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민주주의란 '갈등에 기반을 둔 갈등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갈등이란 현대 민주주의를 움직이게 하는 엔진에 가까운 기능을 한다. 다만 민주주의는 갈등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갈등의 수를 줄이고, 규모가 큰 갈등 속에서 작은 갈등을 해결, 완화하는 것을 추구한다. 

사소한 갈등만 정치화되면 어찌 되겠는가? 중요한 갈등을 중심으로 사회를 넓게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갈등을 사회화하는 데 정당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회 하층의 이익과 열정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일수록 갈등을 사회화하는 역할을 해야 민주주의가 좋아진다. 아무리 민주주의 정치체제라 할지라도 정당정치가 사회 갈등을 폭넓게 조직하고 동원하고 통합하지 못한다면 그때의 '시민 주권'은 온전해지지 않는다. 

갈등이란 지역・종교・소득・직업・성・고용 형태 등 우리가 서로를 정의하는 사회적 차이를 뜻한다. 나아가 경제민주화나 사회복지와 관련해 국가 개입과 시장 자유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 등 쟁점 사안에 따라서도 우리는 진보냐 보수냐 등의 의견 집단으로 호명된다. 어떤 형태로든 갈등 사안을 둘러싸고 집단으로 호명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사회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이런 갈등 때문에 불러들여진 정치체제이고 또 그런 갈등 때문에 존재한다. 갈등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시 강조하건대, 민주주의는 갈등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다.

이런 가정을 해 보자. 만약 사회에서 존재하는 갈등의 분포와 정치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갈등의 분포가 다르다면 어떻게 될까? 특정 인종이 사회적으로 큰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음에도 그들의 목소리가 정치적으로 배제된다면 어떻게 될까? 고용조건이나 임금에서 큰 차별을 받는 비정규직의 문제가 정치의 영역에서 다뤄지고 있지 않다면, 시민으로서 그들의 주권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회집단만으로는 부족하다

시민이나 일반 대중이 자신의 이익을 '직접' 조직하고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다. 우선 사적 이익집단이든 공익적 시민운동이든 사회집단이 동원할 수 있는 사회 갈등의 범위는 그리 넓지 않다. 

사회집단은 각자의 협소한 이익과 관심의 범위를 넘어 갈등을 폭넓게 조직하려고 해도 어느 수준에 이르면,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자니 기존의 참여자가 줄어든다. 이들의 참여를 유지하자니 갈등의 범위를 축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단일 이슈에 강한 사회집단과는 달리, 정당은 노동 정책에서 교육, 국방, 경제, 외교, 경제, 문화, 농민, 자영업, 청년, 여성, 장애인 정책 등 공동체와 관련된 전 분야를 다뤄야만 지지자도 늘리고 집권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결사체이다. 

사회집단만으로 불충분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그것은 사회집단들이 정부를 향해 경쟁적인 압력 행사를 최대한 조직한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그 영향력은 사회 상층에 유리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공익적 목표를 지향하는 집단(우리는 이를 시민운동이라고 부른다)을 사례로 봐도 그 구성원들의 다수는 중산층 이상의 계층적 배경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사례에서 보듯, 시민들을 주민 투표나 타운 미팅에 직접 참여하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대개는 교육 수준이 높은 중산층들이 참여해 감세를 결정함으로써 가난한 주민들의 전기, 수도, 교육을 지원할 주정부의 예산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갈등의 범위와 하층의 참여를 최대한 확대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갈등의 사회화'를 지향한다. 달리 말하면 최대한 많은 사람이 갈등에 관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 곧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다. 예컨대 비정규직 문제를 개별 사업장의 문제 혹은 노동시장의 문제로 국한하는 게 아니라, 고용구조나 경제체제의 운영을 둘러싼 갈등으로 확대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상층계급은 갈등의 민영화 내지 사사화(私事化, privatization)를 선호한다. 즉 기업이든 시장이든 자신이 관장하는 사적 영역으로 국지화되길 원한다. '노사 자율'과 '규제 철폐'가 그들의 슬로건이 되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사적 영역에서는 자신들이 강자 집단이기 때문이다. 갈등의 범위가 기업과 시장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약자들이다. 그들은 갈등의 문제에 더 많은 사람들과 집단이 관여하게 됨으로써 사적 영역에서 자신들의 약한 지위가 달라지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에서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옮겨서 다루는 데 있다. 민주주의에서 사회 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전달하는 것은 정치의 기능이다. 그리고 현대 정치의 핵심 기구는 정당이다. 갈등이 공적 영역에서 제대로 된 정당에 의해 조직되면 갈등의 규모는 커지지만 갈등의 수는 줄어든다. 민주정치의 비결은 여기에 있다.

