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삶의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분주하게 지내면 지낼수록 무의미의 심연에 더 깊이 끌려 들어가는 이 시대에 복음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9쪽) 청파감리교회 담임 김기석 목사가 쓴 마태복음 사색서 <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 서문에 있는 문제 제기다. 우리는 "모든 것이 착종처럼 보이는 시대, 길이 보이지 않는 시대"(8쪽) 한가운데 있다.

복음서를 읽는 것은 예수를 읽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내려와 "세상의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9쪽) 예수는 우리가 되찾아야 할 삶의 자리,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몸소 보여 주셨다. 김기석 목사는 마태복음 본문에 기초해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대상화"(10쪽)하고, 정작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지는 않는 이들에게 예수를 따르라 말한다.

<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는 마태복음 본문을 한 절 한 절 따져 가며, 그 의미를 세세하게 짚어 내는 책은 아니다. 주해서나 신학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가 마태복음을 사색하면서 성찰한 것을 풀어 썼다고 보면 되겠다.

<강단과 목회>에 연재했던 원고 51편과 저자의 마태복음 설교문 9편을 골라서 순서대로 나열했다. 저자는 4~10쪽에 걸쳐 짤막짤막하게 본문을 풀어 간다. 하지만 이름난 독서가이자 사색가답게 적실한 인용과 통찰로 읽는 이들의 효과적인 묵상을 돕는다.

저자는 예수의 전체 사역을 '사망의 땅', '그늘에 앉은 자'를 찾아가는 것이라 정리한다.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자와 약한 것을 고치기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자가 따라야 할 예수의 길, 하나님나라 복음이 무엇인지 책 전체에 걸쳐서 풀어낸다.

▲ <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 / 김기석 지음 / 두란노 펴냄 / 324쪽 / 1만 6,000원 ⓒ뉴스앤조이 강동석

경계를 가로지르신 예수

"예수는 끊임없이 움직임으로써 로마제국에 의해 부과된 세계, 그리고 유대교가 구축해 놓은 세계 질서에 틈을 내신다. 거룩함과 속됨,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무너졌다. 하나님나라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누구도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모두가 형제자매일 뿐이다." (126쪽)

하나님나라 복음은 위아래, 양옆을 가리지 않는다. 대립되는 것들의 하나 됨을 지향한다. 어떤 이도 차별 대우하지 않고 '형제자매'라 칭한다. 예수는 "한마디로 수많은 경계를 가로지르신 삶"(182쪽)을 살았다. 반면 기존 질서는 끊임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구획 짓는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경계선을 쳐 놓고 삽니다.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휴전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과 노동자, 신자와 불신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가진 자와 가난한 자, 내국인과 이주민, 노인과 젊은이…. 그러나 경계선의 한쪽에 머무는 한 우리 삶은 편벽됨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경계선의 저편에도 삶이 있습니다. 경계선 저편의 사람들과 만날 용기를 내야 합니다.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서로를 가르고 있는 경계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위적인지 드러납니다." (182쪽)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습화되고 굳어진 가치를 내려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저자는 마태복음에서 첫 제자들이 예수를 따를 때, 어떤 망설임도 없이, 자기 것을 '버려 두고' 곧바로 따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에게 "따름의 엄중성"(50쪽)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려놓음은 경계선 너머에 있는 자들의 삶에 귀를 기울인 예수의 자세를 본받는 것으로 나아간다.

"두 번의 부름 이야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버려 두고'이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는 따름이 불가능하다. 전우익 선생은 '참삶이란 부단히 버리고 끝끝내 지키는 일의 통일이리라'고 말했다. 손에 잡은 것을 놓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붙잡을 수 없다. '말'(末)을 버리고 '본'(本)을 붙잡는 것이 믿음이다." (51쪽)

▲ 기존 질서와 관습이 구획 짓고 있는 경계선을 뛰어넘을 때, 우리는 예수를 따를 수 있다.

고통받는 자들을 선대하라

하나님나라는 산술적으로 적용되는 평등 개념을 지향하지 않는다. 저자는 예수께서 "진정한 공평은 산술적 평등이나 딱 맞아떨어지는 계산이 아니라고 말씀"(227쪽)하셨다고 지적하며, "하나님나라는 가장 절박한 처지에 빠진 이의 곤경을 해결해 주기 위해 마음을 모을 때 이 땅에 도래한다"(227쪽)고 말한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 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비유도 같은 맥락에 놓인다.

"99대 1이라는 산술적 도식으로 보면 이 이야기는 불합리하다. 하나를 찾다가 나머지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매우 타당하다. 잃어버린 하나를 찾는 것이야말로 모두를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질서나 효율을 명분으로 해서 '하나'를 쉽게 버릴 수 있는 사회는 때가 되면 '모두'를 버릴 수도 있는 법이다." (211쪽)

질서나 효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결국 낙오자를 버리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낯선 자를 그냥 낯선 그 자리에 놓아두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다르다. 예수를 지향하는 삶은 낯선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저자는 레비나스의 말을 빌려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283쪽)에게 주목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고통받는 자들을 선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 "예수는 지금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의 모습으로, 쪽방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의 모습으로, 이주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가족의 죽음으로 가슴이 무너진 이들의 모습으로, (중략) 우리 곁에 오고 계신다." (283쪽)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임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낯선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그를 향한 사랑을 선택할 때, 그래서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때 비로소 인간의 윤리가 완성된다'고 말했다. '낯선 타자'는 막연히 낯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대면하기 꺼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중략)

예수는 고통받는 이들을 '내 형제'라 부르신다. 진실한 믿음은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들을 어루만지고 일으켜 세우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중략) 믿음의 진실성은 약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282~283쪽)

마태복음은 반대되는 이들과의 대조로, 낯선 타자들을 부르시는 예수의 삶을 또렷하게 묘사한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유대 총독, 제자 등등이 그 대상들이다. 이들 중에는 결국 예수와 반대되는 길을 걷다가 생을 마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낯선 이들을 감싸 안는 삶을 선택한 사람도 있다.

자기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 예수를 적대하고 어두운 시대에 매몰된 자기 가치를 지키는 자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결국 예수의 길을 걷게 되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으로 일으킴을 받은 자, 예수께서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을 붙들고, 예수로부터 희망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우친 자들이다.

"저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면 '직립의 사람'이 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던 앉은뱅이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었습니다. 예수님이 들어가시면 이처럼 선 사람이 됩니다." (320쪽)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0).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다. '함께하시는 주님', 임마누엘. 우리 삶의 희망은 여기서 움터 나온다."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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