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이는 천체망원경을 발명하여 지구 밖 세계를 관찰하는 능력을 향상시켰다.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을 입증하는 여러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동설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두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라는 책도 1630년에 출판하였다.
교회의 반발을 예상했던 터라 사전에 출판 허락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예수회와 도미니크수도회에서 문제를 삼았다. 결국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을 피할 수 없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거슬러 회개하는 조건으로 겨우 면죄받을 수 있었다.
신념에 반하는 회개 선서를 한 후, 돌아서 나오면서 그는 혼잣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과학사가들에 의하면, 이 말은 갈릴레이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후대의 학자들이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진실 여부는 차치하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은 지구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보는 관점 때문에 진실이 억압받고 있는 현실을 보여 주고, 태양 중심 사고가 변하는 것이 필연적임을 항변한다. 결국 부정할 수 없는 과학적인 증거에도 교회는 지구 중심 사고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지동설이 교회 중심의 사고를 반영하는 것이어서, 만일 이것이 무너지면 교회의 권위도 덩달아 붕괴할 것이라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갈릴레이의 일화를 연상케 하는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지하철 치한으로 몰린 청년이 무죄를 주장하면서 벌인 법정 투쟁을 다루고 있다. 2007년에 일본에서 개봉된 후 일본아카데미상 11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여우조연상, 미술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일본 영화 전문지에서 2007년 영화 베스트 10 중 1위를 차지했고, 관객이 뽑은 올해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될 정도로 평단과 관객 양측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수오 마사유키는 영화 '쉘 위 댄스' 각본을 쓴 장본인으로 한국 영화계에도 잘 알려져 있는 감독이다. 거듭되는 지하철 성추행 사건으로 민감한 대한민국 사회와 무관하지 않아 최근에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는 영화다. 영화는 "10명의 죄인을 놓친다고 해도, 1명의 죄 없는 사람을 벌하지 말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치한으로 오해를 받았다 해도, 결국에는 무죄로 판정될 것을 예상케 하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판사의 판결로 결말이 날 때까지 영화가 진행된다. 내용은 이렇다.
유죄 선고율 99.9%
특별한 직업 없이 살아가던 청년 가네코 텟페이는 회사 취직을 위한 면접을 보러 가는 날에 늦잠을 자는 바람에 서둘러 콩나물 전철에 승차하게 된다. 역무원이 승객들을 안으로 쑤셔 넣으면서 문이 닫히는 바람에 가네코 옷이 끼인 채 출발하였고, 가네코는 그것을 빼내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 앞에 서 있었던 여학생은 그의 이상스런 움직임을 자신을 성추행한 것으로 여겨 소매를 붙잡는 바람에 그는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가네코는 자신이 결코 하지 않은 일에 대해 굳이 변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수사 과정에서 대단히 소극적으로 대처한다. 나중에 정식으로 선임된 변호사가 경고하기 전까지 형사가 자신의 진술과 다르게 조서를 작성한 것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담당 형사는 물론이고 처음 유치장에 갇힐 때에 배정된 국선 변호사 역시 그가 잘못을 시인하고 합의하면 약간의 벌금형으로 사건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회유한다.
또한 변호사는 기약 없이 늘어질 재판 과정을 주지시키고, 성추행 건에서 승소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하며 합의할 것을 거듭 종용한다. 그러나 가네코는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합의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거듭 밝힌다. 왜냐하면 합의한다 함은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거로운 절차를 피하기보단 자신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경찰과 검사에 의한 회유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자 가네코는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다. 오랜 시간 동안, 10회에 걸쳐 진행된 공판에서 무죄를 입증할 여러 증거들이 제시되었음에도 가네코는 유죄로 판결을 받아 모두를 놀라게 한다.
공권력 수호인가, 인권 보호인가
사실 영화 중간에 일본의 사법 관례상 형사재판에 기소될 경우, 유죄를 선고받을 확률은 99.9%라는 말이 나오는데, 재판 과정에서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토대로 생각해 본다면, 대부분의 관객은 영화가 0.1%에 해당하는 사건의 한 사례를 다룰 것이라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가네코는 유죄를 선고받는다. 영화 제목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마지막 판결문을 낭독할 때, 가네코가 했던 말의 일부다. 판결에 결코 승복할 수 없음을 내비친 것인데, 그는 판사의 유죄판결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항변한다.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 너는 나를 심판하지만 나는 지금 너를 심판한다. 나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나는 결백하다."
