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안산에 세월호 정부 합동 분향소가 있다. 단원고등학교에는 세월호에 탔던 아이들 교실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안산에는 '416기억저장소'가 있다. 아픔의 기억들이 잊히지 않게 기록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진 시민들이 모여 만들었다. 사무실 옆 기억전시관에는 유품 밎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기억저장소는 '기억과 약속의 길'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참가자들은 기억전시관-단원고-합동 분향소를 방문하게 된다. 2015년 2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주 진행해 왔다. 토요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다.

4월 9일 열리는 기억과 약속의 길을 신청했다. 날씨는 구름이 끼어 온종일 흐렸지만 연둣빛 새싹이 오르고 벚꽃이 피어 봄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사람들은 엊그제 비가 왔는데도 꽃이 떨어지지 않았다며 들떠 있었다. 안산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 416기억전시관은 낡은 상가 건물 3층에 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유가족들이 원한 건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4호선 고잔역에 내려 택시를 탔다. "어디요?" 택시 아저씨는 '416기억저장소', '416기억전시관'을 알지 못했다. 휴대폰으로 장소를 찾아 보여 주었다. 아저씨는 오래된 연립주택가에 내려 주었다. '전시관이 있을 만한 동네는 아닌 것 같은데'. 기억전시관은 상가 건물 3층에 있었다. 복도와 계단이 그다지 말끔하지는 않았다.

열 평 남짓 되는 공간에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천장에는 작은 유리 상자가 빼곡했다. 상자 안에는 아이들 사진과 유품 등이 보관되어 있다. 고개를 꺾어 상자를 보다가 아이들 사진과 눈이 마주치면 이내 고개를 떨궜다. 오래 보고 있기 힘들었다.

▲ 416기억전시관 천장(사진 위). 노순택 작가의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사진 아래). ⓒ뉴스앤조이 구권효

노순택 작가의 '사람들'이라는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세월호 가족들과 시민이 경찰과 대치하는 사진이 많았다. 작년 4월, 시행령 폐기를 주장하며 부모님들이 삭발했을 때, 부모님들이 아이들 영정 사진을 안고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도보했을 때, 경찰들이 부모님들과 시민을 막아섰을 때…. 가장 끔찍한 사진은 검은 밤하늘을 가르는 하얀 물줄기였다. 그때 경찰들은 유가족을 향해 캡사이신을 잔뜩 넣은 물대포를 쐈다.

오늘 일정을 안내할 416기억저장소 김종천 사무국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참석자 30여 명은 전시관에 주저앉았다. 이번 참석자들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경북지부 선생님들이었다. 몇몇 교사들은 자기 아들딸이나 제자를 데려왔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부터 중고등·대학생, 30~60대 선생님까지 다양한 연령층이었다.

▲ 416기억전시관에서 김종천 사무국장의 설명을 들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김종천 사무국장은 2014년 4월 16일부터 지금까지, 세월호 가족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설명했다. 지난 2년 동안 가족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구조, 특별법 제정, 인양, 기간제 교사 순직 인정, 시행령 폐기, 특검, 단원고 교실 존치 문제까지. 그런데도 여론은 유가족들이 너무 많은 걸 요구한다고 떠들어댄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산이 더 그렇다.

가족들 몸과 마음은 이미 상할 대로 상했다. 어떤 아버지는 이가 12개나 빠졌고, 또 어떤 아버지는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에 괴로워한다. 불쑥 불쑥 올라오는 분노에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독설을 뱉기도 하고, 길에서 아는 사람이라도 보이면 먼 길로 피해 다닌다. 최악은 이런 가족들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 한 선생님은 교사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 두 명을 데리고 왔다. 단원고 희생자 아이들과 동갑이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너 단원고니?"

416기억전시관에서 나와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단원고에 도착했다. 토요일이라 교정은 한산했다. 농구 코트에서 공을 던지는 아이들 빼고는 사람이 없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이곳은 매일 시민으로 가득 찼다. 교실 벽에 창문에 책상에 칠판에 편지를 써 붙였다. '살아서 돌아오라', '기적은 일어난다'. 그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있었다.

아이들이 쓰던 교실은 2층과 3층에 '아직까지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복도를 돌아 교실이 보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얇은 막이 있는 것같이, 교실이 있는 곳과 그 바깥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교실에 붙어 있는 편지들을 볼 때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희생자 아이들의 책상에는 사진과 편지, 선물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손끝이 떨렸다.

▲ 참가자들은 아이들 자리에 앉아 보는 걸 주저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아이들 자리에 앉아 보세요." 김종천 국장이 말했다. 아무도 감히 앉지 못했다. 선생님들은 모두 죄인이 된 것 마냥 얼굴을 숙이고 교실 뒤에 서 있을 뿐이었다. 김 국장이 두 번 세 번 말하자 그제야 사람들이 하나둘 앉기 시작했다.

김 국장은 1반부터 7반까지 참가자들을 인솔했다. 중간중간 미수습자와 생존 학생, 희생자 형제자매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비참한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생존 학생 중 3명이 자살을 시도했고 많은 아이가 유서를 가슴에 품고 다닌다고 했다. 한 학생은 이런 말도 들었다고 한다.

- 너 단원고니?
- …네.
- 어휴 재수없어.

