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한 목사가 시골로 내려갔다. 2010년 다른 한 목사도 시골로 내려갔다. 목회 시작 시기는 서로 20년 차이가 난다.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다. 지역도 다르고 교단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두 목사 다 '정거'가 아닌 '정주'를 목표로 농촌 목회를 시작했다는 점 정도가 되겠다.

"목사님은 얼마나 있다 가실거유?"

1989년 이세우 목사가 전북 완주 들녘교회에 갔을 때, 교인들은 새로 온 목사를 환영하지 않았다. 들어 보니 교회 역사 40년 동안 왔다 간 목회자만 32명이었다고 한다. 가장 오래 있었던 목사가 4년 6개월을 보냈고, 나머지는 모두 1년을 못 버텼다.

"처음 올 때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함께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어요. 근데 1년을 못 채우고 다들 떠나는 거예요. 우리 교회가 미자립이라서 생활비도 제대로 못 드리니까 할 말은 없는데, 이제는 어느 목사가 오든 정 붙이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목사님은 얼마나 있다 가실거유?"

교인들의 첫 반응이었다. 오기가 생겼다. 기록을 깨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교인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목사입니다.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에 오래 붙어 있을 겁니다. 떠나지 않겠습니다."

대신 조건을 하나 달았다. 당시 교단에서 정한 목회자 최저생계비가 45만 원이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책정한 사례는 16만 원이었고, 그마저도 제대로 지급된 적이 별로 없었다. 목회자 생활비는 외부 지원에 의존했는데, 3개 교회에서 5만 원씩, 10만 원씩 후원을 받고 있었다.

외부 후원을 모두 끊기로 했다. 그동안 후원해 주신 데 대해 감사 인사를 드리고 더 이상 후원을 안 받겠다고 말씀드렸다. 교인들에게는 이제 외부 후원을 안 받을 테니 목회자 최저생계비를 교회에서 책임져 달라고 했다. 혹시 그 달에 사례를 못 채우더라도 다음 달에 나머지 부분을 덧붙여 받지는 않겠다고 했다. 일단 그 달 그 달 목회자 최저생계비를 책임지는 쪽으로 교회에서 힘을 모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27년이 흐르는 동안 목회자 사례가 미지급되거나 부족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목회자가 뚝심을 가지고 교회를 지키려 하자, 교인들도 마음을 모아서 목회자 생활을 책임지려 했다. 미자립을 면치 못했던 교회가 부임 1년이 못 돼서 자립으로 돌아섰다.

▲ 교인들에게 떠나지 않겠다 약속하고 27년을 지내 왔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서울에서 온 젊은 여자 목사

2009년 이희진 목사는 대학원 졸업 직후 스물일곱 혈혈단신으로 경북 영주 산골 마을에 들어갔다. 보증금 500만 원, 월세 15만 원의 빈집을 얻어 교회를 개척했다. 목사 안수 전 단독 목회를 3년 이상 해야 한다는 교단 규정이 있긴 했지만 그 때문에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농촌 목회를 사명으로 여겼다. 3년 후에 떠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교회 이름을 '빛마을교회'로 짓고 마을 어르신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드렸다. 서울서 온 젊은 여자가 참 별나게도 군다는 게 할머니들의 첫 반응이었다. 한 번 하고 그칠 줄 알았던 방문은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졌고, 홀로 집을 지키시는 할머니, 마을회관에서 고스톱 치는 어르신들은 점점 젊은 여전도사의 방문을 낯설지 않게 여겼다. 처음에는 듣는 시늉도 잘 안 하시더니, 나중에는 고스톱 판을 멈추고 이야기를 들으셨다.

주변에 오래된 교회들이 있었지만, 마을 전도의 동력은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농촌은 교회-교인-주민의 관계 틀이 시간이 지나면서 고착되기 쉬운 곳이다. 외부 유입 인구가 없고 구성원의 변동도 없다 보니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웬 젊은 여전도사가 와서 고요한 마을에 파문을 일으켰다.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 서울 큰 교회에 단기 선교팀을 요청했다. 1년 6개월이 지나자 마을 어린 아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린이 성도들이 하나둘 늘더니 17명까지 모였다. 작은 교회에는 어린이들로 북적였다. 시골 마을에서 심심하게 지내던 아이들이 교회를 제집 드나들듯 했다. 젊은 여자 전도사가 시골 마을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한 사람'