판결은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다분히 국가의 공권력을 중심으로 사건을 보는 관점에 따른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건의 진실을 확인하고 개인의 정당한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하기보다 오히려 국가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고 또 공권력의 권위를 지키려는 목적으로 판결을 내렸다는 말이다.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은 이것을 증명한다.
첫째, 영화는 시종일관 치한으로 몰린 가네코와 그를 변호하는 사람들의 시각에 근거해서 전개된다. 이것은 치한으로 몰려 피고의 입장에 있는 사람의 인권이 잘못된 사법제도, 곧 공권력에 의해 어떻게 침해되었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그뿐 아니라 개인이 공권력을 상대하여 싸워 나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 말해 준다.
둘째, 처음에 공판을 담당했던 판사는 다른 형사사건에서 두 차례나 무죄판결을 내렸는데, 영화는 이 때문에 판사가 좌천성 인사 이동으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런 조치가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죄판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국가 공권력인 검찰이 잘못했음을 시인하는 골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네코 사건 역시 증거에만 의거해서 본다면, 분명 무죄로 판결이 날 일이었다. 공판 도중에 판사가 바뀐 것은 공권력의 권위를 지키는 일을 국가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셋째, 무죄를 입증할 증거가 제시되었음에도 유죄를 선고한 것은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사전에 막으려는 의도였다. 예컨대, 만일 검찰의 기소가 판사에 의해 무죄로 판결된다면, 그것은 공권력이 사건을 잘못 판단했다는 것이고, 이것은 향후 국가 행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형사소송의 승소율은 99.9%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국가의 한 기구로서 판사 역시 공권력 중심의 사고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공권력은 잘못이 없어야 하는가?
도대체 공권력도 잘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갈릴레이의 말을 연상케 하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다"는 선언은 일본 사회가 공권력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필연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결국 법은 국가를 전복하는 일이 아닌 사안에 대해서는, 국가보다 먼저 개인의 안전과 권리를 염두에 둘 것을 강조한다.
영화는 좁게는 일본의 사법제도를 비판하고 있지만, 좀 더 넓게 본다면, 일본에 만연해 있는 국가 중심 사고를 비판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정권에 따라 검사의 판단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판사의 판결 역시 달라진다. 만일 법 해석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다만 공권력 수호를 위해 판단하는 경우라면,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할 것인가. 정의의 부재로 온갖 부조리와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공권력은 무조건 옳아야 하고, 공권력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사고다. 전쟁 같은 위기 상황이 아닌 경우, 법은 공권력을 옹호하며 대변하기 전에 공권력도 잘못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사건의 진실에 의거해 법을 바르게 적용하여 판단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인권을 우선해야 한다.
일본 사법제도의 부조리함을 영화에서 보면서 한국 사법제도의 부조리함을 볼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혹시 그만큼 일제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까? 부조리한 공권력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한 때다.
목사와 성도, 무엇이 우선인가
아무리 국가 질서를 지키기 위한 명분이라 해도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서 재판관이 국가의 편에 서서 판결을 내리는 것은 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 이런 유감스런 일은 교회 내 목사와 성도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의 여성도 성추행 사건과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의 논문 표절과 자격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에서 노회는 언제나 목사 편에 섰다.
어떻게 이런 판결을 내릴 수 있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공개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분쟁을 조정할 책임이 있는 노회 관계자들이 대체로 목사의 편에 서서 사건을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사건의 진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목사의 관점에서 보려는 태도를 보인다.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한 것인지는 혹은 목사의 영적인 권위를 최후의 보루로 삼고 이것을 지키기 위한 조치인지는 몰라도 목사의 비리를 감싸고 도는 것은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일과 전혀 무관하다. 목사의 잘못을 공적으로 인정했다고 해서 교회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진 않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책임질 일은 책임지도록 할 때, 오히려 건강한 교회가 세워질 수 있지 않을까? 설령 목사의 잘못이 공개적으로 선언된다고 해도, 그래도 교회는 하나님이 지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