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살아서 끝내 살아서
살아서 살아서 끝끝내 살아 내어
나는 부르리 인생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인간의 노래

▲ 416합창단이 '어느 별이 되었을까'와 '인간의 노래'를 불렀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끝끝내 살아 내자고, 세월호 유가족들은 노래를 불렀다. 곡명은 '인간의 노래'. 1980년대 일본 철도 회사 민영화로, 고용 승계 과정에서 해고되거나 차별과 인권침해를 당해 200명에 가까운 노동자가 자살했다. 작곡가 야마노키 다케시는 이 사건을 보며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앞둔 4월 13일, 안산 합동 분향소 앞에서 열린 예배에 유가족과 시민으로 구성된 '416합창단'이 인간의 노래를 불렀다. 세월호 추모곡 '어느 별이 되었을까'도 불렀다. 노란 티를 입은 어머니, 아버지들의 목소리가 분향소 앞에 울려 퍼졌다. 소리는 귀가 아니라 가슴속으로 스몄다. 눈물이 배어 나왔다.

▲ 목요 기도회 팀과 주일예배 팀이 유가족과 함께 예배를 준비했다. 시작 1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2주기 예배는 분향소 앞 기독교 예배실에서 1년 넘게 매주 기도회를 진행해 온 목요 기도회 팀과 주일예배 팀이 준비했다. 예배 2시간 전부터 세월호 가족과 함께해 온 목사들과 신학생들이 단상을 설치하고 의자를 놓았다. 가족들도 합창 연습을 하며 준비를 도왔다. 단상에는 박인환 목사(화정교회)가 세월호 가족들을 위해 깎은 십자가가 나란히 놓였다. 가운데 부분을 파낸 작은 십자가는, 세월호 가족들의 뻥 뚫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배에는 세월호 가족 30여 명이, 전국 각지에서 온 400여 명이 자리를 채웠다. 의자가 모자라 일부는 땅바닥에 앉거나 서서 예배를 올렸다.

▲ 300여 명이 모였다. 아직 저녁에는 날씨가 쌀쌀했다. 사람들은 땅바닥에 앉기도 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시대의 증언 시간에는 미수습자 허다윤 양의 언니 허서윤 씨가 단상에 올랐다. 마이크에 입을 대고 말하려는데,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눈물을 그치고 말을 해 보려 했지만 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서윤 씨는 겨우겨우 참으며 한 마디 한 마디씩 했다. 유가족들도 울고 참여한 사람들도 울었다.

▲ 미수습자 다윤 양의 언니 서윤 씨.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안녕하세요. 단원고 2학년 2반 허다윤 언니입니다. 아직 세월호 속에 제 동생 다윤이가 있습니다. 아홉 명의 미수습자가 있습니다. 2주기가 될 때까지 아직도 꺼내 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가 없고요. 보고 싶어도 보러 분향소를 갈 수도 없고요. 학교를 갈 수도 없고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제 동생 다윤이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저희 아홉 명의 미수습자 단 한 명도 유실 없이 나올 수 있도록 여러분이 함께 기도해 주세요. 온전한 인양을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도와주세요. 다 같이 함께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침통해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김기석 목사(청파교회)가 설교를 맡았다.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날 때부터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던 내용이었다. 김 목사는 "예수님의 속뜻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 예수님은 '너희가 물어야 할 것은 누구의 죄 때문에 이 사람이 불행하게 되었는가라는 신학적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을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생명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물을 때, 그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드러난다'고 하셨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는) 탐욕스러운, 맘몬을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이 탐욕이 빚어낸 참사이기도 합니다. 또한 구조 책임을 방기한 국가기관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 진상은 속속들이 파헤쳐져야 합니다. 누군가는 그 사건을 망각의 강물 속에 띄워 보내고 싶겠지만, 그 일이 이 땅에서 아무런 결실도 없이 우리는 치열한 '기억 투쟁'을 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왜 하나님이 그들을 돕지 않으셨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비틀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다시는 그들을 산 자의 땅으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의미 있는 죽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을 의미 있게 바꾸는 일은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의미 있는 죽음은 어떻게 발생합니까. 다시는 그런 억울하고 무고한 죽음이 반복되지 않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 김기석 목사는 "죽임당한 사람들이 살아 있는 자를 위로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김기석 목사는 미켈란젤로가 죽기 직전까지 매만지던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이야기하며 설교를 마무리했다.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쓰러져 가는 예수를 성모가 뒤에서 안고 있는 모습이다. 김 목사는 "그 작품을 가만히 보면, 마치 죽임을 당한 아들이 어머니를 업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작품을 통해 은총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죽임당한 이가 살아 있는 자를 위로하고 붙들어 줍니다. 신음하는 이웃들을 내 품 안에 안고 일으켜 세우려 할 때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업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살게 한다는 사실입니다"고 말했다.

