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말하기 불편해 하는 또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노동문제다. 갈등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이해했다 해도 노사 갈등은 난제 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갈등은 노사 갈등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진보파 내지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계급투쟁으로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 너무 지나칠 정도로 투쟁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취업난이나 실업, 비정규직 문제를 보면 그렇게 싸울 수밖에 없겠다고 이해가 되면서도 노동운동도 좀 합리적으로 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노동문제 앞에서 민주주의는 무기력해 보이는데, 민주정치론에서는 노동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정당과 정치가들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소양은 노동문제를 계급 투쟁적 관점이 아닌 민주주의의 문제이자 공동체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문제로 다루는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노동문제는 진보뿐만 아니라 보수도 중요하게 여기고 잘 다뤄야 한다.

진보, 보수만이 아니다. 예컨대 기독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노동문제에 대해 가장 적극적 가치를 부여한 종교가 있다면 그건 기독교가 아닌가 한다. 주일의 경건한 휴식과 예배는 곧 주중의 노동 혹은 자신의 일에 대한 헌신이 허락하는 은총이라고 본다. 수도사와 선교사들의 가장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도 노동에 있었고, 직업의 귀천과 상관없이 일하기 힘쓰는 것을 중시한 것도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일하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이 날로 불평등해지고 힘들어지는 문제에는 무감한 채, 그들의 절박한 요구를 '빨갱이들'로 몰아붙이는 목회자의 설교와 그의 “노기에 찬 목소리와 무서운 눈”을 지켜볼 때마다 참혹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경제 독트린의 하나인 1)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낳은 부정적 영향 가운데 하나는'일에 대한 헌신이 갖는 가치' 내지는 ‘노동의 존엄성이 갖는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데 있다. '노동 유연성'(Labor Flexibility)이라는 부드러운 말은 실제로 비정규직 양산과 실업 증가를 가져왔다. 그로 인한 고용 불안과 빈곤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가 아니라 노동비용의 축소를 가능하게 해 주는 정상적 시장 요소로 간주되었다. 이렇듯 상당수의 노동자가 열심히 일할 기회도 갖지 못하는 잉 인간이 되면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대신 "일하는 것이 특권이자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새로운 노동 윤리가 만들어졌다. 이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경제 독트린은 지금껏 없었다.

이를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라는 외적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태의 절반만 보는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그간의 정치가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제어하고 완화하는 데 있어서 매우 무능력했다는 사실에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천했다. 이는 그 뒤의 노무현 정부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민주화 20년의 비극적 결산이 아닐 수 없다. 집권해서 공동체를 더 잘 운영할 실력을 갖지 못한 채, 그저 정권 교체에만 모든 것을 거는 야당 정치 역시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다. 집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집권해서 무엇을 할지 성실하게 준비하는 것이 수백, 수천 배 더 중요하다.

우리는 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가? 민주주의 자체의 그 어떤 숭고한 뜻이나 이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그런 접근이 위험할 때도 있는데, 이념이나 가치가 과도하게 강조되고 맹목의 신화가 되면 현실의 실제 문제를 못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이명박 연합'이니 '반박근혜 연합'이니 하는 식으로 구호화된 '민주주의 수호론'은 별 영향력을 갖지 못한 채 많은 시민들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접근을 통해 과도하게 물신화되고 의인화된 민주주의가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직면해 있는 삶의 구체적 현실을 생기 없는 모조품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힐 때, 보통의 평범한 시민들을 위한 정치체제가 될 수 있을까? 같은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계층 간 평등의 정도가 큰 나라가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가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강력한 설명의 하나는 기업 운영-노사 관계-정당 체계-정책 결정 과정에서 노동의 시민권이 얼마나 폭넓게 보장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노동과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를 조사한 여러 학자들이 강조하듯이, 노동자들의 이익과 열정을 대변하는 노조와 정당의 힘이 강한 나라일수록 계층 간 불평등 정도는 작고 빈곤율도 낮다. 투표율은 어떨까? 노동의 정치적 대표성이 클수록 높다. 또 그럴수록 범죄율도 낮고 사회적 약자 집단에 대한 보호의 수준도 높다. 시장 경쟁에 내몰리는 정도도 낮고 규제 없는 금융 개방에 대한 방호벽은 높으며 그 결과 경제체제도 안정적이다.

