함께할 수 있다. 북아현동 투쟁 때는 가톨릭 수사가 꾸준히 기도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투쟁 당사자들이 개신교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함께 기도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현재 함께하고 있는 사회보장정보원 봉혜영 씨도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렇지만 성서를 함께 읽고 느낀점을 나누는 순서에서 빠지지 않는다.

길거리 기도회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한 번 만난 인연들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북아현동에서 합정동으로 옮겨 간 곱창집 사장님 부부는 여전히 혁명기도원 회원들을 챙긴다. 종로 신신원이라는 중국집도 마찬가지다.

혁명기도원은 당분간 사회보장정보원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한다. 길에서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해고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복직되는 날이 곧 기도회가 끝나는 날이다. 이 날이 언제 올 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매주 정해진 시간에 함께 기도하며 곁에 있어 주는 일이다. 모임을 처음 시작한 원장(활동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현장에 뭘 해 주는 것이 아니에요. 현장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가 오는 것이죠. 만나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지역을 넘어서는 더 큰 교회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생각입니다."

▲ 혁명기도원이 예배하는 곳은 언제나 거리다. 사람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사진 제공 노랑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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