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문밖교회 손은정 목사. ⓒ뉴스앤조이 신철민

노동자교회, 민중교회의 상징 성문밖교회(목사 손은정)가 올해로 30주년을 맞는다. 노동운동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탄압을 받던 암울한 시기, 성문밖교회는 권력과 자본이 '성문밖'으로 밀어낸 노동자들의 안식처였다. 노동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로 북적이던 성문밖교회는 세월이 흐르면서 30여 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로 변했다. 교인도 노동자보다는 박사와 의사, 교사, 진보 정당의 당원, 시민단체 활동가 등 지식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변화된 현실에 맞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성문밖교회 손 목사를 지난 2월 14일 만났다.

30주년을 축하한다. 어떤 행사를 치르고 있나.

1월 중순에 구미정 교수를 초청해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들었다. 그는 한국교회가 어떤 모습인지 신랄하게 지적하고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세세히 제시했다. 지난 2월 10일에는 우예현 목사가 자신의 경험에 비춰 신앙공동체가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살지를 이야기했다. 예수가 서른 즈음에 공생애를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성문밖교회도 우리의 공생애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3월 11일에는 3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성문밖교회를 어머니로 생각하는 이들이 모이는 자리다. 많은 이들이 참석해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좋은 제안도 해줬으면 한다.

30년을 정리하는 작업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성문밖교회의 문을 연 조지송, 인명진 목사를 만나 인터뷰를 했다. 1970년대에는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총무가 성문밖교회 목회를 겸임했다. 이근복·진방주·손은하·오상열·박진석 목사 등 역대 목회자들이 자기가 목회한 시기에 대한 기록을 쓰고 있다. 초기부터 교회를 이끈 교인 다섯 분도 함께 작업하고 있다. 조 목사는 성문밖교회를 세운 것과 산업선교회 건물을 지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늘 말했다. 조 목사는 기도하고 찬송한다고 다 교회냐고 했다. 참된 교회는 여성 노동자들의 모임이라고 말했다. 자기 삶을 두고 진지하게 성찰하고 싸우는 이들의 삶이 성서가 말하는 교회라는 것이다. 그는 제도라는 틀로는 교회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고, 운동이 건물에 갇히면 역동성을 잃는다고 말했다. 처음엔 없어져야 할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것 같아 섭섭하고 찜찜했다. 그렇지만 교회에 대한 이분의 기준이 높구나 하고 생각했다. 인명진 목사는 산업선교회가 정부와 교단의 탄압을 워낙 심하게 받아 방패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무늬만 교회가 아니라 신앙을 가진 운동가들의 모임을 만들 생각이었다고 했다. 이들은 우리보고 느낌이 없다고 충고했고,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들을 지적했다. 선배 목사들과의 만남은 이후를 모색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70~1980년 산업선교회와 성문밖교회는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모였지만 이후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 노동자의 교회로 유명한 성문밖교회는 시대가 달라진 만큼 교인들의 구성도 많이 달라졌다. 손은정 목사는 달라진 교인들에 맞게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산업선교회는 노동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통로였다. 다른 데서는 모일 수 없었기도 했지만 노동운동을 이끌던 목회자들이 여력을 남기지 않고 헌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동자들은 산업선교회와 성문밖교회에서 형제 이상의 깊이로 만났다. 사실 그 때도 집회를 하면 수천 명이 운집했지만, 예배를 드리자고 하면 100명 정도만 모였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그나마 모이던 이들도 빠져나갔다. 신앙공동체로 남아주기를 바랐지만 노동자들은 떠났다.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에 만족할 수밖에. 교회 구성원도 과거에는 노동자가 주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현재는 어른 30명 정도가 모이는데, 70~80년대 노동운동을 한 '선배' 3분의 1, 노동운동에 참여한 지식인들이 절반 정도, 나머지는 지역에 사는 분들이다. 교인 중에는 진보 정당, 교육, 여성, 의료, 노동조합 등 전문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들이 많다.

그야말로 쟁쟁한 교인들이다. 과거가 화려하면 자칫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공동체로 전락하기도 쉽겠다.

▲ 성문밖교회 손은정 목사. ⓒ뉴스앤조이 신철민

2000년부터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2002년부터 담임 목회를 했다. 그러니 내가 성문밖교회의 역사를 운운하는 게 우스운 일이다. 그렇지만 내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다. 사실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좀 쉬고 싶다는 거다. 내가 부임했을 때도 사람들은 "이제 뭐 하자는 소리 좀 하지 마라"고 했다. 교인들은 운동의 중앙이든 변두리든 역사의 격변기를 고민하고 양심껏 행동하는 노동자, 지식인이었다. 교인들이 좀 지쳐있는 것 같다. 그래서 처음엔 문화적인 접근을 했다. 아웃사이더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밴드는 해체할 때까지 3년간 신나게 놀았고, 교회에도 많은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후 공부방을 시작했다. 교회가 지역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다. 공부방 재정은 교회가 아니라 내가 책임진다고 하고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쉬운 게 아니더라. 아이들과 잘 지내는 것 외에 신경 쓸 일이 왜 그렇게 많은지. 1년을 준비하고 1년을 활동하다가 중단했다. 늘 좌충우돌이었다.

그동안 성문밖교회는 민주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며 집사나 장로 같은 직분을 두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안수집사를 세웠다.

평신도 지도력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목회자가 하자는 대로 따라올 게 아니라 교회를 주도할 평신도 구심을 잡으려고 안수집사 세 분을 세웠다. 작은 공동체에서 굳이 안수집사 제도를 둬 간접 민주주의 방식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지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안수집사들은 교회 안의 작은 공동체를 이끈다. 과거에는 시대의 부름에 어떻게 응답할 건지, 어떤 사건에 성명서를 내고 집회에 참석할 건지 등 당장의 결단이 필요한 일만이 우리의 전부였다. "삶이 기도다"며 따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걸 소홀히 하고 성경을 읽는 것도 따지지 않았다. 친교도 도외시했다. 모름지기 신앙공동체라면 갖추어야 할 기본이 약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잘 교제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해서 삶으로 드러나기를 바라며 평신도 조직을 만들고 안수집사들을 대표로 세웠다.

▲ 성문밖교회은 과거 구로공단 한폭에 들어서 활동했지만, 이제는 브랜드 아파트 숲에 둘러쌓여 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부흥회를 했다고 들었다. 진보적인 교회와 부흥회는 어울리지 않는다.

부흥회를 하자는 제안이 나와 2005년 처음으로 부흥회를 열었다. 흔한 부흥강사를 부른 건 아니다. 주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환경사경회를 하기로 마음먹고 칠곡에서 10년 넘게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곽은득 목사를 초청해 말씀을 들었다. 작년에는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양재성 목사를 초청했다. 두 분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어떤 꿈을 꾸는가.

사회를 바꾸기 위해 투신했던 사람들이 지난 10여 년간 자신을 찾아 헤맸다고 생각한다. 이제 기운을 추슬렀으니 차오르는 힘으로 뭔가 일을 시작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게 사회의 문제든, 이웃의 문제든, 교회 내부의 문제든 어떻게 응답할지 고민할 시기다. 성문밖교회는 큰 파장을 일으키지 않더라고, 비록 소박하더라도, 제대로 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려 애쓸 것이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