정당 없는 민주주의, 미래 없다

정치학에서 말하는 정당은 수많은 정의를 갖는다. 가장 고전적인 정의는 '조직화된 사회적 의견' 혹은 서로 경합하는 '세계관'을 뜻한다. 따라서 그런 세계관이나 의견의 수가 둘이면 양당제, 그 이상이면 다당제라고 한다. 

중요한 점은, 정당이 생활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클수록 민주주의는 안정된다는 사실이다. 사회가 정당에 의해 대표되는 의견으로 나눠져 있으면 정치 갈등이 심해지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우선 정당이 학교와 노조, 가족으로 깊이 내려갈수록 시민들은 넓은 공동의 세계를 이루게 되고 그들의 세계 안에서 공통의 정치적 가치를 덜 갈등적으로 다루게 된다. 

비슷한 정치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생활 세계가 있어야 하고 그 위에서 정당들과 정치인이 시민을 대신해 공공 정책을 경쟁적으로 잘 운영하려 노력하는 정치가 될 때 민주주의도 안정된다. 그럴 때만이 사적 영역의 이슈들이 평화적으로 공적 영역과 접합된다. 그들 사이의 차이가 더 넓은 정치적 가치와 비전 아래에서 통합될 수 있다.

물론 정당이 발전되어 있다 해도 사회 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전환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느 사회든 상층계급은 이를 막으려 한다. 그래서 공적 영역 및 정치・정당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동원하는 데 열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정치・정치인・정당을 공격하고 비당파성에 찬사를 보낸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발전이란 이런 반정치주의의 도전을 넘어 일반 시민들도 정치에 평등하게 접근할 권리를 향유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당은 "다수의 동원에 적합한 특수한 형태의 정치조직"이다. 갈등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위계화해 가장 큰 규모의 대중을 동원함으로써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다. 정당을 통해 갈등의 수를 줄이되 갈등의 규모는 사회화해서, 가장 바람직한 공익이 무엇인지를 정당들이 서로 달리 대표하게 한다. 

그렇게 형성된 두 개 내지 세 개 정도의 공익적 대안이 선거에서 경합하게 하는 것, 그것이 좋은 민주주의의 조건이다. 그렇지 않고 정당이 공직자를 선출하는 데 머무를 뿐 대안을 조직하고 정치가 무엇을 둘러싼 것인가를 결정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면 시민은 온전한 주권자가 될 수 없다. 적극적으로 지지할 정당을 갖지 못한 시민이 많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나라의 민주주의가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당적이 있는가? 당적은 없다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픈 정당은 있는가? 어떻게 하면 참여하고 싶은 정당을 만들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정당들이 공익의 증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회피하고 한국 민주주의를 좋게 만들 전망을 갖기는 어렵다.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1. 기독교와 정치학의 대화

2. 불완전한 인간의 정치

3. 인간의 자유의지와 민주적 자치

4. 민주정치를 위한 참여의 열정

5. 누가 정치를 이끌어야 할까

6. 신은 민주적 과업을 좋아하신다

7. 민주주의자는 정치주의자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8. 인간은 왜 정치적 동물인가

9. '진정성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을까

10. 철학적 인간 vs. 정치적 인간

11.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통치론

12.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3. 소명으로서의 정치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 친화적인 시민 문화가 필요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 체계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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