하지만 노사분규가 증가하고 급진적 노동운동이 출현할 가능성은 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서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의 권리가 폭넓게 인정될수록 전체적으로 높은 수준의 산업 평화가 유지된다. 미국의 정치학회와 사회학회 회장을 역임했던 세이무어 마틴 립셋은 노동의 참여가 확대될수록 노동운동의 탈급진화 경향이 커지는 것을 하나의 법칙적 사회현상으로 설명한 바 있다. 노동의 집단적 영향력이 커지면 오히려 사회적 책임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이야말로 왜 우리가 노동 배제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노동 참여적인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노동의 시민권에 폭넓은 기초를 둘 때에만 민주주의는 안정되고 또 인간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잘 알다시피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고 하는 생산 체제 위에 서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역사상 그 어떤 생산 체제보다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계층 간 불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둔 것이자 인간 사회의 공동체적 통합을 위협하는 부정적 효과를 동반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상적인 정치를 구상하고 조화로운 이성적 공동체를 꿈꾼다 하더라도, 현실의 불평등한 계층 질서와 갈등 관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를 빼고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허구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으로, 그 수에 있어서나 조직적 잠재력에 있어서 그에 견줄 만한 세력은 없다.

따라서 이들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이해되느냐에 따라 그 나라 민주주의의 내용과 질은 크게 달라진다. 노동을 축소해야 할 생산 비용으로 간주하고 참여에서 배제하려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노동만 배제하는 게 아니라 사실상 사회 전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다. 노동을 배제하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온전할 수도 없다.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을 빨갱이나 좌경으로 몰아가는 비이성적 억압의 논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 논리는 노동으로 먹고사는 사람을 멸시하고 천대하면서 못 사는 사람을 멀리하는 심리를 만들어 낸다. 이런 환경에서는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윤리적인 토양이 척박해질 수밖에 없다.

가끔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느냐'를 따져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민주주의가 밥 먹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정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경제적 분배 효과가 계층별로 달라질 때, 민주주의는 안정된다. 그 경우 어느 사회집단이든 정치 참여의 욕구가 자신들의 필요에서 발생하며, 결과적으로 개인과 민주주의 사이의 결합이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노동 정당이 없는 미국조차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와 공화당이 집권했을 때 계층별 소득분배는 뚜렷하게 다르다.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에 인용해 잘 알려진 프린스턴 대학의 래리 바텔스(Larry M. Bartels) 교수의 책 <󰡔불평등 민주주의>(21세기북스)󰡕에 따르면 1947년에서 2005년 사이 미국 인구의 20퍼센트를 차지하는 가난한 빈곤 계층의 소득 증가율은 공화당 집권기에 비해 민주당 집권기에 6배나 더 높았음을 볼 수 있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아직까지 이런 함수관계를 만들지 못했다는 데 있다. 기대했던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하에서 비정규직은 크게 늘었고 소득분배는 악화되었으며 사회 하층의 빈곤화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남북한 사이의 평화 관계를 구축하고 여러 개혁 조치를 취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평범한 보통 사람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중요하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비정규직의 눈으로 볼 때, 정치를 누가 하든 자신들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참여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가는 주범은 다른 것이 아닌, 노동 배제적이고 하층 배제적인 사회다.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노동 없는 정치'가 가난한 보통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데 있다.

어느 사회든 노동문제는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공동체적인 문제다. 노동 윤리 내지 일에 대한 헌신을 갖지 못하는 공동체가 풍요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과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땀 흘려 일하는 보람을 향유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가장 원초적인 소명이 아닌가 한다. 

1) 신자유주의: 정부의 적극적 경제 개입을 내세운 케인스주의가 쇠퇴하면서 등장한 경제 독트린. 해고 요건을 완하는 노동 유연성, 민여오하, 탈규제, 탈복지 등을 강조한다. 2017년대 후반부터 정부 차원의 모든 인위적인 경제 개입을 공격하면서 '자유 시장' 논리를 설파했다. 고전적인 경제적 자유주의보다 자유의 방임 원리를 문화적, 사회적 차원에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은 무정부적 자유 지상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요구하는 시장의 탈정치화는 정부의 공적 재분배 기능과 노동조합의 역할을 약화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시도라는 비판이 많다.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1. 기독교와 정치학의 대화

2. 불완전한 인간의 정치

3. 인간의 자유의지와 민주적 자치

4. 민주정치를 위한 참여의 열정

5. 누가 정치를 이끌어야 할까

6. 신은 민주적 과업을 좋아하신다

7. 민주주의자는 정치주의자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8. 인간은 왜 정치적 동물인가

9. '진정성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을까

10. 철학적 인간 vs. 정치적 인간

11.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통치론

12.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3. 소명으로서의 정치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 친화적인 시민 문화가 필요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 체계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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