희생자들의 형제자매들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게 됐다. 세월호 이야기를 하거나 좀 힘들어하고 날카로워지면 "유난 떤다", "깝친다", "나댄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전 친구들과는 관계가 다 끊어졌다. 아니면 자기를 감추고 새 친구를 사귀는 형편이다. 친구들이나 선생님이 자기한테 뭐라고 할까 봐 두려워 급식을 먹지 않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 책상 하나하나에 그리움이 배어 있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단원고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희생자 선생님 12명 중 2명은 순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들이 기간제 교사였기 때문이다. 김종천 국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죽음도 다르다고,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라고 비판했다. 설명을 듣고 있는 선생님들은 마치 꾸지람을 듣는 양 고개를 떨궜다.

교실은 참가자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장소였다. 단순히 희생자를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 교육의 근본정신부터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이런 교실이 사라지려고 한다. 단원고와 경기도교육청은 새로 들어온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이 교실을 옮겨야 한다고 얘기한다. 유가족들이 작년부터 그렇게 대책을 내놓으라 할 때는 답이 없더니, 신입생이 입학할 때가 되자 옮겨야 한다고 말한다.

▲ 위에서부터 미수습자 다윤이, 은화, 영인이, 현철이 책상. ⓒ뉴스앤조이 구권효

유가족들의 입장은 분향소에서 만난 세희 아빠가 설명해 주었다.

"교실 존치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언론은 무슨 유가족이 욕심내는 것처럼 말하잖아요. 우리는 추모하기 위해 교실을 보존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우리 딸 납골당에 가면 볼 수 있어요. 우리는 단원고 들어가기 정말 싫어요. 너무 힘드니까.

교실을 그 자리에 보존하자는 건 단순히 추모의 목적이 아니에요. 이 나라 교육을 다시 보자는 거예요. 이런 일을 겪었으면 뭔가 변해야 할 것 아닙니까. 참사 이후에 모두가 다 그랬잖아요. 대한민국 교육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이게 변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그러면 뭔가 전반적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대로잖아요."

▲ 단원고 세월호 교실이 존폐의 위기다. 지금까지 세월호 가족들이 원한 건 단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이 나라에서 유가족이 되지 마라"

단원고에서 나온 선생님들은 한동안 멍했다. 옆 사람과 이야기도 잘 하지 않았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한 선생님과 얘기했다. 서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나누었는데, 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 교실 들어가 보니까 어떠세요?
- 아, 교실은 처음 가 봤는데…. 음….

그 뒤로 그냥 걸었다. 말을 이어 보려다 말았다.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조차도 내가 느낀 바를 설명하는 데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짓누르는 슬픔? 압도하는 슬픔? 입을 다물고 그냥 걸었다.

▲ 세월호 가족들은 벚꽃이 제일 보기 힘들다고 한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단원고에서 합동 분향소까지는 20분 정도 걸린다. 분향소가 유원지에 있기 때문에 주변을 잘 꾸며 놓았다. 작은 호수도 있고 경치가 좋다. 벚꽃과 봄꽃이 만개해 사진 찍는 사람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개와 함께 산책하고, 손을 잡고 걷는 젊은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이 사랑은 해 보았을까? 괜히 또 눈물이 차올랐다.

분향소 앞 '기억과 약속의 방'에 도착했다. 9반 임세희 양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세희 아빠 임종호 씨는 참가자들에게 "대한민국에서 유가족이 되지 마라"고 말했다. 유가족이 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야 한다고 했다. 단식도 해야 하고, 삭발도 해야 하고, 아이 영정사진을 들고 도보 행진도 해야 하고, 경찰 버스 바퀴 앞에 드러누워야 하고…. 진실은 없이, 적당히 보상받고 끝내라고 강요하는 야만의 나라다.

▲ 분향소 앞 '기억과 약속의 방'에서 유가족 간담회를 진행했다. 세희 엄마(사진 중간)와 세희 아빠(사진 아래). ⓒ뉴스앤조이 구권효

몇몇 참가자는 "기억하려 했는데 자주 잊고 살아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한 선생님은 "솔직히 세월호 가족만큼 그 슬픔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면 못 살 것 같다"고 고백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 젊은 선생님은 "잊은 게 아니다. 그냥 그 슬픔을 담고 살았던 것이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 젊은 교사의 표현이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짓누르는 슬픔, 그 압도하는 슬픔을 벗어나는 방법이 있을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외면하고 눈을 감지 않는 한 말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나고 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독교인 유가족들은 전에 다녔던 교회로부터 "이제 돌아올 때입니다", "주님의 전으로 돌아오세요"라는 문자를 받는다고 한다. 유가족들은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지 못한다. 그들이 말하는 '돌아올 때'는 슬픔을 잊을 때이며, '주님의 전'은 슬픔을 벗어 놓고 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담고 사는 삶, 슬픔을 안고 사는 방법은 알려 주지 않는다.

▲ 참가자들은 분향으로 일정을 마쳤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기억과 약속의 길은 매주 토요일 진행된다. 신청자가 10명 이상이면 운영한다. 토요일 오후 2시 416기억전시관(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인현중앙길 38)에서 시작한다. 전시관에서 단원고를 거쳐 분향소에서 마친다. 참가 신청 및 문의는 416기억저장소(031-410-0416)로 하면 된다. 자세한 설명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