성찬이 이어졌다. 안홍택 목사(고기교회)가 집전했다. 단원고 희생자 남지현 양의 언니 남서현 씨와 김동혁 군의 동생 김예원 양이 성찬을 도왔다. 이들은 성찬 동안 희생자 304명의 이름이 담긴 상자를 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빵과 포도주를 먹은 다음 이름이 쓰인 종이를 하나씩 가져갔다. 앞으로 그 이름을 기억하고 기도하기로 했다.

▲ 성찬위원으로 단원고 희생자 형제자매들도 함께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세월호 2주기를 기억하고 찾아온 기독교인들은, 온전한 선체 인양으로 미수습자 9명이 돌아오고 참사의 진실이 밝혀지도록 기도했다. 또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시고, 교회가 이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샘솟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노래를찾는사람들의 '그날이 오면'을 다 함께 부르고 예배는 마무리됐다. 노래 가사가 희생된 아이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잘 어울렸다. 진실을 감추려는 자들의 거짓과 방해를 이기고, 끝내 살아 내어 모든 것이 드러나는 그날까지 함께하겠다고 가족들과 참가자들은 다짐했다.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은 합동 분향소에서 희생자들의 얼굴을 보았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려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아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마지막에는 모두 일어서서 '그날이 오면'을 불렀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김기석 목사 설교 전문

누가 사람인가?

• 라헬의 울음

주님의 은총과 위로가 이 자리에 함께한 모든 분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4월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우리는 봄을 봄답게 맞이할 수 없습니다. 피어나는 꽃들과 함께 누군가의 신음 소리 또한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예레미야 선지자는 패망한 조국의 현실을 보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렘31:15) 이 땅의 라헬들도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지금 울고 있습니다.

295명의 희생자들, 그리고 9분의 미수습자들의 가족들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비통의 시간을 견디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두 번이나 지나고 있습니다. 꽃이 피어도 눈물겹고, 초목이 무성해져도 눈물겹고, 단풍이 들어도 눈물겹고, 흰 눈이 내려도 눈물겨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회색빛 시간을 지나는 동안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동정 피로를 호소하며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냐'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한 번도 누군가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 자기들의 일상의 자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강자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 권력에 길들여진 사람들입니다. 보수 언론과 정부는 세월호 참사 유족들과 그들과 연대하려는 이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겨 불온시하고 있습니다.

가련한 나라입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국가는 실종된 상태였습니다.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국가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기울어 가는 뱃전을 붙들고, 다소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결국 누군가가 와서 구해 줄 거라는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던 이들이 서서히 밀려오는 물을 보며 느꼈을 공포의 시간을 떠올릴라치면 견디기 어렵습니다. 채 살아 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야 했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배가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가족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팽목항을 뒤흔들고 있을 때도 정부는 실종 상태였습니다. 그 후에도 이 참사의 책임을 지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진상조차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들은 태평합니다.

인문학자들은 공적인 역사에서 배제되고 사라짐으로 그 누구도 '대변'해 줄 수 없는 희생자들을 일러 '서벌턴'(subaltern)이라 칭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역사의 이면에는 주류 세계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착취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해 온 이들의 피눈물이 강이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현상을 유지함으로 이익을 보는 이들은 한사코 그 현실을 외면하려 합니다. 억눌린 이들의 혀를 잘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 혀 짤린 하느님 / 우리 기도 들으소서 / 귀먹은 하느님". 우리는 그러한 불의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피라미드 세계로 상징되는 애굽에서 온몸으로 체제의 무게를 받아 내던 하층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천대받고 착취당하고 폭행당하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밤 되어 누추한 자리에 고단한 몸을 뉘였을 때 그들은 끙끙 신음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소리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의 신음 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신다"고 말입니다.

사람은 잊어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때가 되면 이 불의한 역사는 시정되고야 말 것입니다. 아무리 서발턴들의 억눌린 신음 소리를 막거나 은폐하려 해도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주님의 날이 다가옵니다. 불의한 자들이 심판받고, 억눌렸던 자들의 한이 신원되는 날 말입니다. 많은 교회가 세월호 참사를 모른 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아픔의 자리에 성육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몸과 마음은 힘 있는 이들을 향해 기울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세월호 유가족 못지않게 외로운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은 많지만 당신의 마음을 알아 드리는 이들은 적기 때문입니다.