▲ "1년 반 동안 '한 사람'만 바라보고 지낼 때, 이 사람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17명 아이들과 함께하는 농촌 목회는 행복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년이 지나고 돌연 지내던 공간을 잃었다. 집 주인이 월세를 2배로 올리면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가까스로 마을의 다른 빈집을 임시 거처로 쓰게 되긴 했지만, 여건이 너무 열악했다. 지네, 곰박살이, 모기, 파리 등이 출몰했다. 집 근처에서는 두엄 더미가 하루가 멀다 하고 타고 또 탔다. 냄새 때문에 어른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두세 달 만에 아이들 발길이 뚝 끊겼다. 이희진 목사는 그때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모두 떠나고 청년 자매 한 명만 남았다. 자매는 아스퍼거증후군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해 왔다. 가뜩이나 과민하고 대인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자매가 열악한 장소에서 목사와 일대일 관계를 맺어야 하니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이 목사는 그때 목회에 대한 회의가 찾아왔다고 했다. 자매에게 오히려 해를 입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1년 6개월을 한 명만 바라보며 지냈다.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이 목사는 이때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믿음이 더 절실해졌다고 고백했다. 한 명 남은 자매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소통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매를 끌어안고 기도하게 됐다.

그즈음 의외의 만남이 이어졌다.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서울의 한 교회 목사님이 은퇴 직전 교인이 고급 승용차를 선물하겠다는 걸 마다하고 빛마을교회 건축 비용으로 돌려주었다. 그뿐 아니라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임시 거처 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다. 새로운 공간을 마련했다. 다시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연이 닿은 감신대 후배들도 주말마다 내려와 공동체 생활을 함께하기로 했다.

다시, 완주 들녘교회 이야기다. 이세우 목사는 27년 목회 여정 중에 기억나는 한 사람과의 관계를 떠올렸다. 교회에는 20년 넘게 홀로 장로 직분을 감당하신 분이 계셨다. 장로님은 한센병을 오랜 지병으로 앓아 오셨다. 처음 부임해 왔을 때 장로님은 편치 않은 몸 때문에 새로 온 목사에 대해 부담을 느끼시는듯 했다. 평생 교회밖에 모르고 지낸 분이었지만 늘 불편한 몸이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었다.

이세우 목사는 장로님 댁에 일부러 자주 찾아갔다. 회의할 일이 있으면 찾아가고, 식사 자리도 여러 번 만들었다. 예배 후에는 손도 잡아 드리고 포옹도 하면서 격 없이 대했다. 그런 모습을 본 교우들의 마음도 누그러졌다. 이 목사는 그즈음부터 교회가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교회 안에 생기가 돌자 가장 먼저 동네 어린이들이 반응을 보였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처음에는 3~4명이었는데, 부임 이듬해에 갑자기 80명으로 늘었다. 마을에 아이들이 많았고 돌봄이 필요했는데, 여태 못 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 발걸음이 잇따르자 들녘교회는 당시 전라북도 최초로 공부방을 열어 운영하기도 했다.

▲ 들녘교회는 주일 오후 4시에 '석양 예배'를 드린다. 해질녘 풍광이 멋지기도 하고, 어르신들이 저물어 가는 빛의 아름다움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농촌에서 길어 올리는 '생명'

27년이 흘렀다. 5년 전에는 새 예배당도 지었다. 이세우 목사는 "농촌 목회가 '생명 살림'의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사역지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후배 목회자들이 농촌 목회에 적극 뛰어들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대신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바로 '농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이 목사는 부임 이래로 지금까지 줄곧 직접 농사를 짓고 있다. 지금은 2,000평 가까이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는다. 그는 후배 목회자들이 '경운기는 물론이고 트랙터 정도는 몰 수 있는 기술'을 갖추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농사 지을 땅을 마련해 직접 농사도 지어 보고, 농부들과 뒤섞이는 훈련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영주 빛마을교회 이희진 목사는 공동체 식구들과 문화 사역을 벌이고 있다. 마을 잔치,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순회하며 창작 뮤지컬을 띄운다. 벌써 40곡 정도를 함께 만들었다. 유기농업과 마을 품앗이 사역도 꾸준히 하고, 마을 카페와 도서관 사역도 내다 보고 있는 중이다. 농촌에 계속 있을 거냐고 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 목사 역시 농촌이 도시의 반생명적 문화의 대안으로 새롭게 조명될 것이고 교회의 역할이 크다고 했다.

농촌 목회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등식에 망치질을 가한 목사들을 만났다. 한 명은 27년째, 한 명은 7년째 망치질을 계속하고 있다.

목회멘토링사역원은 5월 2일(월) 대전 늘사랑교회에서 '마을을 섬기는 시골 교회 워크숍'을 개최합니다. 농촌 목회 현장의 고민을 나누고, 마을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교회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공유하는 자리입니다. 시골 교회, 농촌 목회를 놓고 고민을 나누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싶은 분들을 초대합니다.

워크숍 프로그램 및 참가 안내(신청서 접수) 바로 가기
문의: 070-8766-2312, meet@pastormentor.kr

▲ 빛마을교회는 감신대 신학생들의 공동체 훈련 터전이기도 하다. 신학생들은 여기에서 노동과 살림, 공동체적 관계 훈련을 해 나가고 있다. ⓒ목회멘토링사역원 김재광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