• 피에타

로마의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가보신 분들은 누구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앞에 발길을 멈춥니다. '피에타'는 슬픔 혹은 비탄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그런데 많은 예술가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형상화하면서 '피에타'는 그런 형태의 그림이나 조각을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바티칸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조형적으로 매우 아름답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건장한 아들을 무릎 위에 눕힌 마리아의 벌어진 두 다리가 터무니없이 크고 어깨는 넓습니다. 게다가 마리아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젊고 고요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리아의 얼굴이 젊게 표현된 것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그 평온한 얼굴은 '피에타'라는 이름이 생소할 정도로 낯설기만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그 작품을 제작한 때는 1499년경이라고 합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온 유럽의 교회가 혼돈에 빠져들던 상황이었습니다. 교황청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미켈란젤로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하는 역할과 비슷합니다.

'피에타' 하면 맥락은 다르지만 저는 성경에 나오는 다른 한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리스바입니다. 리스바는 사울의 첩입니다. 다윗이 역사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사울과 그 일가족들은 그늘진 곳에 유폐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숨어 있다고는 해도 그들은 늘 감시의 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스바가 역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삼 년 가뭄이 닥쳐왔을 때입니다.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다윗은 그 가뭄의 재앙이 누구 때문에 빚어진 일인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권력 주변에 있는 이들은 사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데 대한 벌이라고 조언했습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가서 어떻게 해야 그들이 화를 풀고 자기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울의 일족 일곱 사람을 내주면 그들을 나무에 달아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그대로 하도록 허락합니다. 죽임을 당한 일곱 명은 리스바의 두 아들과 사울의 딸 메랍의 아들들 다섯 도합 일곱 명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남의 칼을 빌려 적을 제거하는 노련한 정치술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이 불쾌한 사건은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리스바는 차마 그들을 그렇게 떠나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보리 수확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리스바는 상복을 가져다가 바윗돌 위에 펴고 시신을 그곳에 수습하여 두었습니다. 낮에는 새가 내려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들이 주검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리스바는 피눈물을 삼키며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것은 억눌린 함성이었습니다. 그 광경은 그 비열한 사건을 추문거리로 만들었습니다. 리스바의 존재는 다윗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마침내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 희생자들의 뼈를 수습하여 장례를 치뤄 주도록 명령합니다. 그러자 가뭄이 그쳤습니다.

• 오늘 우리의 소명

세상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인간의 합리적 이해를 벗어난 일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당황합니다. 많은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그런 현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현실의 쓰라림을 은폐하곤 합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들의 질문에는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그런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이 구절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 속에 담긴 속뜻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너희가 물어야 될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신학적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를 위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왜 그 무고하고 예쁜 아이들이, 그리고 평범한 행복을 꿈꾸던 사람들이 그렇게 속절없이 죽어야만 했을까요? 물론 구조 책임을 방기한 국가기관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습니다. 그 진상을 속속들이 파헤쳐야 합니다. 누군가는 그 사건을 망각의 강물 속에 띄워 보내고 싶겠지만, 그 일이 우리에게서 스러지지 않도록 치열한 기억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차적 과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이 그들을 돕지 않으셨느냐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비틀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을 산 자의 땅으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을 의미 있는 죽음으로 바꿀 수는 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벌거벗은 욕망이나 이익이 아니라 생명이 최우선의 가치로 존중받는 세상을 열어 가야 합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우리 사회가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2년 전 속절없이 죽음의 강을 건넜던 이들은 살아 있는 사자가 되어 우리 곁에 머물 것입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 호세아는 "바람을 먹고 살며, 종일 열풍을 따라서 달리고, 거짓말만 하고 폭력만을 일삼는" 에브라임에 닥쳐 올 파멸을 예고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파멸을 목전에 둔 것은 아닌지요? 이 자리에 동참한 이들은 피해자 의식을 넘어 역사 변혁의 주체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피에타 이야기로 제 설교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죽기 직전까지 매만지고 있던 작품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론다니니의 피에타'(1564년)라고 부릅니다. 그 작품은 지금 밀라노에 있는 스포르체스코성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피에타상은 바티칸의 피에타와 여러모로 대조적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우툴두툴한 돌의 질감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고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태가 좀 특이합니다. 어머니가 뒤에서 자꾸만 중력에 이끌려 무너져 내리는 아들을 부축하고 있는 형태인데, 가만히 보면 마치 죽임당한 아들이 어머니를 업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 기묘합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작품을 통해 은총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죽임당한 이가 산 자를 위로하고 붙들어 줍니다.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그 신비를 경험할 수 있기를 빕니다. 누가 사람입니까? 신음하는 이웃들의 삶의 자리에 다가서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안일한 평안을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희생당한 304명은 우리의 인간됨을 묻는 물음표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희생자들의 가족들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그들의 슬픔을 나누어 지며 더 나은 세상의 주체로 서기 위해 광야에 나선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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